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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우동/ 송도와 영종도, 헐벗은 자연과 서정적인 풍경

고충환

안우동/ 송도와 영종도, 헐벗은 자연과 서정적인 풍경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 원래부터 그런,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자연에 관한한 위와 무위를 따져 물을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과 무관한 대상이며 무심한 대상이라는 말이다. 자연이 보기에 인간은 그저 짚으로 만든 개(노자)처럼 보일 뿐이다. 그렇담 풍경은 어떤가. 풍경과 자연은 어떻게 다른가. 풍경은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와 관련이 깊다. 인간은 자연을 볼 때 필연적으로 자기를 통해서 보고 자기의 입장에서 본다. 그렇게 자연에 투사된 자기가 감정이입이다. 그렇게 감정이입 된 자기의 입장이 관념을 형성시키는데, 그게 자연관이다. 그렇게 자연관의 프레임을 통해서 보면 자연은 비로소 쓸쓸하게도 보이고, 아득하게도 보이고, 막막하게도 보인다. 그렇게 쓸쓸한, 아득한, 막막한 자연이 풍경이다. 무관한 자연이 유관한 풍경으로 변형되고, 무심한 자연이 유심한 풍경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저마다 다른 관심사며 이해관계 그리고 인문학적 배경이 자연을 풍경으로 변형시키고 변질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풍경 속엔 주체가 자연을 보는 관심사며 이해관계 그리고 인문학적 배경이 고스란히 담긴다. 때로 그 배경은 개별주체의 경계를 넘어 사회적 주체, 공동주체의 자산 혹은 자질로 확장되고 심화된다. 개별성이 보편성으로, 특수성이 일반적인 경험으로 확장 심화되는 것. 바로 여기에 우리가 풍경에 주목하는 이유가 있다. 한 개인이 보아낸 풍경을 통해 현대인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며 입장을, 시대적이고 보편적인 자연관을, 그리고 때로 급박한 사회적 현실을 추상해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담 안우동은 어떤 풍경을 예시해주고 있는가. 작가는 자신이 만난 풍경을 각 <조우한 풍경>, <어떤 풍경>, 그리고 <풍경 너머에> 연작에 담았다. 각 시리즈 별로 구별되는 것이지만, 크게는 그 이면에서 하나로 통하는 주제의식에 맞닿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게 뭔가. 헐벗은 자연이다. 자연은 인간과 무관하지만,  인간사가 매개되면서 유관해진다. 자연은 그대로지만, 인간의 무분별한 욕망이 그대로인 자연을 변형시키고 변질시킨다. 그 욕망의 언저리에는 자본주의의 논리가 어른거리는데, 경제제일주의 원칙과 효율성 극대화의 법칙으로 견인되는 논리다. 그 논리는 가차 없고 무자비하고 예외가 없다. 인간도 자연도 마찬가지. 그 논리는 가치의 척도로서 철저하게 경제성만을 따지는데, 경제성이 떨어지는 것들이 변방으로 밀려나고 금기시된다. 그리고 죽음이 지극한 금기로 지목되고, 어느 정도 예술도 그렇다. 조르주 바타이유는 그렇게 금기로 지목된 죽음(바타이유에게 죽음은 에로스와 동일시된다)을 잉여라고 부르고, 변방으로 밀려난 예술을 무정형이라고 부른다. 변방으로 밀려난 예술? 변방의 예술? 의미심장하게도 모리스 블랑쇼의 의미의 바깥과도 통하는 개념이고 논리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어쩜 당연하게도 바타이유에게 잉여와 무정형은 자본주의 논리의 한계를 폭로하는 실천논리가 된다. 그러므로 헐벗은 자연을 주제로 한 작가의 사진작업은 자본주의의 무분별한 욕망을 폭로하는, 자본주의의 욕망이 소외시킨 자연을 그리고 어쩜 인간을 폭로하는 실천논리가 된다. 

작가는 인천이 고향이다. 그런 만큼 조우한 풍경에서 송도를, 풍경 너머에서 영종도를, 그리고 어떤 풍경(실제로는 인천의 경계 너머로 확장되지만, 대개는)에서 그 언저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작가의 주변머리에서 그리고 한정된 바운더리 안에서 소재를 찾지만, 정작 주제는 그 주변머리며 바운더리를 넘어선다. 무슨 말인가. 송도도 영종도도 하나같이 매립지 위에 세워진 인공 섬을 테마로 한 것이란 점에서 4대강사업으로 파헤쳐진 강, 태양광사업으로 잘려나간 산허리, 그리고 지금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각종 재개발현장으로 나타난 무분별한 개발논리를 반영하는, 그 현장을 대변하는 축도로 보인다. 비록 특정 지역을 소재로 한 것이지만,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눈만 돌리면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현실 속 장면이란 점에서 보편성을 얻는다. 
옛날에 송도에는 유원지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국제신도시가 들어섰다. 작가는 그 중간풍경을 찍는다. 옛날과 지금 사이를 찍는다. 그 사이풍경을 작가는 조우한 풍경이라고 부른다. 그렇담 작가는 그 풍경에서 무엇과 조우했는가. 옛날에 유원지가 있었던, 자신의 유년풍경과 조우한다. 그리고 유원지가 사라지면서 덩달아 사라진 자신의 망실된 유년과, 그러므로 상실된 풍경과 조우한다. 그리고 이 상실감을 현실로 만들어준 자본주의의 욕망과, 그러므로 욕망의 풍경과 조우한다. 조우한 풍경이란 명명에는 이런 상실감이 묻어난다. 지극한 상실감이야말로 현대인의 전형적인 징후며 증상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인은 신을 상실하고 중심을 상실하고 자연을 상실하고 때로 자기상실로 아프다. 때로 그 징후며 증상에 자본주의의 욕망도 제 몫을 보탠다는 사실을, 어쩜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는 사실을 조우한 풍경은 새삼 일깨워준다. 
그리고 작가는 장소를 영종도로 옮긴다. 갯벌과 바다가 매립지와 공존하는, 어쩜 갯벌과 바다가 매립지에 먹히는 풍경을 찍는다. 바다가 메워진 땅의 형태 그대로 시간이 멈춰선 풍경을 찍는다. 그 풍경 속에서 자연은 자기를 상실한 채, 다만 자기에게 가해진 무분별한 폭력을 흔적으로서 증언하는 역할을 도맡는다. 그렇게 사진 속 풍경은 을씨년스럽고 황량하고 척박하다. 그리고 서정적이다. 모든 흔적은 서정적이다. 심지어 그것이 폭력의 흔적일 때조차도. 그러나 정작 사람들은 그 흔적을, 그 흔적이 불러일으키는 서정성을 보지 않는다(그리고 보지 못한다). 관심사며 이해관계 그리고 인문학적 배경이 다른데 있기 때문이다. 지금여기가 아닌,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의 장밋빛 청사진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금여기를 보지 못하게 막는 것을 의식의 불감증 혹은 의식의 사각지대현상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작가는 근작의 주제를 풍경 너머에, 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언제나 풍경 자체를 보지 않는다. 풍경 너머를 본다. 지금여기를 보지 않는다.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의 장밋빛 청사진을 본다. 그리고 작가는 지금여기와 도래하지 않은 미래 사이, 풍경 자체와 풍경 너머 사이를 중간풍경이라고 부른다. 이로써 작가는 지금여기의 풍경 자체가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공백인 채로 지워져 있을 풍경(사이풍경 혹은 중간풍경)의 지점이 중요하다고, 지워진 의식 속에서 전개될 풍경의 지평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을 것이다. 이 풍경과 저 풍경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 풍경이 저 풍경으로 이행하는 과정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가 중요하다고 역설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을씨년스럽고 황량하고 척박하고 서정적인 풍경과 함께, 바다 시리즈를 제안한다. 수평선을 경계삼아 바다 혹은 갯벌이 화면 아래쪽에 위치하고, 그 위로 길게 하늘이 포치해 있는 세로로 긴 사진들이다. 아마도 아득한, 막막한, 밑도 끝도 없는 자연의 경관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인간사와 동떨어져서 보면, 무분별한 욕망 없이 보면 비로소 보이는 자연 자체를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수평선 너머로 보일 듯 말듯 미미한 흔적을 남기고 있는 문명과는 비교되는, 숭고한 자연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멀리 수평선이 보이는 풍경에로 초대한다. 여기서 다시, 작가는 풍경 너머에 무엇이 보이는지 묻는다. 경계 너머로 또 다른 풍경이 보이는지 묻는다. 알고 보면 우리 모두가 경계인은 아닌지, 경계인이야말로 존재의 존재론적 조건이 아닌지를 묻는다.  
그리고 여기에 송도와 영종도 사이에 막간처럼, <어떤 풍경>이 있다. 자연은 심지어 폭력의 흔적일 때조차 서정적으로 와 닿는 탓에, 정작 폭력적인 현실이 잘 보이지가 않는다. 그래서 작가가 생각해낸 것이 역설적인 풍경이고, 여기에 붙여준 이름이 어떤 풍경이다. 겨울의 수영장, 한 여름의 스키장, 한낮의 자동차극장, 광고가 없는 광고판, 정지된 분수대, 텅 빈 골프장, 구획된 부지에 덩그러니 서있는 가로등이 그렇다. 인간의 이해관계가 만든 인공물이며, 자연의 영역을 침범해 조성한 인공풍경들이다. 그 인공물이며 인공풍경들에는 고유의 기능이 수행될 동안에는 잘 보이지가 않다가 기능이 멈췄을 때 비로소 드러나 보이는 것이 있다. 인간의 이해관계가 자연의 영역을 어떻게 침범했는지, 자연을 어떻게 망가트렸는지, 자연이 어떻게 흉물로 변할 수도 있는지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들이 있다. 그 자체 자연에 가해진 인간의 폭력의 현장을 증언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낯설게 하기 그러므로 어쩜 초현실주의를 예시해주는 것이 흥미롭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어쩜 현실이 아닌 초현실을, 현실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비현실을 이미 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의 사진은 그런 현실 속 초현실(그리고 비현실)을 주지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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