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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문, 기억의 연대기

고충환

배정문, 기억의 연대기

고충환

어떤 사물을 채집하고 분류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적 행위이다. 동물들도 사물을 채집(채집이라기보다는 저장)하지만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이 행위로부터 박물관이 유래하고 미술관이 유래한다. 박물관은 시간의 집이며, 미술관은 시간(시간이라기보다는 시간의 흔적)을 분류하고 재구성하는, 그리고 여기에 의미를 부여해 향유와 반성의 대상으로 전이시키는 제도적 장치다. 박물관이든 미술관이든 자기반성적 인간과 자의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적 현상(인간이 인간을, 자기가 자기를 되돌아보는 현상 그러므로 메타현상)에 속한다. 기억도 마찬가지. 어떤 사실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 역시 인간의 전유물이다. 동물들도 기억을 하지만, 인간처럼 기념하고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이 행위로부터 제의(특히 장례의식과 같은)가 유래한다. 작가의 전작에서 보면 세월호 테마작업이 바로 이처럼 기억하고 기념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제의와 살풀이 퍼포먼스에 해당한다(인류 최초의 예술가는 무당이었다. 그러므로 어쩜 예술이란 원초적 행위를, 때로 원형적 존재를 소환하는 일종의 초혼의식일지도 모른다). 작가의 작업은 바로 이처럼 사물을 채집하고 분류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그리고 여기에 사실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적 행위를, 자기반성적 행위를, 그러므로 어느 정도 문명사적 행위를 예시해준다. 
기억은 이처럼 많은 경우에 트라우마와 관련이 깊다(모든 존재론적 인간은 상처에 민감하다). 개인적 기억은 사회적 기억으로 그리고 재차 역사적 기억으로 확대 재생산되고, 개인적 외상은 사회적 외상 그리고 역사적 외상과 유기적으로 얽혀있다고 보는 것이 업이고 연의 세계관이다. 그 세계관을 통해서 보면 외관상 무관해보여도 사실상 무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는 너를 반영하고 너는 나를 되비친다. 그러므로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픈 것이 이타심이고 이타적 세상이다. 정상이다. 반면 네가 아픈 것은 나와는 무관하다고 보는 것이 이기심이고 이기적 세상인심이다. 비정상이다. 그런데, 인정하기는 싫지만 우리 모두는 이기심과 이기적 세상인심이 지배하는 비정상사회를 살고 있는 것 같다. 온통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고, 온통 그 징후며 증상을 앓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새삼 기억을 들고 나온 작가의 작업은 오히려 그 만큼 더 의미가 있어 보인다. 그 속에 이런 상실(그리고 상실감)에 대한 치유와 회복 그리고 위로의 기능을 내장하고 있어서 그 울림이 더 크게 다가온다(기억 자체가 이미 어느 정도 치유고 위로다). 

그렇게 작가는 기억을 소환한다. 그래서 주제도 자전적 기억이다. 자전적 삶의 현장으로부터 기억을 소환하고, 그 기억을 증언하고 증명해줄 매개체로서 오브제를 호출한다. 일종의 타임캡슐인 셈이다. 그 타임캡슐이 책의 외형을 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인상적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타임캡슐로 치자면 책만 한 것이 없다. 인생은 저마다 한권의 책을 쓰는 행위며 과정이라고 했다. 말라르메는 곰팡내 나는 책으로 가득한 서재에, 너무 많이 읽어서 너덜너덜해진 책에 자신을 비유했다. 보르헤스는 실제로 <바벨의 도서관>이란 저작을 쓰기도 했지만, 책으로 가득한 거대한 도서관에 스스로를 비유하기도 했다(보르헤스는 모리스 블랑쇼 그리고 파스칼 키냐르와 함께 상호텍스트성으로서의 책, 인용과 주석으로서의 책, 책들의 책, 그러므로 책 이후의 책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그 책 속에 이러저런 기억의 편린들이 담긴다. 각종 오브제들을 책 틀 속에 담아 그 속이 들여다보이는 투명 소재의 젤 왁스로 굳힌 것이다. 그 면면을 보면 딸아이의 유치를 보존 제작한 틀니, 딸아이가 어릴 때 신던 신발, 작가 자신이 고등학교 입학선물로 받은 손목시계(35년 전), 동생이 생일선물로 준 하모니카(34년 전), 생전에 오토바이 수리공을 하셨던 작고하신 아버지의 작업 공구들, 아버지 몰래 고물과 바꿔먹은 엿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엿장수의 가위, 불자였던 아버지가 유품으로 남긴 조악한 불상, 못쓰게 된 타자기(타자기는 알고 있다. 기억은 지워질 뿐,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심지어 억압된 어떤 기억은 무의식으로 잠수를 타고, 이후 예기치 못한 형태로 되돌아오는데, 그걸 프로이트는 억압된 것들의 귀환이라고 부르고, 자크 라캉은 실재계의 출몰이라고 부르고, 슬라보예 지첵은 불모의 사막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타자기에 인격을 부여한 윌리엄 버로스의 네이키드 런치), 미술가를 꿈꾸던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몽당연필들, 조각가를 꿈꾸며 남대문 시장 입구 화방에서 구입한 해라(34년 전), 혹독했던 군 생활을 떠올리게 만드는 호루라기, 그리고 해골(메멘토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심지어 아르카디아에도 죽음은 있다)과 여행을 꿈꾸게 만드는 세계 각 국의 동전들이다(삶은 여행이고, 자기 자신 속으로 열린 여로다). 
자전적 기억이라고는 했지만, 사람 사는 꼴이 어슷비슷한 탓에 사실은 누구나 공감할 만한 기억들이다. 비록 사사로운 기억의 편린들을 열거해 놓은 것이지만, 쉽게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그렇게 해골이 불러일으키는 것과 같은 존재론적인 기억(아님 원형적 기억?), 호루라기 소리가 불러일으키는 것과 같은 전체주의의 추억(?)이 생생하다. 어떤 소리, 어떤 향기가 불현듯 과거로 퇴행하게 만드는 현실 속의 계기를 프루스트효과라고 하는데(흥미롭게도 마르셀 프루스트의 저작 제목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다), 작가로 하여금 프루스트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계기적 오브제들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게 작가는 그 자체로는 색깔도 형태도 없는 기억에다 실체를 부여해 오브제로 대상화하고 객체화한다. 기억을 박제하고 화석으로 만들어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풍화현상을 즉물적 형상으로 표현 번안해 놓고 있는 것이다(마치 초현실주의화가 조셉 코넬처럼). 

그리고 대숲이 있다. 사실은 각종 색실로 칭칭 감은 대나무를 무슨 기둥처럼 푯대(이를테면 정신을 표상하는)처럼 일정 간격을 유지한 채 공간에다 세워 설치한 것이다. 이게 뭔가. 기억 나무다. 전작에서 작가는 이미 각종 기억을 상기시키는 오브제들을 무슨 열매마냥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기억 나무를 선보인 적이 있다. 그리고 근작에서 그 기억 나무를 재소환해 또 다른 형식으로 변주한 것이다. 그렇게 기억을 표상하는 대숲에는 비록 바람이 없지만, 실제 대숲에서처럼 가상의 바람이 분다. 티베트 불교에는 바람이 불경을 읽으면, 그 바람을 맞은 사람도 저절로 불경을 읽은 것에 진배없다는 믿음이 있다. 그 믿음처럼 대숲에는 기억을 실어 나르는, 기억을 재생하는 바람이 인다. 알록달록한 색실들은 현란한 색깔만큼이나 아름다운, 감각적인, 때로 암울하고 어두운 다채로운 기억들을 상징한다. 그 기억의 바람이 불어와 저마다의 가슴을 할퀴고, 저미고, 먹먹하고, 벅차게 만든다. 바람이 불러온 일종의 기억작용이라고 부를 만한 것으로서, 색실을 감은 대숲 자체도 그렇지만, 그 작용이 꼭 서낭당의 당나무 같다. 대개 당나무에는 형형색색의 실(조각 천)들이 울긋불긋 매달려 있어서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꼭 나무가 춤이라도 추는 것 같다. 서슬 퍼런, 한 많은, 위로하는, 목매달아 죽은 귀신이, 기운이, 기억이 춤추는 것 같다. 그렇게 작가는 대숲에 부는 바람으로 기억의 재생능력과 기억작용을 조형해놓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색실은 여행가방(캐리어)에도 감겨있는데, 삶의 여로(길)를 상징하고, 얽히고설킨 인연(아님 관계)의 망을 상징한다. 

한편으로 기억에는 되새기고 싶은 기억이 있는가 하면, 잊고 싶은 기억도 있다. 작가는 이런 잊고 싶은 기억을 위해서도 별도의 프로젝트를 마련했다. 관객참여 형 작업으로서 관객들 저마다 잊고 싶은 기억을 종이에 적은 연후에, 설치된 파쇄기를 통해 파쇄하게 한 것이다. 마치 저 홀로 산에 가서 땅을 파고 비밀을 발설한 연후에 다시 파묻어 심리적 짐을 던다는 일화에서처럼 파쇄 된 종이와 함께 기억 역시 사라진다고 본 것이다. 이처럼 잊고 싶은 기억이 있는가 하면, 잊히고 싶은 기억도 있다. 무슨 말인가. 모든 공적 서류는 무한정 보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일정 기간 보관하고 나면 서류를 폐기 처리하는데, 이때 파쇄기가 이용된다. 그런데 파쇄기가 부정적인 방법으로 비정상적인 경우로 전용되는 것이 문제다. 빨리 잊히고 싶어서, 증거가 될 만한 서류들을 눈앞에서 치우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는 것이다. 작가의 기억 프로젝트는 비록 자전적인 경우에서 비롯한 것이지만, 그 범주며 영역이 사회학적(현실 비판적) 장으로까지 확대되고 있음이 확인되는 대목이다. 
이처럼 기억에는 되새기고 싶은 기억이 있는가 하면, 잊고 싶은 기억도 있고, 잊히고 싶은 기억도 있다. 00하고 싶은? 기억이 다름 아닌 욕망의 문제임을 말해준다. 기억이 원래 속해져 있던 시간대인 과거로부터 기억을 소환하는 것은 언제나 현재에서의 일이며, 현재의 욕망에 연동된 일이다. 그래서 어쩜 현재가 과거를 세우고(정립하고), 욕망이 기억을 만든다. 그렇게 기억은 최초 사실로부터 멀어지고, 그 자체 또 다른 현실이 된다. 자전적 기억이 그렇고, 사회적 기억이 그렇고, 역사적 기억이 그렇다. 그래서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해석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고, 문맥에 맞춰 이 말을 각색하자면 모든 기억은 욕망이라고 말할 수가 있게 된다. 당연 일반화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기억이란 객관적 사실로서보다는 심리학의 학적 대상일 수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렇게 작가는 각각 책의 외피를 취한 타임캡슐 오브제, 대숲에 부는 바람으로 나타난 기억 나무, 그리고 파쇄기를 매개로 한 설치작업으로 나타난 기억 지우기(그러므로 치유하기) 프로젝트를 통해 일종의 기억의 연대기라고 부를 만한 일련의 작업을 전개해 보인다. 작가는 그 작업을 질 들뢰즈를 빌려 기억 공간(그 자체 기억의 공간화 그리고 의식의 공간화와도 통하는)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그 자체 형태도 색깔도 없는 기억(혹은 의식, 그러므로 어쩜 욕망?)에다 질료를, 형태를, 공간이라는 몸체를 부여해 즉물적 실체(아님 의미론적 실체?)로 환생시킨다. 그리고 그렇게 환생된 기억공간에로 초대한다. 저마다의 기억공간이 열리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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