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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리뷰. 아무튼, 젊음. 8.29-11.9. 코리아나미술관 스페이스 씨.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고충환

포커스리뷰. 아무튼, 젊음. 8.29-11.9. 코리아나미술관 스페이스 씨.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리아나미술관은 그동안 여성성, 몸담론, 젠더이론, 성담론을 중심으로 미술관의 성격을 특화하는데 주력해왔고, 그 기획은 상당할 정도로 성공적으로 보인다. 장르 중심으로 특화에 성공한 경우는 더러 있지만(이를테면 한미사진미술관과 고은사진미술관과 같은. 그리고 어느 정도 대림미술관도) 장르 밖에서 현대미술의 핵심 논제를 테마로 특화에 성공한 것은 이례적인 경우라서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미술관 자체의 태생적 배경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 맞지만, 이와 함께 국내적으로 이념대립이 첨예했던 1980년대 이후 90년대에 접어들면서 몸담론과 욕망이론이 전면화한 것과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적으로 시대적 아이콘이며 패러다임을 인지하고 반영하는 것, 대변하고 리드하는 것은 어쩜 미술관의 가장 중요한 존재이유 중 하나임을 인정한다면, 그 존재이유에 충실한 경우라고 봐도 되겠다. 
이번 전시는 그 주제의식의 연장선에 있다. 아무튼 젊음이란 주제만 놓고 보자면 아무튼 젊음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나이보다 젊음, 역시 같은 의미겠지만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것 혹은 나이보다 젊게 사는 것이 갖는 의미에 대해 얘기하고 있을 것이다. 웰빙인가. 안티에이징인가. 표면적으로는 그렇지만, 사실은 역설적인 의미를 겨냥하고 있는 것 같다. 웰빙과 안티에이징으로 대변되는 사회적 강박 그리고 어쩜 강요에 대한 불편함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강박? 강요? 그렇담 실제로도 사회는 젊음을 강요하는가. 알고 보면 젊음을 강요하는 것은 사회의 본질(모든 사회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풍토다. 트렌드다. 경향성이다. 전시는 말하자면 젊음을 강요하는 사회적 풍토를, 트렌드를, 경향성을, 그리고 어쩜 신드롬을 주제화한 것이다. 
그렇담 이처럼 젊음을 강요하는 사회적 풍토는 어디서 어떻게 유래하는가. 미셀 푸코는 주지하다시피 권력이론이 핵심이다. 권력 아래 성과 몸을 놓는데, 성을 관리하는 권력이 성권력이고 몸을 관장하는 권력이 생물권력이다. 그리고 성권력과 생물권력이 합치되는 지점이 바로 젊음이다. 그러므로 젊음이 권력(절대권력?)이다. 젊음은 건전한 성(그러므로 도덕)을 배급하면서, 동시에 건강한 노동력(그러므로 생산)도 담보하게 해준다. 여기서 젊음의 적 역할을 도맡는 것이 죽음(그리고 아마도 죽음에 가까운 노년?)이다. 조르주 바타이유는 그 죽음을 잉여(잉여인간?)라고 부른다. 자본주의가 지극한 금기로 지목한 것이 죽음이라고 본 것이며, 그것에 잉여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여기서 바타이유는 흥미롭게도 죽음을 에로스에 결부시키는데, 철저하게 비생산적인 행위(프로이트 식으론 죽음충동, 자크 라캉으로 치자면 지극한 쾌락)로 자본주의를 전복시킨다는 실천논리가 숨어 있다. 자본이 모든 걸 삼키는 초자본주의 시대에 젊음은 이처럼 스스로 물신과 권력의 수행자로서 자본주의를 대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자체 자본주의 시대에 젊음이 갖는 상품적 가치의 지정학적 좌표로 볼 수가 있겠다. 

그렇담 작가들은 이처럼 젊음을 강요하는 사회적 풍토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 여기에 몸만들기에 열심인 보디빌더들이 있다(곽남신). 여기서 보디빌더는 마초적인 남성성을 표상한다. 나는 할 수 있다는 능력남 이데올로기를 표상한다. 그리고 그렇게 권력의지가 문화의 한 형태, 생활모드의 한 경우로서 자리했음을 말해준다. 몸만들기가 정체성 문제에 직결되는 경우도 있다. 게이문화가 그렇다(조니 사이먼스). 게이커뮤니티를 테마로 한 다큐에서 남자들은 성적이고 매력적인 몸매를 유지하고 전시하기에 열심이다. 영원한 젊음으로 노년을 극복하는 것이 급박한 지상과제로서 주어진다. 여기에도 노년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그렇다면 몸만들기에 열심인 것, 젊음으로 노년을 극복하는 것은 남자들만의 일인가.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여성주체에게 몸만들기는 그리고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는 일은 남성주체가 여성주체에게 요구하는 성역할론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감안해보더라도 더 절실한 현실일 수 있다. 그 필수 과정이며 기초 작업이 얼굴 마사지다(산야 이베코비치, 마사 윌슨). 작업에서 작가들은 열심히 문지르지만 결국 얼굴은 얼룩진 채로 끝난다. 그리고 그렇게 얼룩진 얼굴이 작가들로 하여금 나는 내가 무섭다고 고백하게 만든다. 무섭다? 내가 무섭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항상적인 젊음을 요구하는 사회적 현실이, 노년에 대해 배타적인 사회적 풍토가, 그 공공연한 이데올로기가 무섭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회는 인정이 없고, 이데올로기는 기계적이다(질 들뢰즈). 이성은 동성에 대해, 남성은 여성에 대해, 젊음은 노년에 대해, 정상성은 비정상성에 대해, 유산자 계층은 무산자 계급에 대해 배타적이다. 노년 자체가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현실이 되고, 가난한 것만으로 스스로의 무능력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어쩜 가난한 노인이 최악이다. 그렇게 다시, 자본주의는 기계적이다. 그리고 여기에 무능력한 노인들에, 세대 간 차이에 주목하는 작가들이 있다. 틈을 조심하세요, 라고 젊음이 노년에게 말한다(존 바이런). 노년을 향한 젊음의 배려와 염려가 한때 젊음을 향했던 노년의 우려와 충고를 전복한 것이 흥미롭다. 그렇게 노인들은 말도 어눌하고(사실은 말할 기회를 빼앗기고), 디지털도 어색하다. 세대 간 차이가 극명한 부분이 디지털이다(입자필드). 유저들의 앱 분포도와 사용빈도를 테마로 한 그래프를 통해 세대 간 연령대 간 차이를 반영한 작업이 모바일 시대를 살아가는 노년층의 디지털 소외현상에 대해 말해준다. 
그렇담 노년은 절망인가. 여기에 그렇지는 않다고 말하는 작가들이 있다. 뉴욕을 배경으로 한 은발의 패션 피플들을 카메라로 담은 일련의 사진작업 어드밴스드 스타일로 작가 아리 세스 코헨은 유명해졌다. 저만의 개성을 뽐내는 멋쟁이 할머니들을 통해 진정한 시니어스타일을 창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젊은 몸을 유지해야 하는 것, 몸의 규율이 엄격한 것, 그래서 생명력이 짧은 분야가 무용이다. 여기서 작가 셀린 바움가르트너는 50에서 70세 사이의 현역 무용수들을 통해 무용의 전통적인 기준에서 벗어난, 아마도 몸의 규율 대신 몸이 알아서 반응하는 자율성과 몸에 밴 즉발성에서 또 다른 가능성(느림의 미학?)을 본 대안을 제시한다. 다시, 그렇다고 젊음은 마냥 행복하고, 그 자체가 특권인가. 한쪽에만 바퀴가 달린 짝짝이 롤러스케이트를 탈 때처럼 불안하고 불균형(언발란스)하다고 작가 김가람은 말한다. 청춘은 불안하다. 그래서 아름답지만, 그 자신만으로는 불균형하다. 그 불균형은 노년과 더불어서만 균형으로 바꿔놓을 수가 있다. 
그렇게 전시는 노년이 젊음에게, 젊음이 노년에게, 남성이 여성에게, 여성이 남성에게, 주체가 타자에게, 타자가 주체에게 묻는다. 나이가 드는 것에 대한 감정을 묻는다(주디 겔스). 그런데, 때로 그 반응도 이상하고 멘트도 이상하다(줄리아 샬럿 리히터). 작가의 여성친구 세 명을 인터뷰한 내용 그대로를 암기해 연기한 남성들이었던 것이다. 역할극을 통해 상식이 선입견일 수 있음을, 자의식이 관습일 수 있음을, 자연적 사실이 이데올로기일 수도 있음을 주지시킨다. 상대방에 대한 막연한 이해(때로 확신에 찬 이해마저도)가 알고 보면 몰이해에 바탕을 둔 폭력일 수도 있음을 폭로한다. 그렇게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 젊음을 주제로 한 속담들이 있다(전지인). 눈치 챘겠지만, 젊음을 찬미하고 늙음을 배척하는 속된 표현들을 함축하고 있다. 여기서 작가는 이 속된 표현들을 거울장치를 통해 저마다의 자기에게 되돌려준다. 젊은 나에게, 늙은 나에게, 바로 저마다의 나 자신에게 주는 경구가 된다. 그 자체 또 다른 역할극(나를 상대방의 입장에 서게 만드는)의 한 형식이며 경우를 예시해준다. 
그리고 여기에 이번 전시의 클라이맥스 같은 농담이 있다. 몸에 대한 농담이고, 젊은 몸에 대한 농담이고, 젊은 몸에 대한 강박에 대한 농담이다. 인스타그램 플랫폼과 셀피, 보정 앱 툴을 전복적인 방법으로 사용한 신디 셔먼의 작업이다. 주지하다시피 왜곡을 통한 전복이 작가의 전략이다. 여성의 이미지는 미디어가 왜곡시킨 것이고, 아름다운 여성의 이미지는 남성주체의 관음증적 시선이 왜곡시킨 것이고, 여성미술사는 남성작가중심의 가부장적미술사가 왜곡시킨 것이다. 이런 왜곡의 전문가답게 작가는 자신의 얼굴을 왜곡하고 희화화한다. 그리고 늙은 작가가 묻는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는가,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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