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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문화재단 2019 전국청년작가 미술공모전

고충환

남도문화재단 2019 전국청년작가 미술공모전

고충환

남도문화재단은 기업이익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한다는 차원에서 문화예술 지원 사업을 목적으로 지난 2013년 설립되었다. 전국청년작가 미술공모전은 그 사업의 일환으로서 2017년 처음 시작한 이후 2019년 현재 3회째 행사에 이르고 있다. 그동안 대상을 수상한 작가로는 판법(판화)을 도입해 회화의 표현영역을 확장시킨 박기훈(2017년 1회), 건식 프레스코 벽화기법을 재해석한 작업으로 회화표현을 다변화한 김유정(2018년 2회)이 있다. 올해 공모전 역시 예년과 마찬가지로 대상작가 1명(윤상윤), 우수상 작가 1명(이성경), 선정작가상 5명(염지희, 이혜성, 윤준영, 최민국, 노현우)의 작가들이 선정되었다. 그 대략의 작품경향을 보면 다음과 같다. 

윤상윤(Into the trance 2). 숲이 있고, 모델이 있고, 교사가 있고, 저마다 이젤을 편 채 데생에 열심인 학생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야외현장수업이라도 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림이 좀 이상하다. 학생들이 데생하고 있는 현장은 정작 숲이 아닌 물이다. 무의식인가. 그렇담 모델과 교사가 속해 있는 숲의 정경은 의식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렇게 그림은 외관상 숲에서의 야외현장수업을 소재로 한 것이지만, 사실은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를 알레고리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 순록을 타고 있는 나체소녀로 나타난 모델은 현실 속 정경이라기보다는 신화에서 차용하고 각색한 정황 같다. 더욱이 그 전체가 좌대 위에 위치해 있어서 무슨 동상처럼 보인다. 작가에 의하면 작가의 그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소재는 초자아이며 권력의 정점을 상징한다고 했다. 그렇게 그림은 숲과 물,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신화가 그 경계를 허물고 네트워크 되는 의외의 관계를 열어놓는 한편, 계급과 계층의 알레고리를 예시해준다. 

이성경(빛을 등지고 2-2). 외떨어진 곳 숲속 정원 구석에 풀장이 있다. 아마도 풀장에 물이 빠진지가 오래되었을 것이다. 사람이 산지도 오래되었을까. 키 큰 나무들이 짙은 음영을 드리우면서 어둔 풀장을 에워싸고 있다. 고즈넉한, 정적인, 낯설음과 이질감이 감돈다. 작가는 그림에서처럼 주로 빛을 등지고 있는 정경, 어둑한 풍경을 그린다. 사건 이후의 흔적을 그리고, 빛과 어둠의 공모가 만들어낸 풍경을 그린다. 그의 그림에선 빛보다 어둠이 주제고 그림자가 주제다. 빛은 다만 어두움을 강조하기 위한 구실에 머물고, 그림자 속에 숨은 대상을 부각하기 위한 계기에 지나지 않는다. 어둠이 주제고 그림자가 주제인 그림, 그러므로 어쩜 내면의, 감정의 알레고리적 풍경이다. 

염지희(Before the dust wall 먼지 사막 앞에서). 작가는 회화와 영상을 전공했다. 사진콜라주 작업은 이 이력과 무관하지가 않은데, 그에게 콜라주 작업은 일종의 시나리오이자 무수한 이야기들을 연상할 수 있는 이미지 텍스트와도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는 주로 영화나 시집에서 착상을 얻어와 회화로, 영상으로, 설치로, 퍼포먼스로 확장하고 다변화한다. 그렇게 확장되고 다변화하는 서사에서 콜라주는 결정적이다. 콜라주란 파편화된 세계인식과 무관하지가 않다. 콜라주 자체가 파편화된 세계, 조각난 세계의 표상이다. 세계는 언제나 부분인식이 가능할 뿐, 그마저도 의심의 대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불완전한 세계, 부조리한 세계, 안개 속을 헤매듯 미증유의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콜라주고 편집이다. 알다시피 작가가 주로 착상을 얻는 영화는 무엇보다도 편집의 기술이고, 또한 시집은 그 의미구조가 지나치게 헐렁하다. 그러므로 한편의 영화 속엔 무수한 다른 영화들이 들어있고, 한권의 시집 속엔 미처 의미화 되지 못한 허다한 의미들이 잠재돼 있다. 그렇게 작가는 콜라주를 매개로 어쩜 태생적으로 사라질 운명의 다른 영화들, 잠재적인 의미들, 가능한 서사들을 불러낸다. 

이혜성(Nameless Flower 3). 7년간 수집한 식물들이라고 했다. 일부러 수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러 사온 것도 있고, 선물 받은 꽃들을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시든 꽃이며 죽은 꽃들을 수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래 싱싱했을 꽃들이 시들해지고, 살아있는 꽃들이 죽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죽은 꽃들을 그린다. 풀사이즈로 화면을 온통 채우고 있는 죽은 꽃들의 시체가 꽃 무덤 같다. 비록 식물이 죽은 것이지만, 정작 동물의 사체 냄새가 난다. 죽은 동물의 털인가 했다. 죽은 짐승의 사첸가 했다. 아마도 죽으면 차이가 없어지는가 보다. 작가는 제법 큰 사이즈의 그림을, 온통 빽빽한 그림을 다만 세필로만 그렸다고 했다. 꽤나 거친 느낌인데, 세필로 거친 느낌을, 죽은 짐승(사실은 식물)의 질감을 오롯이 살려낸 것이 놀랍다. 죽은 것들을 그리는 것도, 죽은 것들을 그리기 위해 공력을 들이는 것도 수행적인 측면이 있다.  

윤준영(달과 검은 바다). 칠흑같이 검은 바다가, 바위처럼 견고한 바다가 넘실댄다. 그 위로 달이 떠있다. 극적이긴 하지만 예사스런 풍경이다. 그 사이로 긴 막대가 서 있다. 부푠가. 새집인가. 전망댄가. 좀 아리송하긴 하지만 새집 같다. 웬 새집? 전망대든 새집이든 그것들이 있을 자리가 아니다. 예사스런 풍경이 불현듯 예사롭지 않은 풍경으로 돌변한다. 작가는 공간에서 사람을 보고, 풍경에서 감정을 읽는다고 했다. 아마도 칠흑 같은 바다는 작가의 세계감정일 것이다. 그리고 바다 한가운데 부표처럼 떠 있는(아님 차라리 흔들리는) 작은 집은 고독감과 상실감, 불안과 무력감 같은 작가의 감정풍경을 그린 것일 터이다. 작가의 다른 그림들에는 유독 미로를 그린 그림이 많다. 미로는 말할 것도 없이 출구 없는 삶의 메타포다. 작가는 그렇게 어쩜 막막한 바다로 또 다른 미로를 그려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출구 없는 삶의 존재론적 자의식을, 그 징후와 증상을 그려놓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최민국(여행의 오후 32.0c). 작가는 여행의 오후 한때를 그려놓았다. 해변에 야자수 몇 그루가 서 있고, 야자수에는 해먹이 매달려있다. 그 옆으로 비키니 차림의 여자가 텐트 혹은 자리를 손질하고 있다. 여기에 몽롱하게 만드는 햇빛의 질감이며 색감마저 감지되는 풍경이 여유와 한가로움을 자아낸다. 그림 한쪽에 적당한 문구(이를테면 광고카피 같은)만 적어 넣으면 그대로 한 장의 관광엽서가 될 것 같다. 휴양지와 휴양림으로 대변되는 관광 상품의 요구조건을 완벽하게 구비해놓고 있는 것이 현대인의 유토피아의 전형을 보는 것 같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현대적이다. 일시적인 휴양을 떠나온 사람들이지만, 다시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 복귀해야 할 사람들에 드리워진 감미롭고, 나른하고, 공허한 공기의 질감이 그렇다. 

노현우(무제). 작가의 풍경화는 다르다. 흔히 풍경화의 전형으로 알려진 아카데믹한 풍경화와도 다르고, 인상파를 변주한 풍경화와도 다르고, 심지어 풍경사진과도 다르다. 사진처럼 보이지만 회화적이다. 자연 고유의 색감과 질감은 그림으로도 사진으로도 재현불가능하다. 그 색감과 질감이 투명성(투명한 깊이?)을 머금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에선 심지어 어둠조차 투명하다. 그런데 작가의 그림은 투명성을 머금은 자연 본래의 색감과 질감에 상당할 정도로 가깝다. 그러면서도 인공적이다. 마치 고화질의 미디어를 통해 본 이미지처럼 고감도다. 자연과 인공과의 사이풍경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그렇게 작가의 풍경화는 그 자체로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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