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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경/ 내면의 동굴, 그러므로 어쩜 타인의 방

고충환

이재경/ 내면의 동굴, 그러므로 어쩜 타인의 방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 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예술은 이야기의 기술일 수 있다. 그리고 상상력은 이야기의 기술에 있어서 결정적인 구성요소가 된다. 여기서 상상력은 현실과 동떨어진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그 자체 현실에서 유래한 것이면서 동시에 재차 현실인식을 강화하는, 현실과의 상호유기적인 관계 속에 있다고 봐야한다. 얼핏 현실성을 결여한 것 같지만 무의식과 같은, 억압된 욕망과 같은, 그리고 때로 자신조차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원형의식과 같은 보다 심층적인 이면에서 현실을 반영하고 현실성을 획득하는 경우로 보아야 한다. 
이재경의 작업이 그렇다. 작가의 작업은 특히 서사성이 강하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지어내고, 그 이야기를 시나리오며 소설로 옮긴다. 그리고 각본 그대로 평면회화며 세라믹으로 조형한다. 각본 그대로라고는 했지만 아무래도 글과 조형의 생리가 다른 탓에 일정하게 변형되는 과정을 포함한다. 그러면서도 크게는 최초 각본과의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각각 시나리오와 소설, 평면회화와 세라믹이 상호유기적인 관계 속에 놓이면서 작가만의 이야기 만들기에 소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선 세라믹이 두드러져 보이지만, 사실은 이 모두가 작가의 작업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구성요소 내지 형상요소가 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게 구성되고 형상화된 서사는 비록 작가 개인의 상상력에서 비롯한 것이지만, 아님 작가의 개인사에 연유한 것이지만, 상상력이나 삶의 경험이란 것이 알고 보면 어슷비슷한 탓에 작가의 작업은 개인사의 경계를 넘어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이처럼 작가의 작업에서 상상력은 결정적이다. 상상력 중에서도 서사가 강하다는 점에서 문학적 상상력이, 그리고 흙과 물과 불과 공기의 4대물질원소와 상상력이 긴밀하게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물질적 상상력이 작가의 조형작업을 견인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 4대물질원소의 상호작용으로 치자면 모든 세라믹워크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화학과정으로도 볼 수가 있겠지만, 작가의 경우에는 보다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4대물질원소의 상호작용이 상상력을 유발하는 계기라고 본 것이 가스통 바슐라르의 물질적 상상력 개념이며(물질원소의 화학작용이 물질의 차원을 넘어 비물질 차원에서의 화학반응으로 확장되는 것이 상상력이고 특히 물질적 상상력이다), 그 중 작가는 특히 불이 변형된 촛불의 미학과 몽상의 시학에 매료된다. 
실제로도 작가의 작업은 흘러내린 촛농이 만들어낸 형상 같다. 수직성이 강한 중심형상 주변으로 촛물이 흘러내려 촛농으로 맺히면서 만들어진 형태 같다. 여기서 촛물은 촛불이 흘리는 눈물일 수 있고, 여기에 감정 이입된 작가의 눈물일 수 있다. 그리고 촛농으로 맺힌 형태는 그 눈물이 작가의 상상력을 자극해 작가의 내면으로부터 되불러낸 풍경, 말하자면 억압된 풍경이며 내면적인 풍경, 심리적인 풍경이며 무의식적인 풍경일 수 있다. 굳이 눈물이 아니어도 무방하다. 촛물이나 촛농이 아닌 연기에 그리고 촛불 자체에 감정이입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면 연기처럼 사라지는 부재하는 것들이, 연기처럼 덧없는 것들이, 불처럼 일렁이는 욕망이, 파토스가, 그리고 승화가 또 다른 형태를 빗을 것이다. 실제로도 작가의 작업에는 이 모든 상상력의 계기들이, 감정 이입된 형상요소들이 어우러져 저마다 유기적인 형태를 빗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바슐라르에 이끌려 작가의 작업을 촛불이 불러일으킨 상상력이며 몽상이 빗어낸 형상으로 본 것이지만, 작가의 작업은 다르게는 석회암 동굴 속에 맺힌 종유석을 떠올리게도 한다. 종유석은 동굴 속 천장에도 그리고 바닥에서도 자라는데, 종유석 말단 부위마다 사람머리가 자라고, 관계가 꽃처럼 피어나고, 사연들이 맺힌다. 여기서 동굴비유는 암시적인데, 숨어있기 좋은 방, 천일야화에서처럼 밑도 끝도 없이 샘솟는 이야기들의 원천, 천 개의 고원에서와도 같은 의식 혹은 무의식의 주름에 해당한다. 그 주름을 헤집어 작가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 그러므로 독백을, 어쩜 고독을, 그리고 때로 눈물을 발굴하고 형상으로 빗는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결코 밖으로 나갈 일이 없는 저만의 이야기들이 메아리쳐 울리는 내면의 동굴 같고, 갇힌 소리들이 맴도는 자기만의 동굴 속에 서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작가의 내면 풍경, 어쩜 타인의 방 속으로 들어와 있는 것 같다. 
내면풍경? 타인의 방? 작가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처럼 저만의 세계며 동화적인 세계 속에 빠져든다. 그 세계 속에서 작가는 비결정적인 주체, 가변적인 주체, 다중적인 주체, 이행하는 주체, 사물과 인격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물주체로 분열되고 거듭난다. 그렇게 작가는 도자기가 되고 싶은 흙으로(흙의 여정), 너를 향한 편지로(글씨의 여정), 미처 붙이지 못한 편지들로 가득한 탁자로(감정의 여정), 가면으로(관계의 이중성?), 바다 속에서 잃어버린 얼굴로(정체성 문제?), 사람들의 입속을 달콤하게 하다가 스스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사탕으로(고독), 너를 따라가다 보면 네가 나올 줄 알았던 섬 끝으로, 자유자재로 이행하면서 변형되고 변태된다. 자동기술법이고 자유연상기법이다. 여기서 저기로, 이것에서 저것으로 이행하게 해주는 논리적인 개연성 같은 것은 없다. 다만 내적 필연성의 즉각적인 자기실현이 있을 뿐이다. 
그게 뭔가. 꿈이 꼭 그렇다. 꿈의 작동기제는 무의식이다. 현실에서 의식이 무의식을 억압하는 것을 생각하면, 꿈이 열어 보이는 무의식의 세계야말로 어쩜 현실의 원형이며 진정한 현실일 수 있다. 억압된 욕망이 자기실현을 얻는 것이다. 그렇게 촛농이 녹아내려 쌓이면서 만들어진 것 같은, 석회암 동굴 속 종유석 끝에 맺혀 빗어진 것 같은, 촛대 같은, 샹들리에(샹들리에를 뒤집어놓은?) 같은 형상들이 저마다의 내면에 억압된 타자 그러므로 자기타자와 대면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항상적으로 이행 중이므로 어디로 어떻게 가닿을지 알 수 없는 미증유의 여정을 떠올리게 만든다. 존재가 꼭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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