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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희, 부재의 풍경을 읽다

고충환

이순희, 부재의 풍경을 읽다 


사진과 관련한 작가의 배경을 보면, 작가는 사진전공으로 학사, 석사, 박사 과정을 거쳤다. 과정을 거친 이후에는 10년 넘게 박물관에서 프리랜스로 일하면서 각종 유물을 사진으로 찍고 기록하고 보존하는 아카이빙 작업에 종사했다. 아마도 한국적 미의식에 눈뜨게 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동안의 성과를 모아 사진집으로 출간하기도 했는데, 역시 사진전문을 표방하는 눈빛출판사에서 <정령의 숲>이란 제목으로 출간한 게 2017년의 일이다. 이번 전시 역시 그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서, 경주 일대를 소재로 한 사진들이다. 눈빛출판사는 사진작가들이면 누구나 거쳐 가는 코스처럼 인식되고 있어서, 작가의 사진집 출간은 작품성을 객관적으로 인정받은 경우로 봐도 되겠다. 이처럼 전공으로 보나 그 동안의 이력으로 볼 때 사진에 대한 작가의 태도며 입장에 대해서는 전문성을 넘어 자기만의 사진적인 언어, 오리지널리티와 아이덴티티를 추구하고 전개해 보이는 단계에 와 있다고 봐도 되겠다. 

그렇담 자기만의 사진적인 언어, 오리지널리티와 아이덴티티는 어디서 어떻게 찾아질 수가 있는가. 작가는 자신만의 사진언어를 어떻게 담보하는가. 전작으로 치자면 <정령의 숲>이란 제목이, 근작에서는 <부재의 풍경을 읽다>는 전시주제가 힌트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정령의 숲>이란 천년고도의 경주에 서린 영적 기운을 의미할 것이다. 여기서 정령도 영적 기운도 하나같이 감각적인 대상은 아니다. 감각적인 대상을 초월한 대상, 비감각적인 대상이다. 그 바통을 이어받은 것이 근작에서의 부재하는 풍경이다. 부재하는 풍경은 없는 풍경이 아니다. 부재는 존재가 존재하는 특이한 한 방식이다. 그러므로 부재하는 풍경은 부재를 통해서 존재하는 풍경, 부재를 통해서 존재를 증명하는 풍경, 부재를 통해서 존재가 한때 존재했었음을 상기하고 암시하는 풍경이다. 역시 감각적인 풍경을 초월한 풍경이고 비감각적인 풍경이다. 
이와 관련한 작가의 전언이 흥미롭다. 즉 작가는 보이는 것 너머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다. 감각적인 것 너머에 있는 뭔가 비감각적인 것, 정령이며 영적 기운에 해당하는 것, 부재하면서 존재하는, 부재를 통해서 존재하는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다. 뭔가 일목요연한, 최소한 일관된 주제의식이 느껴지지가 않는가. 폴 클레는 예술이란 가시적인 것을 통해서 비가시적인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했고, 그보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가시적인 것을 유령이라고 불렀다. 이게 다 무슨 말인가. 바로 암시의 기술이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걸 어떻게 암시할 것인가. 암시를 통해서 어떻게 비감각적인 대상을 감각적인 층위로 불러낼 것이며, 비가시적인 대상을 가시권 내에 소환할 것인가가 문제다. 
그렇담 작가는 그걸 어떻게 실현하는가. 작가의 사진은 어둑하다. 주로 밤에 찍은 사진들이다. 어둑한 가운데 희미하게 그 실체를 드러내 보이는 사진들이다. 밤에는, 특히 도시 불빛마저도 없는 고도에서 사물은 칠흑 같은 사위에 가려 아무 것도 보이지가 않는다.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사진을 찍는가. 바로 스트로보 조명을 이용해 찍는다. 스트로보 조명 자체는 강렬해 빛과 어둠으로 극명하게 대비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강렬한 빛이 먹히면서 조명발을 받은 피사체가 부드럽고 희미한 질감을 드러내 보인다. 부드럽고 희미한 질감? 바로 정령에 해당할 무엇, 영적 기운으로 부를 만한 뭔가가 부재의 틀을 깨고 존재의 층위로 되돌아올 때의 질감이다. 그렇게 폐사지에 흩어진 석탑들의 잔해가 돌 속에 잠자던 시간을 흔들어 깨우는 것 같고, 당산나무의 신령스런 기운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다시, 작가는 밤에 사진을 찍는다고 했다. 왜 굳이 밤을 고집하는가. 왜 밤이 아니면 안 되는가. 밤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낮의 세계와 밤의 세계는 사뭇 혹은 많이 다르다. 낮의 세계는 감각적인 세계고 가시적인 세계다. 존재의 시간이며 문명의 시간이다. 반면 밤의 세계는 비감각적인 세계고 비가시적인 세계다. 부재의 시간이며 오롯한 자연의 시간이다. 낮 동안 빛에 가려 잠자던 비감각적인 것들, 비가시적인 것들, 영적인 것들, 암시적인 것들, 부재하는 것들, 정령과 유령이 회귀하는 시간이다. 바로 작가가 굳이 밤에 사진 찍기를 견지하는 이유다. 그렇게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부유하듯 떠오르는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시도다. 작가의 사진은 그 시도를 보여준다. 그렇게 밤의 사진을 시도하면서 비감각적인 것에 감각의 옷을 덧입히고, 비가시적인 것에 가시적인 몸체를 부여한다. 그렇게 아마도 천년동안 묵었을 시간을 현재에 되불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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