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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진/ 숨, 존재의 숨결과 창작의 알레고리로서의 호흡

고충환

김희진/ 숨, 존재의 숨결과 창작의 알레고리로서의 호흡 


관계, 연결, 접속. 그리고 사이, 차이, 틈. 그동안 다른 주제들이 없지 않았지만, 대개 김희진의 회화를 관통하는 주제의식들이다. 작가의 작업을 뒷받침하는 인문학적 배경들이다. 그저 주제라기보다는 평소 작가의 삶에 대한 입장과 그림을 대하는 태도를 반영한 개념들이다. 주지하다시피 삶은 이러저런 관계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불교에서의 연과 업, 인식론에서의 인과(원인과 결과) 등 존재를 해명하는 개념치고 관계 아닌 것이 없다. 그리고 작가는 그 관계를 날실과 씨실이 하나로 엮인 망구조로 표현한다. 예외가 없지 않지만, 대개 이런 망구조를 그림의 기저로 가져가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작업 전체를 견인하는 전제로 봐도 되겠다. 망구조를 관계의 메타포 그리고 삶의 메타포로 보는 것이다. 크게는 이 전제 위에 그때그때의 소소한 생활감정이며 서사의 앙금들을 덧붙이는 태도와 형식을 취하면서 그림을 변주하고 확장한다고 보면 되겠다. 그 관계와 관계 사이에 차이가 있고, 망과 망 사이에 틈이 있다. 차이가 미미한 관계도 있고, 차이가 큰 관계도 있다. 결국 삶이란 그 차이를 줄여나가는(때로 차이를 키우는 관계도 있을 것이지만) 과정일 것이다. 그렇게 줄여나가면서 너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일일 것이다. 작가의 망 그림은 그렇게 너에게 한 발짝 다가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작가는 근작의 주제를 숨 쉬다, 라고 부른다. 얼핏 지금까지 주제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서 하나로 통하는 개념이다. 관계개념을 통해 존재의 구조원리(존재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다루었다면, 이번에는 존재의 생명원리(존재는 어떻게 살아지는가)를 주제화한 것이다. 존재는 숨을 쉬면서 산다. 그러므로 숨은 존재가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전제다. 너무 자명한가. 너무 자명해서 주제로서의 가치가 의심스러운가. 그러나 알고 보면 너무 자명해서 그것의 있음에 대해 한 번도 의심조차해본 적이 없는 것들에 의해 존재는 살아지고 삶은 의미 있어진다. 작가의 작업은 숨을 쉬면서 산다는 자명한 사실을 숨을 쉬어야 살 수 있다는 긴박한 현실로 옮겨놓고 있다는 점에서 절실함을 얻는다. 이런 긴박한 현실인식은 한글보다는 영문에서 그 의미가 더 뚜렷하게 전달된다. Breathe Hard. 숨을 쉰다. 힘겹게. 숨을 쉰다는 것, 그러므로 어쩜 존재가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보면 힘겨운 일이고, 감동적인 일이고, 귀한 일이다. 자명한 건 없다. 다만 자명하다고 믿는 착각이 있을 뿐. 이처럼 자명한 사실이 사실은 자명하지 않다고 말하기 위해, 더 이상 자명한 건 없다고 말하기 위해, 예술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긴박한 현실이며, 더 이상 자명하지 않은 사실의 인식은 어디서 어떻게 유래한 것인가. 그동안 작가에게 숨을 쉬기가 힘겨울 만큼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건강 체질(?)이라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동안 작가에게도 소소한 병들이, 하다못해 속앓이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존재가 몸을 가진 존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되새기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지인의 경험이 작가의 경험으로 투사된 것이고, 그걸 계기로 존재는 어떻게 사는지 하는 자명한 사실을, 그리고 존재는 어떻게 살아질 수가 있는지 하는 긴박한 현실을 주제화하고 그림으로까지 옮겨 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무슨 말인가. 비록 작가 개인의 신상에 일어난 일이지만, 그 일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 작가의 작업은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그러면서 숨 쉰다는(그러므로 존재한다는) 자명한 사실과 숨을 쉬어야 비로소 살 수 있다는(그러므로 존재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급박한 문제의식의 층위에로 인도한다. 어쩜 존재가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존재의 존재다움(하이데거)이 마침내 획득되어지는, 존재론적인 어떤 지점으로 초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작가는 숨을 그린다. 그렇다면 숨은 작가의 그림 어디에 어떻게 있는가. 숨 자체는 형태도 없고 색깔도 없다. 결국 관념적인 개념에 기댈 수밖에 없다. 암시적인 형상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다시 망구조가 호출된다. 작가의 그림에서 망구조는 관계를 형상화한 것이면서, 이번에는 동시에 숨을 형용한 것이기도 하다. 숨에는 들숨이 있고 날숨이 있다. 나가는 게 있으면 들어가는 것도 있어야 한다. 그렇게 들고 나는 숨을, 들숨과 날숨과의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각각 날실과 씨실로 짜인 망구조로 표상한 것이다. 
너무 관념적인가. 그렇다고 섣불리 단정할 일은 아니다. 여기서 숨의 표상형식으로서의 망구조(허파의 꽈리구조?)는 동시에 예술의 작동원리에 대한 알레고리로 의미기능하고 있기도 하다. 흔히 그림 그리기를 호흡에다가 비유한다. 아니마 곧 숨결에다가 비유한다. 흐르는 것과 고인 것, 느린 것과 빠른 것, 내달리는 것과 정체된 것, 거친 것과 부드러운 것, 규정적인 것과 암시적인 것이 치우침 없이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면서 어떤 내적 긴장감을 그림 속에 담보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작가의 어떤 그림(대개는 큰 그림)은 이중으로 화면이 포개져 있는데, 프린트된 망구조 위에 드로잉으로 또 다른 망구조를 올려 그린 것이다. 여기서 프린트 된 망구조가 규정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그 위에 덧그린 드로잉은 암시적인 것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렇게 규정적인 것과 암시적인 것이 하나의 화면 속에서 상호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한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감각의 생리를 좇아 그림이 그려지게 하는 것이며, 몸으로 하여금 그림이 그려지게 유도한 것이다. 감각과 몸, 생리와 생태로 하여금 그림의 주체가 되게 만드는 일, 그러므로 어쩜 바이털리즘이다. 바이털리즘? 생리? 생태? 생기? 에너지? 그게 호흡이다. 호흡작용이다. 작가가 실제로 그림을 그릴 때 일어나는 일이다. 바이털리즘, 다르게 말하자면 추상표현주의고 초현실주의다. 표현이란 원래 안에서 밖으로 표출된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창작주체의 내면에 응축된 파토스가 자기표현을 얻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으로 치자면 몸이 그린 그림, 감각이 그린 그림, 무의식이 그린 그림을 의미한다. 작가의 그림이 그렇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한눈에도 드로잉에 가깝다. 드로잉이 따로 있지만, 회화도 그렇다. 아마도 작가의 회화적 체질 혹은 아이덴티티라고 해도 좋을 드로잉은 무의식의 즉각적인 기록을 가능하게 해준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나가는 드로잉은 때론 작가자신조차 뭘 그리겠다는 의식, 뭘 그리고 있다는 의식마저 잊게 해준다. 그렇게 반쯤은 몸이 그림을, 무의식이 그림을, 그림이 그림을 그리도록 자기를 방기하는 것에서 때론 예기치 못한 형상이며 이미지가 나온다. 그렇게 작가는 무의식을 방불케 하는 분방한 프리페인팅을 선보인다. 그 분방한 선들이 해체되고 모이면서 때로 추상적인 화면을 만들고 더러는 알만한 형상을 만든다. 어떤 결정적인 형상을 위한 선이라기보다는, 다만 암시적인 형상, 잠재적인 형상, 비결정적인 형상, 항상적으로 이행 중인 형상, 때론 굳이 어떤 형상이 아니어도 무방할 형상, 그러므로 가능한 형상을 예비하고 있는 선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암시적인 선묘가 밀어올린 알만한 형상 중에는 꽃도 있다. 아마도 작가가 문병 갈 때 꽃을 가져갔을 것이다. 아니면 문병을 계기로 몸을 되돌아보게 했고, 꽃이 주는 의미(이를테면 화무십일홍 그러므로 인생무상 같은)를 새삼 되새기게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가 그림에 그림처럼 써넣은 수프(죽)에 해당하는 영문자 soup 역시 그 의미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드로잉을 겨냥하고 그린 일련의 모음그림들이 있다. 검은 바탕화면에 붓 대신 도구에 물감을 묻혀 한순간에 그린 것이 여실한 단색조 그림들이 다. 순수한 선묘로만 그려져 있는데, 삶이 그런 것처럼 엉킨 실타래 같고, 미생물 같다. 시작과 끝이, 처음과 마지막이 하나로 연속된 뫼비우스의 띠를 보는 것 같다. 시작도 끝도 없는, 일상이 그런 것처럼 차이를 내포한 반복을 생성시키는, 그리고 그렇게 무한생성 반복할 뿐인 존재의 순환하는 운동성을 표상하는 것 같다. 근작의 주제가 다름 아닌 숨이고 몸이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보면 이러저런 신체의 장기처럼도 보인다. 아님 숨 자체를 직감적으로 그린 것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작가는 숨을 그렸다. 그 자체로는 형태도 색깔도 없는 숨을 그렸다. 예술은 암시의 기술이라고 했다. 가시적인 것을 빌려 비가시적인 것(아리스토텔레스는 유령이라고 했다. 그리고 플라톤은 아마도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을 불러내는 기술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비가시적인 것이 보이고, 숨결이 느껴지는가. 잘 보면 보인다. 느끼고자 한다면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숨을 의미하는 아니마는 동시에 여성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아마도 생명의 주권을 의식한 상징일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생명의 원천(그러므로 숨들의 샘)에 빠지게 만들고, 존재가 존재자를 잉태하던 최초의 입김으로 보는 이를 감싼다. 치유하면서 치유 받는, 치유의 기운(그러므로 다시, 숨)을 불어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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