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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수/ 경주, 또 다른 풍경

고충환

이상수/ 경주, 또 다른 풍경 


주제를 보면, <경주, 또 다른 풍경>이다. 천년고도 경주 말고 또 다른 경주가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담 경주에서 보아낸 또 다른 풍경이란 무슨 의미일까. 풍경과 자연은 다르다. 자연은 객관이지만, 풍경은 주관에 속한다. 주체에게서 자연으로, 그리고 자연 쪽에서 주체에게로 건너가고 건너오는 것들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풍경은 비롯한다. 자연에 감정이입 된 주체로부터, 풍경은 비롯한다. 그럴 때(자연에 주체가 감정이입 된 상태)에야 비로소 서정적인 풍경, 아득한 풍경, 막막한 풍경, 그리고 쓸쓸한 풍경이 가능해진다. 
그렇담 작가에게는 언제 어떤 계기로 자연이 풍경으로 와 닿았을까. 이와 관련한 작가의 전언이 의미심장하다. 어느 날 문득 늘 다니던 길에서 갑자기 눈에 들어온 낯선 풍경을 만난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단다. 그건 사실 알고 보면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반 근성(아님 관성)으로 본 풍경이었고, 지나치면서 본 풍경이었다. 보면서도 안본 것에 진배없는 풍경이었다. 똑같은 풍경이 동시에 친근하기도 낯설게도 하는 것이지만(존재의 양가성), 이보다는 자연이 풍경으로 전이된 경우로 보아야 한다. 주체와 무관했던 풍경이 불현듯 유관한 풍경으로 이행한 경우로 보아야 한다. 
그렇게 작가에게 경주는 다시 보이기 시작했고,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감겨있던 눈이 불현듯 떠진 것인데, 이를 작가는 이상화된 풍경의 창조(미술사적으론 신고전주의적 풍경)가 아닌 풍경의 발견(낭만주의)이라고 했다. 풍경의 발견? 어떤 풍경? 빛바랜 흑백사진에서처럼 망실된 기억을 상기시키는 풍경, 사라지고 있는 풍경, 아스라한 풍경, 마치 현실의 희미한 그림자와도 같은 풍경, 그러므로 서정적인 풍경, 흡사 정서의 앙금이나 응축물과도 같은 풍경, 비현실로 건너가는 관문과도 같은 풍경, 시간이 역류하는 수문과도 같은 풍경, 그리고 그렇게 노스탤지어와 멜랑콜리로 화해진 풍경을, 그 풍경의 계기를 현실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결국 현재 속에서 과거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렇게 발견의 시간대는 현실 그리고 현재가 유래한 과거로 소급된다. 능위에서 놀던 작가의 유년시절로, 천년도 더 전부터 불어왔을 고도 경주에 부는 바람으로, 존재보다 먼 곳으로부터 와서 작가에게 유전되었을 원형적인 기억으로 소급된다. 그 자체 어쩜 상실된 고향감정과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그저 지정학적 장소로서의 고향보다는, 정신적 거소(정신적으로 기댈 데)로서의 고향 말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비록 외형적으론 경주의 풍경을 소재로 한 것이지만, 사실은 이를 매개로 상실된 고향감정을 되찾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도 작가의 그림은 쉽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데, 현대인 모두가 공감하는 상실된 고향감정을 새삼스레 일깨워주는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작가는, 작가적 상상력보다는 자연의 재현이라고도 했다. 자연의 재현? 풍경의 발견과 자연의 재현, 그것은 어쩜 내용(원형적 기억과 상실된 고향감정을 일깨우는 풍경을 현실 속에서 발견하는 일)과 형식의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사물대상 그대로를 충실히 묘사하는 사실주의적 방법을 택한다. 핍진성과 닮은꼴 그리고 영락없음이라는 말로서 형용될 수가 있을 것인데, 그렇다면 작가는 한물간 진부한 방법론을 새삼스레 꺼내든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곰브리치는 순전하게 재현적이기만 한 그림도 표현적이기만 한 그림도 없다고 했다. 다만 재현과 표현, 객관과 주관이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는 그림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사물대상에 집착하다보면 사물대상이 자기를 열어 보이는 순간이 있다. 풍경과 씨름하다 보면 풍경 너머의 풍경이 열리는 순간이 온다. 하이데거는 집요한 의식에 대해 세계가 자기를 열어 보이는 순간이 있는데, 그걸 세계의 개시라고 불렀다. 결국 작가의 그림에 보이는 핍진성과 닮은꼴 그리고 영락없음은 다만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감각적인 세계가 자기를 열어 보이는 비감각적인 세계, 관념적인 세계, 그러므로 어쩜 원형적인 세계야말로 작가가 진정 그리고 싶었던 풍경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실재로도 작가의 그림은 채색이 전혀 없진 않지만, 대개는 채색이 없이 흑백 모노톤으로만 그린 사실적인 그림들이 내면적이고 관념적인 느낌을 준다. 집요한 그리기, 치열한 그리기, 강박적인 그리기의 미덕을 주지시키고, 진부한 사실주의의 선입견을 재고하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말을 보태자면, 작가는 원래 조각 전공자로서 그동안 전시도 꾸준한 편이었는데, 이번에 회화로의 변신을 보여주고 있고(사실은 꽤나 오랫동안 준비해온), 또한 그 변신은 상당할 정도로 성공적인 경우로 보인다. 작가 속에 두 개의 개성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향후 행보를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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