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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달표/ 시작도 끝도 없는, 아무데서나 시작되고 끝나는

고충환

경달표/ 시작도 끝도 없는, 아무데서나 시작되고 끝나는

고충환

알인가. 세폰가. 아님 핵? 에너지? 에너지의 운동성? 이도저도 아니라면 그저 우연한 순간에 떠오른 형태?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 모두가 작가의 그림을 해명하기 위한 근거로서 자기를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작가는 우연한 계기로 이 그림을 착상했다고 한다. 평소라면 세포가 인식 속으로 들어올 일은 거의 없다. 그러다가 탈이 나면 비로소 몸이 보이고, 암이 보이고, 세포가 눈에 들어온다. 그러므로 어쩜 탈(정신분석학으로 치자면 트라우마, 그리고 존재론적으론 결여와 결핍의식)은 우리가 다름 아닌 몸적 존재이며(전통적으로 인문학은 인간이 정신적 존재임을 강조해왔다), 세포로 구조화된 몸적 존재임을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된다. 그렇게 작가는 세포가 다 똑같은 세포가 아니라는 사실이, 세포에도 이로운(착한) 세포가 있고 해로운(나쁜) 세포가 있다는 사실이, 때론 세포가 자기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아님 자기 영토를 지키기 위해 다른 세포와의 전쟁도 불사한다는 사실이, 세포 자체가 이미 다름 아닌 생명(혹은 생명의 씨앗)이라는 사실이 새삼 흥미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유전자공학도도 아니고 생물학자도 아니다. 무슨 말인가. 앞서 사실을 말하자면, 이라고 했다. 이런 사실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세포를 그리는 것은 아니다. 그건 다만 작가로 하여금 그림을 시작하게 만든 계기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 속에는 작가로 하여금 그림을 시작하게 만들어주는 허다한 계기들이 있다. 어쩜 그 즈음에 작가는 형태들의 형태, 형태 중의 형태, 형태의 근원, 형태의 원형,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원형적 형태, 그러므로 어쩜 그림을 형성시켜주는 최소한의 근거로서의 형태에 대한 막연하고 치열한 생각 속에 빠져 있었을 수 있다. 그러다가 우연한 계기로 문득 몸이 눈에 들어오고 세포가 눈에 밟혔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건 세포이면서, 동시에 세포가 아니다. 현실은 항상 그림을 시작하게 만들어주는 계기로서 작용할 뿐, 그림이 작동하는 원리는 다르다. 현실의 논리와 그림의 논리는 다르다. 그림의 논리가 현실에 기생하면서 현실을 숙주 삼아 현실의 논리를 잡아챈다고나 할까. 그렇게 여하튼 그림은 시작되어져야 하고, 여기에 현실의 논리는 그림을 시작하기 위한 구실이 된다. 어떻게 다르게 말할 수가 있겠는가. 심지어 재현적인(아님 현실참여적인) 그림에서조차 현실 그대로의 재현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작가는 알을 그리고, 세포를 그리고, 핵을 그리고, 에너지를 그리고, 에너지의 운동성을 그리고 있었다. 생명을 그리고, 우주를 그리고, 존재를 그리고 있었다. 질 들뢰즈를 따르자면 00라고 특정할 수는 없는 대상, 00같은 대상, 다만 00처럼 보일 뿐인 대상, 00인 척하는 대상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모더니즘패러다임의 환원주의 준칙을 재확인하기라도 하는 것 같은 우연한 형태를 그려놓고 있었다. 

그렇다면 작가는 어떻게 그걸 그려놓고 있는가. 그림 속으로 들어가 보자. 그 전에 그림 속 형태를 편의상 세포라고 가정해보자(여하튼 세포는 작가로 하여금 그림을 시작하게 해준 현실 속 계기로 작용하고 있는 것인 만큼). 작가는 세포(혹은 세포처럼 보이는 형태)를 그리기 위해 테이프를 도입한다. 실처럼 가녀린 테이프로 가장자리에 막을 친 후, 형태 안쪽을 붓으로 칠해 색을 채워 넣는다. 이때 세포 형태를 따라 둥글게 원을 그리면서 붓질을 반복하는데, 일정한 물성과 함께 잘 보이지는 않지만 일종의 방향성이 감지된다. 마치 레코드판 위의 가녀린 요철과도 같은 질감이 엿보이고(여기서 작가의 그림은 시각적 대상을 넘어 촉각적 대상으로 확장된다), 중심 부위가 볼록하게 도드라져 보이는 입체감이 엿보이고, 흡사 흑연과도 같은 스스로 빛을 발하는 자기발광성이 엿보인다. 굳이 둥글게 원을 그리면서 붓질을 하는 것(다분히 작위적인)은 자기가 그리는 대상성, 말하자면 원형상의 세포의 꼴에 충실하기 위한, 보다 정직하게 형태를 그리기 위한 태도의 표명으로 볼 수 있겠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스스로 부과한 규칙으로 볼 수도 있겠다. 여하튼 규칙을 정하면 우연한 변수를 줄일 수가 있다. 작가의 작업에 반복을 통한 수행적인 측면이 있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반복과 규칙 그리고 패턴은 상호 긴밀하게 연동된다). 
그리고 여기에 그러데이션 기법을 도입해 투명성과 입체감, 공간감과 내진감을 더한다. 형태의 가장자리를 밝게 하거나 어둡게 하는 식으로 형태의 안쪽과 차이 나게 처리를 하는데(명암의 허구적 도입? 연출?), 그렇게 세포 하나하나가 손에 잡힐 듯 뚜렷한 실체를 얻는다. 그렇게 도드라져 보이는 세포들의 집합이 레이어를 만들고, 세포들의 무한반복연쇄로 이뤄진 망을 만들고, 공간적 깊이(공간의 허구적 도입? 연출?)를 형성시킨다. 여기에 화면은 때로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데(옵아트를 암시하는), 현미경을 통해본 꿈틀거리는 원형세포 혹은 미생물처럼 보인다. 여기서 세포 하나하나를 생명의 씨앗으로 전제한다면, 거시적 생명인 우주와도 통하는 미시적 생명을 표상한 경우로도 볼 수가 있겠다. 색채로 치자면 대개는 청색계열과 적색계열 그리고 때로 회색계조로 한정된, 절제된 색채감정을 보여준다. 단색조의 색채감정이 금욕적이고 관념적인 인상을 주고, 여기에 때로 사진에서의 아웃포커스 기법을 연상시키는 몽글몽글한 형태가 입체감을 주면서 마치 눈앞에 빛 알갱이가 어른거리는 것 같은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인 느낌을 준다. 
그렇게 작가는 세포들을 그린다. 크게는 크고 작은 셀들이 공존하는 경우, 그리고 얼핏 균일한 크기의 셀들이 반복 재생산되는 경우, 그리고 그렇게 반복 재생산되면서 자기를 확장시키는 경우로 구분된다. 상대적이긴 하지만 전자에서는 능동적인 운동성(아님 방향성?)이, 그리고 후자에서는 억제된 운동성, 잠재적인 운동성(정중동?)이 감지된다. 셀들이 모여 알만한 어떤 형상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결정적인 형상의 고정적인 순간보다는 운동성과 이행성, 그러므로 생성과 소멸을 무한 반복하는 존재의 관성을 표상하고 있는 것 같다. 때로 하얀 바탕 그대로 드러난 셀이 있고, 작정하고 그린 셀이 공존하고 있어서 바탕으로 드러난 형태가 셀인지 아님 덧칠된 색을 덧입고 있는 형상이 셀인지 그 구분과 경계가 모호해진다. 여기에 가장자리 화면이 비어있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화면 전체가 셀로 가득한 경우도 있다. 비록 셀이라고는 했지만, 그리고 셀들 간의 방향성과 운동성이 감지된다고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그림은 추상적으로 보이고, 그런 만큼 위아래가 어딘지가 무의미해진다(중력의 상실?). 미술사가 하인리히 뵐플린은 바로크미술의 양식적 특징을 운동성과 그림 외부로의 무한 확장성을 들고 있는데, 그런 양식적 특징의 추상 버전으로 볼 수도 있겠다. 
시작도 끝도 없는, 아무데서나 시작하고 아무데서나 끝나는, 그리고 그렇게 시점도 종점도 임의적인 새로운 의미생성구조의 제시로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렇게 열린 의미생성구조가 리좀의 생성원리(질 들뢰즈)를 상기시키고, 상호영향관계와 연동성에 노출된 하이퍼텍스트와 하이퍼링크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렇게 작가는 모체도 없고 분체도 없는, 엄밀하게는 그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에너지 곧 생명 그러므로 존재의 운동성을 그려놓고 있었다. 

앞서 현실은 다만 작가로 하여금 그림을 시작하게 해주는 최소한의 계기에 머문다고 했다. 현실의 논리와 회화의 논리는 다르다고도 했다. 회화의 논리가 현실에 기생하면서 현실의 논리를 탈취한다고도 했다. 그렇게 작가는 비록 현실에서 시작했지만, 그리는 과정에서 현실로부터 탈주한다. 비록 세포를 그리고, 생명을 그리고, 에너지를 그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했지만, 그리는 과정에서 그림은 다른 것으로 변질된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그리고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반복 이행하는 일이 반복된다. 세포를 의식하면서 그리다가, 불현듯 그림 속으로 빠져든다. 뭘 그리고 있는지의 무엇에 대한 인식이 지워지고, 반복적인 행위와 그림 자체의 속성(그림의 관성?)만 남는다. 인식이 지워진다? 내가 지워지는 것이다. 그림 속에서 내가 잃어지는 것이고, 그림에게 내가 탈취되는 것이고,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그림과 내가 합치되는 물아일체의 지경에 이른다. 그림 속에서 내가 잃어진다는 것, 그림에게 내가 탈취된다는 것, 그것은 역설적으로 순수한 내가 오롯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작가는 세포를, 생명을, 에너지를, 존재를 그리면서 부지불식간에 내가 오롯해지는 사건을 그려놓고 있었다. 내가 다름 아닌 세포고, 생명이고, 에너지고, 존재다. 그러므로 그림 속에서 내가 잃어진다는 것은 사실은 그림을 매개로 내가 나를 잃으면서(무아) 오롯해진다(몰아)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 그리기는 자기반성적인, 존재론적인, 수행적인 측면이 있다. 
전작에서 작가는 탁자 위에 떨어진, 그리고 종이 위에 떨어진 물방울을 그렸다. 하나의 물방울이 떨어져 파열하면서 아님 종이 속으로 스미고 번지면서 만들어내는 우연한 형상을 좇는 재미가 그림을 그리게 했다. 여기서 물방울은 모든 우연한 형상이 유래한 원인이 된다. 그리고 근작에서 작가는 세포를 그린다. 여기서 세포는 모든 존재가 유래한 근원이 된다. 그렇게 작가의 근작은 전작과 하나로 통하고 있었다. 그렇게 통하면서 다른 의미생성구조를 열어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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