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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원, 스스로 허수아비가 된

고충환

남궁원, 스스로 허수아비가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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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리핑. 붓으로 그리는 대신 물감을 흘리고 흩뿌리면서 비정형의 얼룩(타시즘) 만들기. 주지하다시피 잭슨 폴록은 드리핑으로 현대미술의 시조가 될 수가 있었다. 이젤 페인팅 이후 그림을 세워서 그리기로 나타난, 관성적으로 굳어진 회화적 관습을 타개할 수가 있었다. 그림을 보면서 그리는 대신 바닥에 깔아놓은 그림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 그림과 혼연일체가 되는 그리기, 그림을 그린다기보다는 그림이 그려지게 하기, 그러므로 능동적인 그리기 대신 수동적인 그리기, 반쯤은 우연으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만들기, 반무의식적 그리기, 그러므로 어느 정도 자동기술적 그리기로 그림신(무당)이 될 수가 있었다. 
타블로와 페인팅의 회화적 관습을 일거에 바꿔놓은 드리핑은 이후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남궁원의 회화 역시 크게는 그 영향권 내에 있다. 드리핑 기법을 메인으로 가져가면서 이를 변주하고 각색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만의 회화적 아이덴티티를 희구한 것이다. 그 대략을 보면 먼저 먹으로 큰 얼개를 드로잉한 후, 그 위에 아크릴로 드리핑하고, 최종적으로 피스로 마무리한다. 그렇게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암시적인 화면이 연출된다. 이러저런 형상들이 숨어 있지만, 보통은 나무 같고, 숲 같고, 흐드러진 꽃처럼 보인다. 평소 자연친화적인 내면풍경의 무의식적 발현으로 봐도 되겠다. 
이처럼 추상과 구상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는 암시적인 화면에다가 작가는 근작에서 또 다른 회화적 요소 혹은 소재를 도입한다. 바로 파쇄지다. 쌀알만 한 크기의 파쇄지 입자들을 그림 위에 흩뿌려놓은 것인데, 먼저 흩뿌려진 물감 입자들과 뒤섞여 얼핏 보면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어쩜 숨기기와 드러내기, 드러내기와 숨기기가 하나의 화면 속에서 길항하고 부침한다고나 할까. 그렇담 뭘 드러내고 뭘 숨기는가. 여기서 숨는 것은 아무래도 파쇄지가 갖는 의미(파쇄지에 숨겨진 의미?)일 것이다. 보통 공문서는 일정기간 보존하다가 파쇄기를 통해 파쇄 한다. 여기까지는 상식이다. 그 다음이 문제고 예외적인 경우가 있어서 문제다. 증거인멸을 목적으로 서둘러 서류를 파기하는데 파쇄기가 이용되고 있는 것. 작가의 그림은 바로 그런 사회현상을 반영한다. 서로 좇고 좇기는, 서로 속고 속이는 불합리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 
사회적 현실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플레카드로도 확장된다. 플레카드는 사회적 현실을 읽을 수 있는 바로미터다. 떼인 돈 받아드립니다 같은 경제적 현실을 반영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이게 나라냐 거나 미군은 물러가라와 같은 정치적 현실을 반영하는 경우도 있다. 작가는 이런 구호가 난무하는 현실을 플레카드를 통해 작업의 한 부분으로 끌어들인다. 플레카드의 부분 이미지들을 박음질한 것으로 캔버스를 대신한 것이며, 그 위에 드리핑 기법으로 그림을 그려 시대적 혼돈상황을 유추해볼 수 있게 한 것이다. 나아가 작가는 박음질한 플레카드로 옷을 지어 입기도 한다. 작가는 허수아비 작가로 알려져 있다. 시대로 옷을 지어 입은 그 자신 스스로 허수아비가 되는, 그런, 허수아비의 또 다른 한 버전으로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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