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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수/ 나무는 살아있다. 그리고 때로 아프다.

고충환

박동수/ 나무는 살아있다. 그리고 때로 아프다. 


<머문 자리 머물 자리>. 자리란 존재의 자기 위치를 확인하기 위한 자의식의 표현일 수 있다. 그렇담 과거(머문)를 반성하고 미래(머물)를 예감하는,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을 주제화한 그림인가. 여기에 <그 자리>도 있다. 아마도 현재를 확인하고 증언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그렇담 그림 어딘가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엮인 시간의 그물을 짜는 주체, 자기반성적인 주체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림 어디에도 주체는 없다. 대신 나무가, 다만 풍상에 찌든 나무가 있을 뿐이다. 그럼 주체는 어디에 있는가. 생략주체? 그렇게 볼 수도 있겠으나, 작가의 그림에선 나무가 주체다. 나무에 감정이입한 나무주체고, 나무에서 자기를 보는 대리주체다. 그렇게 그림 어디에도 표면상의 주체는 없지만, 알고 보면 자기를 대리하기 위해 나무를 호출한 그림이며, 그러므로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의 회화다. 그 자체 또 다른 형식의 자화상을 예시해주고 있는 경우, 사물과 자기를 동일시하는 일종의 사물주체를 예시해주고 있는 경우로 봐도 무방하겠다. 
그렇게 작가는 시종 나무를 그렸다. 나무를 그리면서, 사실은 자기를 그렸다. 그런데 그 나무란 것이 하나같이 찢기고 해진, 풍상에 찌든, 때론 세상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해줄 최소한의 껍질(보호막)마저 벗겨진 채 허연 속살(상처)을 드러낸, 헐벗은 나무들이다. 어떤 삶이 그렇지가 않겠는가. 삶이란 바람 부는 들판에 발가벗고 서 있는 형국이 아닌가. 무지막지한 바람에 옷이란 옷은 다 날려버린 채 옹송그리고 있는 형국이 아닌가. 알량한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해 하는 부박한 삶이 동정 없는 세상과 맞서고 있는 형국이 아닌가. 그 비극적 세계감정을 내재화한 것이 실존주의다. 이를테면 하이데거는 존재를 세계 내 존재, 세계에 내쳐진 존재라고 했다. 여기서 세계 내 존재는 이미 구조화된 세계 속으로 태어난다는 뜻이고, 그리고 여기에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태어난다는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게 부조리한 존재를, 부조리한 존재의 비극적 세계감정을 정의한 것이다. 작가도 그럴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다시, 그렇게 작가는 나무를 그리면서 사실은 자기를 그렸다. 그렇게 나무에 투사된 자기는 비록 작가 개인의 인격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그리고 나무로부터 부박한 삶의 현실을 보아낸 것은 순전한 작가의 몫이지만, 인격이며 삶의 현실인식이란 것이 대동소이한 탓에 작가의 나무그림은 작가 개인의 경계를 넘어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무에게서 삶의 유비를 보는 것 자체는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 작가는 이처럼 그 자체로는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유비적 관계를 되불러와 다시금 주목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새삼스럽다. 나무와 존재와의 유비적 관계는 작가의 매개행위로 인해 또 다른 의미를 얻게 될 것이고, 그렇게 재설정될 것이다. 

나무가 주체라고 했다. 나무를 대상화한 것이 아닌, 나무에 자기를 빗댄 그림이다. 자연을 주제화한 것이 아닌, 자연에 존재를 비유한 그림이다. 그렇담 어떻게 나무가 자기를 비유하고 존재를 유비하는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그림을 보자. 평면을 가로지르는 나무가 화면을 찢는 것도 같고, 거대한 흐름을 생성시키고 있는 것도 같다. 나무가 숨어든 어둔 화면이 배경에 해당하는 밝은 화면과 대비되면서 극적 효과를 강조하는 것도 같다. 외부에 노출된 나무의 속살이 켜켜이 포개진 지층이며 단층을 보는 것도 같고, 움푹 파인 옹이가 존재의 상처를 보는 것도 같다. 유비적 표현으로 치자면 그 자체가 존재의 상처를 표현한 것도 같고, 기의 흐름을 표현한 것도 같고, 존재의 양면성을 강조하는 것도 같고, 시간의 흔적을 표상하는 것도 같다. 
여기에 신체처럼 핏줄이 흐르는가 하면, 나문지 뿌린지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아마도 존재의 양가성을 표상한 것일 터이다. 그리고 여기에 존재의 비결정성과 항상적인 이행성을 표상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존재 일반의 유기체적 본성(핏줄이 흐르는 나무)을 표현한 것일 터이다. 작가는 말하자면 한갓 나무를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표현했다. 살아있는 유기체? 나무 자체가 이미 생명이고, 유기체가 아닌가. 그러나 우린 이 사실을, 나무가 다름 아닌 살과 피가 흐르는 존재라는 자명한 사실을 너무 오래 잊고 있었다. 그래서 새삼스럽지 않은 사실을 다루는 작가의 태도와 방식은 새삼스럽다. 그렇게 작가는 살과 피가 흐르는 나무, 살아있는 나무와 함께, 범신론과 물활론, 애니미즘과 토테미즘과 같은, 나무의 혼이며 자연의 영에 얽힌 생명사상을 되불러온다. 
그리고 여기에 둥지마냥 둥글게 말린 나무도 있고, 때로 환 형태의 안쪽으로 잔가지 아님 잔뿌리 혹은 가시가 촘촘한 나무도 있다. 그 자체가 초현실주의(유기적 혹은 유기체적 초현실주의?)를 떠올리게 만든다. 다시, 작가의 그림은 나무에 빗댄 자기를 그리고 존재를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이로써 아마도 집(둥지)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그리고 혹 종교적인 표상(관?)에 대해서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다. 여기서 그 상징적 의미의 실제 여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여하튼 작가는 나무에 빗대어 존재의, 삶의 다중적이고 다층적이고 다의적인 성질을 표상한 것이다. 이로써 나아가 어쩜 다중적이고 다층적이고 다의적인 삶 자체가 진정한 주제일 수도 있겠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나무는 그저 구실일 뿐, 나무를 통해 본 삶의 질이 주제다. 
그렇담 작가는 나무를 어떻게 그리는가. 주로 먹과 아크릴을 혼용해 그리지만, 여기에 부분적으로 흙을 도입해 그리는 것이 특이하다. 지점토 그리고 물에 갠 도자기가루가 그런데, 그 쓰임새는 사뭇 혹은 많이 다르다. 지점토의 경우에는 주로 편평한 화면을 조성하기 위해, 그리고 여기에 부분적으로 주름과 같은 특정 문양이나 패턴을 만들기 위해 사용한다. 물에 갠 도자기가루의 경우에는 일종의 흙물로 볼 수가 있을 것인데, 작가는 타시즘의 경우에서처럼 흙물을 흩뿌려 비정형의 얼룩을 만든다. 비정형의 얼룩이 켜켜이 쌓이면서 층을 얻고, 물성을 얻고, 마티에르를 얻는다. 주로 화면을 가로지르는 나무를 가장자리에서 가두는 화면구성을 위해, 바탕화면을 위해, 그리고 특히 여백을 위해 적용된다. 화면 속 나무의 가장자리 화면에는 그렇게 흩뿌리면서 튄 흙물자국이 여실하다. 아마도 계획된 우연성, 가장된 우연성의 결과물일 그 비정형의 패턴이 그림에 그리고 나무에 고유의 물성과 함께 활성(생생한 느낌)을 더한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이 흙이고 여백이다. 왜 흙인가. 작가의 그림은 비록 나무를 소재로 한 것이지만, 여기서 나무는 다만 구실일 뿐, 사실은 나무를 통해 본 삶의 질이 주제라고 했다. 삶의 질? 바로 생명이다. 그리고 흙은 생명의 원인이다. 생명의 질료적 환원이고, 물질적 표현이다. 흙의 질료적 성질을 빌려 그리고 그 상징적 의미를 빌려 생명의 원인을, 생명의 원천을 표상한 것이다. 그리고 여백은 그저 빈 공간이 아니다. 문학에서 행간에 결정적인 의미가 숨어있듯 의미로 충만한 그리고 암시로 충만한 공간이다. 침묵이 그렇듯 감각적인 형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들, 결정적인 의미로 축소되지 않는 것들, 이중적이고 중의적인 의미가 자기표현을 얻는 공간이다. 그렇게 작가는 화면을 가로지르는 나무를 통해, 그리고 여기에 침묵으로 말하는 여백을 통해, 가시와 비가시가 서로의 언어로 말하는 상호작용을 통해 그림의 의미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나무는 평생 한자리에 붙박인 삶을 산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정주형 삶을 살고, 또한 다른 어떤 사람들은 유목형 삶을 산다. 여기서 나무의 삶은 정주형에 가깝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사람들의 외형적인 삶의 모습은 유목형에 가까워진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일수록 정작 그 내면에는 정주형 삶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가는 것, 자기 반성적이게 되는 것, 스스로 뒤돌아보게 만드는 계기는 모두 정주형 삶 속에 있다. 작가는 혹 바람 부는 들판에 저 홀로 버티고 서있는, 무지막지한 바람에도 옹송그리지 않는, 자존감으로 동정 없는 세상에 맞서는, 스스로 비극적 세계감정의 육화이기도 한 나무를, 나무의 성정을 닮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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