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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호, 타자의 언어를 이해하는 일의 윤리적인 차원

고충환

주영호, 타자의 언어를 이해하는 일의 윤리적인 차원 


쉼. 위대한. 배움. 설렘. 자유. 조언. 시장. 응원. 비상. 느낌. 진심. 재정비. 선물. 용기. 밥. 눈부신. 존경. 자존감. 성공. 기적. 보통. 능력. 좋은. 진실. 이 단어들은 다 뭔가. 단어들 간 유기적인 관계가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다. 무분별한 단어들의 나열 같기도 하고, 어린아이 아님 외국인이 한글을 공부하고 있는 중인 것도 같다. 문제는 캡션의 도움이 없다면 이 단어들의 의미를 읽을 수도 알 수도 없다는 점이다. 바로 점자로 된 단어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이처럼 읽을 수도 알 수도 없는 점자를 기술해놓고 있는 것일까. 바로 이 점이 핵심이다. 점자 자체로는 그 의미를 읽을 수도 알 수도 없다는 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 그러므로 점자의 언어적 특수성을, 그 언어문화사적 관습 혹은 제도적 관습을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굳이 점자를 기술의 표면 위로 불러낸 이유를 밝히는 것이 점자를 소재로 한 작가의 작업을 해석하는 관건이 될 것이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카타리는 저작 <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에서 소수 작가들은 그들 자신의 언어에서 이방인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독일어로 글을 쓴 체코인 프란츠 카프카, 프랑스어로 글을 쓴 아일랜드인 사무엘 베케트를 그 예로 든다. 이외에도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글을 쓴 작가들이 왕왕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굳이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글을 쓴 것일까. 여기서 모국어는 이미 의미가 결정적인 것이어서 굳이 그 의미에 대해 사고할 필요가 없다. 그런 만큼 그 의미도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 외국어는 그 의미가 생소한 것이어서 일일이 그 의미하는 바를 더듬어 찾아야 하고, 그 과정에서 사고하게 만들고 사유를 촉발시킨다. 그렇게 모국어는 결정적인 의미, 한정적인 의미, 상식과 합리, 클리세(안 봐도 비디오인)와 독사(롤랑 바르트에 의하면 부르주아의 체제순응적인 화법)를 상징한다. 그런 만큼 외국어에게는 이와는 반대되는 의미, 이를테면 비결정적인 의미, 열린 의미, 상식과 합리가 간과하거나 억압하고 있는 의미를 캐내고 발굴한다는 실천논리가 부과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유를 자극하고 촉발하고 작동시킨다는 의미가 부여된다. 
그러므로 그 저작의 논점은 소수적인 문학으로 다수적인 문학의 경직성과 한계를 타파하는 것, 소수 작가들의 이방인적 글쓰기(이를테면 질 들뢰즈의 차이를 생산하는 글쓰기, 모리스 블랑쇼의 의미의 바깥을 창출하는 글쓰기)를 통해 다수 작가들의 그 자체 이미 형성된 문학형식에 부합하는 글쓰기 그러므로 체제 안정적인 글쓰기를 정화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소수와 다수는 단순한 양적 차원이 아닌, 질적 차원이며 실천적 차원으로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다시 점자로 돌아가 보자. 점자는 다수자의 관점에서 볼 때 소수자의 언어고, 주체의 관점에서 볼 때 타자의 언어고, 모국인의 관점에서 볼 때 이방인의 언어고, 정상성의 관점에서 볼 때 비정상성 언어다. 여기서 작가는 정상성 비정상성 문제를 건드린다. 누가 정상성 비정상성 개념을 정의하고 분배하는가(미셀 푸코). 언어 자체는 결코 중성적이고 가치중립적인 개념대상이 아니다. 권력이 매개된 제도적 장치의 한 형식이다. 그리고 예술은 비정상성 언어의 전형적인 경우(이를테면 조르주 바타이유의 무정형)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그 의미가 정해져 있지는 않다는 점에서, 미처 알려지지 않은 미증유의 의미를 더듬어 찾는 과정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어느 면 점자와 통한다. 어쩜 작가에게 점자는 그 자체 신종언어이며 신생언어를, 그러므로 또 다른 예술형식을 상징할 수 있다(예술은 언어의 한 형식이다). 소수자의 언어(양적인)가 소수적인 언어(질적인 그러므로 실천적인)로 변이될 수 있는 매개 가능성을 표상할 수 있다. 
작가는 근작의 주제를 <My Dot>이라고 부른다. 나의 점자, 나의 언어, 나의 말 정도를 의미할 것이다. 이 말은 자기에게 닫혀 있으면서, 동시에 타자를 향해 열려있다. 작가는 점자의 의미를 읽을 수도 알 수도 없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점자는 읽을 수도 알 수도 없는 예술의 의미를 더듬어 찾아가는 과정을 표상한다. 결정적인 의미로 환원되지는 않는 예술의 열린 의미(움베르토 에코)를 탐색하는 과정을 표상한다. 그럼에도 작가는 점자를 매개로 타자와 소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예술을 매개로 또 다른 소통의 계기를 열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작가는 점자를 매개로 소수자의 언어, 타자의 언어, 이방인의 언어, 비정상성 언어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일의 윤리적 차원을 제시한다. 여기서 이해는 소통에 연동된다. 언어를 매개로 타자를 이해하고 타자와 소통하는 것이다. 그렇게 예술은 소통의 기술이 된다. 이번에는 예술을 매개로 그렇게 한다(다시, 예술은 언어의 한 형식이다). 그런 만큼 그 자체 예술의 실천논리(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계기를 여는 일)와도 무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집 형상 위에 점자를 올려놓는다. 종이 위에 손톱만한 크기로 금박 처리한 집 형상 위에 올려놓는다(엄밀하게는 집 아래쪽에 점자를 표기한). 그리고 또 다른 작업에서 스테인리스스틸 소재의 집 형상 위에다 점자를 돋을새김 했다. 점자가 언어의 한 형식임을 인정한다면, 아마도 집이 가질 수 있는 의미를 뜻할 것이다. 그런데, 왜 집인가. 작가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집은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이미 자기 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여전히 집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 집은 부동산을 상징하고, 자산을 상징하고, 재화를 상징한다. 행복을 상징하고, 꿈을 상징한다. 휴식을 상징하고, 쉼을 상징한다. 자본주의 시대에 집만큼이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물린 소재가 또 있을까 싶다. 그렇게 집은 페티시즘 곧 물신을 상징한다. 알고 보면 행복도 꿈도, 휴식도 쉼도 모두 이미 자기 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나 유의미한 얘기다. 그렇게 집은 유산자와 무산자를 가름하는 척도가 되었다. 행복한 정도를 수치로 환산한 기준이 되었다. 그동안 집의 상징이 되어주었던 꿈꾸는 집이나 보금자리와 같은 친근한 개념이 낭만주의의 유산으로 치부되고 있는 시절이다. 
그리고 집은 정체성을 상징한다. 집은 세계로부터 주체를 가두면서 보호한다. 단절과 보호가, 고립과 안위가 불안하게 동거하는 이율배반적인 정체성을 상징한다. 나에게 집은 편안하지만(캐니), 너에게 집은 불편하다(언캐니). 나에게 집은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만, 너에게 집은 두려움(낯선 대상)을 불러일으키고 호기심(욕망의 대상)을 자극한다. 그렇게 집은 나와 너의 관계를 통해 볼 때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나 홀로 있을 때조차, 나 자신에게조차 양가적이다. 원주민의식과 이방인의식이 불안하게 동거하는 것이며, 네가 없을 땐, 심지어 나 자신을 나와 너로 분리시키면서까지, 그리고 그렇게 일종의 역할극을 연기하면서까지 그렇게 한다. 너(타자)는 이미 나(주체)의 일부이며 분신이다. 그렇게 다시, 집은 이중적이고 양가적이다. 
작가는 그 정체성의 집 위에 무분별한 단어들의 나열 같기도 하고, 이방인(아님 외계인?)이 발신해온 알 수 없는 부호 같기도 한 점자들을 표기해놓았다. 여기서 지나칠 뻔 했던 소재가 문득 각별해진다. 작가에게 스테인리스스틸 소재는 집이면서 동시에 거울이기도 하다. 일종의 거울로서의 집이다. 집 자체가 이미 거울이다. 가두면서 보호하는, 편안하고 불편한, 친근하면서 낯선, 그리고 그렇게 이중적이고 양가적인 타자들의 정체성이 파열하면서 자신의 조각을 건네주는 표면,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의미들을 되돌려주는 표면이다. 그렇게 작가는 집 형상에 집 없는 사람들의 꿈을, 현대인의 무분별한 욕망을, 그리고 불안정한 정체성과 부유하는 의미들을 아로새겨 놓았다. 
그리고 작가는 스테인리스스틸 소재의 변형팔각주사위의 표면 위에다 점자를 부려놓는다. 여기서 주사위는 운을 상징한다. 미래가 불투명한 시대며 불안정한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자신에게 닥쳐올 운을 알고 싶고 시험해보고 싶다. 저마다 장밋빛 인생이 기다리고 있기를 바라지만, 언제나 현실은 운만 못한 법이다. 이로써 작가는 운을 기원하는 마음과 함께, 정작 운이 아닌 현실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역설적인 의미를 담았다. 

소통이 문제가 되는 시절이다. 알아먹지도 못하는 외국어로 말을 하는 것도 아닌데, 저마다 불통을 얘기하고, 불통 때문에 갑갑해하고, 불통 때문에 아파한다. 소통은 이해를 전제로 한다. 진정한 이해 없이 소통은 없다. 그렇게 소통은 상대방을 이해하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일을 매개 성사시켜주는 것이 언어다. 여기서 작가는 점자를 매개로 타자와 소통하고 싶다. 타자의 언어를 매개로 타자를 이해하고 싶다. 그 일은 어쩜 불통의 시대이기에 더 큰 의미로 와 닿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점자를 빌려 태생적으로 타자들의 언어인 예술의 본성(예술언어학)을 해명하고 싶고, 그 실천논리(어쩜 윤리적인 차원의)를 밝히고도 싶다. 작가의 근작은 그 일을 위한 한 시작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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