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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경/ 막사리, 작고 허름한 집

고충환

전호경/ 막사리, 작고 허름한 집 


예수는, 교회는 나의 몸이라고 했다. 교회가 자신이라는 말이다. 교회가 자기정체성과 동일시된다는 말이다. 교회는 신의 처소다. 그리고 집은 인간의 처소다. 그러므로 집은 인간의 자기정체성과 동일시된다. 그 집 그러므로 자기정체성의 집은 양가적이다. 나를 집은 세계로부터 보호해주면서 격리시킨다. 나에게 집은 처소지만, 남이 보기에 집은 호기심과 욕망의 대상이 된다. 그렇게 집을 매개로 본 나는 자기동일성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잠재적인 타자이기도 하다. 
지금도 여전히 그런가. 지금도 여전히 그 논리는 설득력을 가질 수가 있는가. 타자의 집은 지금도 여전히 호기심과 욕망을 불러일으키는가. 지금도 여전히 주체의 지각장 속, 이를테면 주체와 타자, 시선과 응시가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는 지각장 속에 들어와 있는가. 그리고 그렇게 타자의 시선으로 집안을 기웃거리고 어슬렁거릴 수 있는가. 그러므로 타자를 주체로서 맞아들일(레비나스) 수가 있는가. 아파트와 오피스텔, 빌딩과 주상복합으로 구조화된 주거환경에서는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전면성(파사드)이 강하고 익명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전면성과 익명성이 타자의 시선을 차단하고 단절시키기 때문이다. 결국 주체와 타자, 시선과 응시가 상호작용하는 주거환경은 도시화에 떠밀려 풍문으로나 남아있을 뿐이다. 여기에 전호경은 그 풍문을 찾아 나선다. 그 풍문을 흔적처럼 간직하고 있는 막사리(제주도 방언으로 작은 집, 허름한 집을 뜻하는)를 찾아 나선다. 작은 집이라고 했다. 허름한 집이라고 했다. 우리 모두 그 집을 알고 있다. 바람에게 속말을 털어놓고 성에 위에 그림을 그렸던, 그러므로 바람의 집으로 불러도 좋을 그 집을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작가는 어쩜 아파트공화국 선민들이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집, 집이 집다웠던 집, 존재론적인 집을 찍는다. 그러므로 집의 존재론적인 의미를 찍는다. 

그렇게 전호경은 집을 찍는다. 더러 창고도 있지만, 대개는. 막사리란 제주도 토속 말에서도 눈치 챘겠지만, 주로 제주도의 작고 허름한 집을 찍는다. 열대에서나 볼 법한 야자수며 아마도 바람막이와도 무관하지 않을 겹겹이 쌓아 만든 돌담이 이곳이 다름 아닌 제주도임을 알게 된다. 제주도의 전형적인 풍물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사실상 사진에 등장하는 집들은 굳이 제주도가 아니라 해도 무방할 집들이다. 마치 땅속에서 솟아난 것 같은, 처음부터 땅의 일부였던 것 같은 야트막한 집들, 세월의 흔적을 상흔처럼 간직하고 있는 녹슨 철문, 해무에 묻어온 소금기를 견뎌냈을 칠이 벗겨진 벽, 잦은 바람에 길을 내어주었을 슬레이트 지붕, 블록 구조에 페인트칠을 한 거실 거실한 벽면, 까치발로 서서 보면 그 안이 들여다보일 것 같은 쪽창들, 그리고 그때그때 삶의 형편에 맞춰 증개축을 하면서 달아냈을 부속건물이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와도 같은 자가변형구조(생물학으로 치자면 변태)를 떠올리게 만드는 집들이고 정경들이다. 
그렇담 왜 굳이 제주도인가. 이 사진들은 제주도의 특정성을 겨냥하고 있는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작가의 사진은 비록 제주도를 소재로 했음에도, 야자수와 돌담과 바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제주도를 리서치하고 아카이빙 한 사진은 아니다. 제주도의 지역적인 특수성에 포커스를 맞춘 것이라기보다는, 집의 일반적인 경우에 방점이 찍힌 사진들이다. 아파트공화국 선민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집, 주체와 타자가 상호교류하고 시선과 응시가 눈을 맞추던 집, 집이 집다웠던 집(그러므로 어쩜 시절), 존재론적인 집, 바람의 집, 그러므로 어쩜 작가의 추억 속에서 되불러낸 집의 이미지를 재구성한 사진들이다. 재구성한? 작가는 아마도 작고 허름한 집이라는 의미의 제주도 토속 말에 필이 꽂혔을 것이다. 그 필이 제주도를 소재로 취하게 만든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작고 허름한 집에 살았던 추억을 찾아 헤맸을 것이다. 현실 속에서 과거를 재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상실한 과거를 되살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가 상실한 건 우리가 상실한 것이기도 하고, 재차 작가가 되불러낸 과거는 우리의 과거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가가 재구성한 집(그저 집이라기보다는 집의 이미지)은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집이 아닌, 집의 이미지라고 했다. 찍은 사진이 아닌, 재구성한 사진이라고 했다. 무슨 말인가. 작가는 현실 속에서 현실이 아닌 과거를 본다고 했다. 현실은 과거가 아닌 만큼, 현실 자체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담 현실을 각색해 현실을 과거로 만들어야 한다. 작가는 그 각색, 그 연출을 초점조절로 수행한다. 초점에 차이를 주는 것인데, 화면 가운데 부분을 선명하게 하고, 가장자리 부분을 흐릿하게 한다. 그러면 마치 가장자리가 희뿌연 유리창을 통해 보는 것 같은(낮 풍경), 가장자리가 어둑한 연극무대를 보는 것 같은(밤 풍경) 극적인 상황이 연출된다. 현재를 각색해 과거로 만드는, 현실을 연출해 이미지로 만드는 작가의 방법이다. 그렇게 작가는 집을 소재로 한 사진을 매개로 현실을 연극무대 같은 삶의 축도로 만든다. 그 무대 위에서 집은 사물오브제가 되고, 사물초상화가 되고, 사물극(오브제가 인격을 대리하는)이 된다. 그 과정에서 작고 허름한 집을, 바람의 집을 회상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호출된, 성에가 낀 희뿌연 유리창을 통해 본 세상은 아마도 우리가 본 최초의 영화관이고 영화였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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