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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희/ 나는 언제 어디에 있는가, 혹은 있었는가

고충환

여명희/ 나는 언제 어디에 있는가, 혹은 있었는가 


Why When, Why Where. 왜 언제인가, 왜 어디인가. 언제가 왜 문제이며, 어디가 왜 중요한가. 예술은 질문의 기술이다. 그리고 예술은 삶의 메타포이기도 하다. 널리 알려진 메타포로 치자면, 예술은 삶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삶이 그렇듯 예술에도 답은 없다. 삶에 대한 질문들의 연속이 삶을 만들듯 예술에 대한 질문들의 연쇄가 예술을 형성시킨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대뜸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주제를 삼았다. 그 질문은 얼핏 육하원칙에 바탕을 둔 취조를 연상시킨다. 그렇담 뭘 취조하는가. 예술의 본질을 파고들고 삶의 이유를 캐묻는다. 뭔 말인가. 언제는 시간이고 어디는 공간이다. 예술에서도 그리고 삶에서도 시간과 공간은 하나같이 본질적인 문제에 속한다. 그렇게 작가는 그림을 매개로 회화의, 주제 그러므로 의미의, 그리고 존재의 전제조건을 묻는다. 그렇담 작가가 제안한 주제는 이렇게 정리가 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작가의 그림은 처음부터 정리와는 거리가 멀다. 정리는 어쩜 폭력일 수 있다. 손에 잡히는 의미, 너무 쉽게 소통되는 의미, 쌈빡하게 정리되는 의미는 왠지 유아론적인 데가 있고 최소한 의심스런 부분이 있다. 작가는 도대체 정리를 신뢰할 수가 없다. 삶이 그렇고, 삶을 반영하는 회화가 그렇고, 의미가 그렇다. 
자크 데리다는 이처럼 의심스런 의미를 차연이라고 불렀다. 차이를 생성시키는 연기다. 궁극적인, 최종적인, 바로 그 의미는 없다. 다만 차이를 만들어내면서 계속 미끄러지는 의미들의 연쇄가 있을 뿐. 그렇담 작가의 주제는 어떤 의미의 지점을 겨냥하고 있는 것인가. 아마도 프로이트의 중층결정이란 개념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모든 의미란 중층 결정적이고, 이중 결정적이고, 다중 결정적이다. 어쩜 데리다의 차연과도 그 맥을 같이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설명하면서 중층결정이란 개념을 도출했다. 그리고 작가의 그림은 생리적으로 무의식적 그리기에 가깝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은 무의식적인 그리기의 와중에서 차이를 만들어내면서 계속 미끄러지는 의미들의 연쇄를, 중층 결정화되는 의미들의 연쇄를, 그러므로 어쩜 계속 도망치는 의미들의 연쇄를 더듬어 찾는 지난한, 무모한, 그러므로 어쩜 불가능한 기획과 관련이 깊다. 비록 불가능한 기획이지만, 회화는 감각으로 마술을 부리는 기술(다르게는 암시의 기술)이기에 그 과정을 혼미한 형태로나마 감각의 표면 위로 불러낼 수는 있다. 그렇게 무의식의 바다, 그러므로 작가의 내면에, 때론 기억보다 아득한 원형의식으로 퇴적된 지층을 헤집어 중층 결정화된 순간들(언제) 그리고 지점들(어디)을 더듬어 찾아 그 형상을 그리고 그 의미를 복원하는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생리적으로 무의식적인 그리기에 가깝다고 했다. 이미 완성된 그림 혹은 최소한 앞으로 그려질 그림의 상태를 얼추 머릿속에 그리면서 그 머릿속 그림을 길잡이 삼아 재구성하는 식의 그리기와는 거리가 멀다.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보면 다소간 무모해 보이는 부분이 있다. 매번 아무런 준비도 없이 혹은 최소한의 막연한 느낌만으로 그림 속으로 바로 뛰어드는 것처럼 보인다. 시작이 그렇고, 중간과정이 그렇고, 결말이 그렇다. 
논리로만 치자면 작가의 그림에 결말은 없다. 계속 그림이 바뀐다. 데리다의 차연에서처럼. 그렇게 바뀌면서 먼저 그린 그림이 나중 그림에 덮여서 가려진다. 프로이트의 중층 결정화된 의미에서처럼. 이거다 싶다가도(긍정), 다시 보면 매번 다른 그림으로 고쳐지거나 지워지고 없다(부정). 항상 그렇다. 긍정의 순간이 있고, 부정의 순간이 뒤따라오는, 그런, 긍정과 부정이 무한연속 반복되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그런 만큼 작가의 모든 그림은 잠정적인 것으로 보이고, 항상적인 현재진행형의 상태로 보인다. 그렇게 완성 혹은 완결로 볼 만한 어떤 결정적인 지점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그림에 답은 없지만, 완성 혹은 완결로 볼만한 어떤 지점에 대한 암묵적인 합의는 있다. 대략 감각적인 쾌감이 정점을 찍은 경우를 그 지점인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작가는 곧잘 그 지점을 지나치는 것처럼 보인다. 정작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회화적 완성도(그러므로 완결)가 아니라, 자기가 표현하고 싶고 전달하고 싶은 의미가 형상화됐는지를 보고 싶고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의미가 뭔가. 작가가 그토록 표현하고 싶고 전달하고 싶은 의미가 뭔가. 작가는 의외로 애매성이라는 답을 내놓는다. 작가는 애매성이야말로 회화의 본질이며 궁극이라고 본다. 열린 구조, 열린 의미, 열린 예술작품(움베르토 에코)이, 결정 불가능성과 불확정성의 원리(하이젠베르크)가, 인식론의 그물에 붙잡히지 않으면서, 인식론의 대상으로 환원되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것들(모리스 블랑쇼의 의미의 바깥)이, 보다 적극적으론 중심 속에 바깥을 영토화해 중심의 논리를 내파하는 것(질 들뢰즈)이, 그 자체 비가시적인 것의 존재방식을 뜻하는 유령(아리스토텔레스)이 열어놓는 애매성, 그러므로 어쩜 회화의 아우라가 생성되는 유일한 장소일 수 있는 애매성이야말로 예술의 미덕이고 존재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런 만큼 작가의 그림 그리기는 온통 예술의, 회화의 바로 그 지점을 공략하는 일에 바쳐진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계속 변한다. 잠정적인 변형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그림, 불안정한 그림, 그러므로 어쩜 불안정이 지속되는 상태를 기꺼이 감수하는 그리기, 비유하자면 살아있는 그림(?), 아무런 결정화된 의미도 없이 이행하는 그림을 위해 스스로를 계속 고양된 상태로 몰아가기가 아마도 작가의 그림을 견인하는 동력이고 원천인 것 같다. 
다시, 그렇게 작가의 그림(그리고 그림의 의미)은 잠정적이다. 바로 그것이라는 지시대명사로서보다는, 다만 00같은, 00처럼 보인다. 그렇게 큰 물고기가 있다. 그리고 큰 물고기는 날개 달린 작은 물고기로 변신한다. 줄에 매달린(현실에 붙잡힌) 물고기도 있다. 다른 그림에서 보면 새도 등장한다. 아마도 마음껏 헤엄치고 싶고, 날고 싶은 무의식적 자아(얼터에고)를 표현한 것일 터이다. 열리거나 닫힌 공간이 있고, 광장이 있다. 다리가 있고, 유리벽이 있다. 등대(?)가 있고, 문이 있다. 내분지 외분지 알 수 없는 건물이 있다. 구름이 있고, 그림자가 있다(구름의 그림자?). 덮어서 가려진, 혹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철제 문 혹은 철제 펜스도 보인다. 그 자체 또 다른 관문(무슨 관문? 작가가 기억하고 있는 통과의례?)으로 볼 수도 있겠다. 
풍경이 있고, 옷자락이 있다(웬 옷자락? 옷자락은 풍경과 무슨 상관인가). 웅덩이(무의식의 표상?)가 있고, 수레(?)가 있다. 알 수 없는 유기체적 덩어리가 있다. 큰 쟁반에서 물 항아리로 변신하다가 그마저도 지워지고 없는 정경이 있다. 화면 뒤쪽으로 산이 보이는, 그 산 위로 부분 그림들이 조각 천처럼 날리는 풍경이 있다. 화면 뒤편으로 사라지는 길이 재차 끊어진 길로 변신하는, 그 위로 다리의 난간이 보이는 풍경이 있다. 다리의 기둥이 바위에 지지되고 있는 철재 보일러 통(?)으로 변신한 그림도 있다. 테이블 뒤편으로 기둥들이 도열해 있는, 그리고 그 위로 물고기가 지나가는, 그리고 재차 테이블이 상자로 변하는, 그리고 그렇게 물고기가 상자로 변신한 테이블 속에 담기는 그림이 있고, 건물이 있고 창틀이 보이는, 그리고 불현듯 건물이 암벽으로 변하는, 그리고 그 위로 구름 덩어리가 떠가는, 무슨 트랜스포머도 아니면서 끊임없이 변신을 거듭하는 그림들이 있다. 
이 그림들은 다 뭔가. 그리고 지우는 과정이, 드러내고 숨기는 과정이 중층화된, 그래서 그 의미가 중층 결정화된 그림들이다. 비록 지워지고 없지만, 사실은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렇게 숨겨진 형상, 숨기면서 자기를 드러내는 의미가 롤랑 바르트의 너덜너덜해진 양피지 이론을 떠올리게 만든다. 옛날에 종이가 없던 시절, 양피지에다가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기를 거듭한다. 그렇게 지워진 의미는 비록 사라지고 없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는 흔적으로서 고스란히 간직되고 있는 것이다. 바르트는 주체를 해명하기 위해 이 이론을 예시했는데, 그 예시는 그대로 작가의 경우에도 타당하다. 작가의 경우에는 똑 같은 행위(주체에 대한 물음)를 텍스트가 아닌 그림을 매개로 수행하고 있는 것이 다른 점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헐거우면서 치열한 의미구조가 소설보다는 시에 가깝다. 그리고 그 자체 카오스의 그리기(모리스 블랑쇼의 카오스의 글쓰기에서 차용한)를 수행하는 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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