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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은영, 말과 여인

고충환

손은영, 말과 여인 


사진은 폭력이다. 일반화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는 말이지만 무방비상태의 누군가에게, 울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 황망한 사람들의 면전에, 그리고 불난 집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에는 분명 폭력적인 뭔가가 있다. 아마도 찍히면 죽는다는 세상 말은 원래 사진에서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현실을 기록하고 증언하는 일을 그만둘 수도 없는 일이다. 사진의 이중성이고 양가성이다. 폭력적인 현실을 폭력적인 방법으로 기록하고 증언하는 사진의 운명이다. 어쩜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이미지의 운명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대부분의 이미지가 사진으로부터 온다. 
사진은 과학이고 회화는 감각이다. 그렇다고 단정 짓기에는 일면적이고 부분적인 말이지만 대체로 그런 것 같다. 이처럼 사진을 과학이라고 전제하고 보면, 사진은 진화와 발전의 산물이다. 사진이 발명되던 초기에는 과학이 그런 것처럼 무수한 형식실험과 허다한 시행착오의 과정이 있었다는 말이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그 사진들은 실패한 사진들이다. 동시에 회화적이고 감각적인 사진들이다. 사진사에도 회화적인 사진이 있었지만, 그렇게 처음부터 회화를 겨냥한 사진들보다 오히려 더 회화적이고 감각적이고 현대적이다. 그동안 사진의 폭이, 회화의 폭이, 그리고 현대적이라는 개념의 폭이 더 넓어진 결과일 수도 있겠다. 
고성에 산불이 났다. 손은영은 한달음에 달려가 사진을 찍었다. 어느 정도 작가의 본능이 작용했을 것이다. 앞서 불난 집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에는 폭력적인 뭔가가 있다고 했다. 그렇게 작가는 폭력을 감수하면서까지 폭력적인 현실을 기록하고 증언하는 일에 성공했는가. 그렇지는 못한 것 같다. 사진을 매개로 현실을 기록하고 증언하는 일에 관한 한, 작가는 실패한 것 같다. 폭력적인 현실을 기록하는(찍는) 일에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똑같은 현실을 증언하기(인화하기)에는 실패한 것 같다. 작가의 사진은 폭력적인 현실을 증언하고 있다기보다는 왠지 다른 지점, 이를테면 회화적이고 감각적인, 낭만적이고 고상해 보이기조차하는 다른 어떤 지점을 지향하고 있는 것 같다. 사진을 매개로 폭력적인 현실을 미학적인 현실로, 날 것의 현실을 각색된 현실로 변질시키고 있다고나 할까. 이건 단순한 실패의 문제가 아닌, 작가의 관심사의 측면에서 보아야할 문제다. 다른 관심사의 측면에서 보면, 작가의 사진은 성공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담 그 변질, 그 지향은 어디서 어떻게 연유하는가. 여기서 작가는 사진이 발명되던 초기 사진 인화법을 되불러온다. 반다이크 브라운 프린트다. 직접 인화지를 만들고 현상하는 아날로그 방법이다. 지금은 컴으로 이미지 조작과 편집이 이루어지지만, 전통적인 수작업에선 조작이 상당부분 우연에 노출된 형태를 취한다. 여기서 나는 다만 사진을 위한 처음의 소스를 제공할 수 있을 뿐, 정작 사진에 필요한 아우라는 우연이 만든다. 사진에서 아우라가 결정적이라고 본다면, 아예 우연이 사진을 만든다. 그렇게 내가 미처 제어할 수 없는 미증유의 이미지를 지켜보는 것, 우연이 현실을 어떻게 변질시키는지를 지켜보는 일에는 마술적인 뭔가가 있다. 주술적인(현실을 변질시키는) 뭔가가 있고, 미신적인(영적인, 비가시적인, 아리스토텔레스라면 유령이라고 했을 어떤 존재를 붙잡는) 뭔가가 있다. 현실과는, 다른 현실이 있다. 사진 자신이 말하는 이야기가 있고, 사진 스스로 발설하는 사연이 있다.  
그렇담 그 다른 현실이란 뭔가. 사진적 우연은 어떤 다른 현실을 열어놓는가. 다시, 고성에 산불이 났다. 그리고 작가는 그 현장을 사진으로 남겼다. 그렇게 남겨진 사진은 현실을 기록하는 일에는 성공했고, 현실을 증언하는 일에는 실패했다. 작가가 호출한 반다이크 브라운 프린트는 심지어 흑백조차 아니다. 옅은 갈색에서 짙은 갈색에 이르는 풍부한 중간 톤을 아우르는 색감이 폭력적 현실을 회화적 현실로 변질시킨다. 지금여기의 지정학적 현실을 익명적인 현실, 미증유의 현실, 시간 저편의 아득한 현실로 바꿔놓는다. 어쩜 고성산불현장을 찍은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쇠락한 풍경과 황량한 이미지의 전형을 떠올리게 만든다. 쇠락한 풍경과 황량한 이미지? 낭만주의의 키워드다. 낭만주의는 현실을 믿지 않는다. 현실은 다만 비현실을 떠올려주는 계기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그렇게 현실 속에서 비현실을 떠올려주는 계기가 바로 쇠락한 풍경이고 황량한 이미지다. 그 풍경, 그 이미지가 왠지 멜랑콜리를 자아내고 노스탤지어를 불러온다. 우울과 향수, 낭만주의의 또 다른 정서다. 그렇게 낭만주의는 현실을 미학(혹은 미학적 현실)으로 바꿔놓는다. 그리고 니체는 미학이 아닌 그 무엇으로도 이 삶은 이해불능이라고 했다. 
바닷가에 접해있는 철책 안쪽에 철골구조물이 서 있다. 처음부터 구조물만 있었거나 다 타고 철골만 남겨진 것일 터이다. 아마도 카페였을지 싶은 그 구조물 한쪽에 조형물이 보인다. 말과 반라의 여인상이다. 말은 바닷가를 향해 있고, 여인은 안쪽을 향해 있다. 말은 세상 저편을 바라보고 있고, 여인은 세상 안쪽을 바라보고 있다. 아마도 서커스의 말 조련사를 테마로 한 것일 테지만, 작가의 사진 속에서 그 테마는 왠지 현실과 비현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얽힌 낭만주의적 알레고리처럼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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