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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성신한국화 세미나

고충환

2019 성신한국화 세미나 

고충환

박해리. 여기에 행복한 순간들이 있다. 파티를 해서 행복한, 떡볶이를 먹을 수 있어서 행복한, 모래놀이를 해서 행복한, 그리고 술 한 잔을 할 수 있어서 행복한 순간들이다. 더러는 유년시절의 기억을 호출한 것이고, 때론 현실인식이 반영된 것일 터이다. 더러는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했고, 때론 저 홀로 행복한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건 행복하다고 느끼는 강도(행복지수?)가 점차 타협적이고 자족적이게 된다는 점이다. 처음엔 왁자한 생일파티가 행복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후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떡볶이를 먹는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부터는 그저 손에서 빠져나가는 모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리고 지금은 이따금씩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것이 행복하다. 일상의 소소한 일에 행복하다고 느끼는, 그동안 자족감이 성숙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다르게는 행복의 강도가 점차 쪼그라드는 경우로 볼 수 있겠고, 행복의 포기와 현실에 대한 타협을 내재화한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흥미롭게도 바탕화면에 웃자란 풀이 무성한 봉분 형태의 무덤과 비석이 보인다. 누가 죽었나? 그렇다. 작가는 죽음보다 앞질러 죽음을 상상하고, 생전에 행복했던 순간들을 추억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은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그래서 아마도 행복이란 왁자한 파티에서처럼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손에서 빠져나가는 모래를 바라보는 것과도 같은 자족감의 문제임을 깨닫게 했을 것이다. 그림 우측 상단에 이모티콘이 보인다. 날씨를 표정으로 표시해놓은 것이다. 그날그날의 날씨와 사사로운 기분을 연동시키고, 주관적인 행복을 객관적인 지수로 환원시켜주는 참 친절하고 편리한 장치(감성장치?)다. 지금 세대에게 폰은 세계를 보는 창이다. 세계를 손안에 들고 다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며 세대감정을 추후의 그림에서 주제화하고 본격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손수민. 얼기설기한 전선다발과 함께 삼성마크가 아로새겨진 에어컨실외기가 정물처럼 놓여있는 건물 옥상, 높다란 철골 구조물 위에 그물을 씌워놓은, 군데군데 조준위치를 표시해 놓은 실내 골프연습장, 안전제일이라는 문구가 선명한, 붉은 벽돌의 타공된 구멍을 지지대 삼아 세워놓은 공사장 펜스, 물을 뿌렸거나 뿌릴 호스가 실처럼 누워있는 잔디구장, 그리고 어디에 실제로 그런 게 있나 싶은 쥐구멍을 작가는 그려놓고 있다. 일상 속 정경들이지만 굳이 보려고 하지 않으면 잘 보이지가 않는 정경들이고, 실제로는 하나하나가 치열한 정경들이지만 보기엔 그저 무심한 정경들이다. 그 정경들에서 작가는 어딘가 쓸쓸해 보이면서도 정지된 고요함이 주는 평온함을 느낀다. 임시방편의 것들, 언제든 다른 것으로 대체 가능한 것들, 언젠가 사라질 것들, 없어질 것들, 그리고 그렇게 남겨진 것들에게서 초라한 의미만큼이나 오히려 더 큰 여운의 울림으로 다가온다고 느낀다. 화려한 의미와 초라한 의미, 큰 의미와 작은 의미는 어디서 어떻게 오는가.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여기서 작가는 의미와 권력 문제(누가 의미를 정의하고 분배하는가)를 건드리고, 의미와 관련한 독사와 클리세의 역설(초라한 의미가 오히려 더 크게 다가온다)을 제안한다. 작가는 그렇게 느낀다. 느낀다? 그건 주관적 경험이다. 사물대상에 자기를 이입한, 작가의 세계감정이다. 그러므로 그 정경들은 어쩜 정경을 통해서 정경 자체보다는 정작 작가 자신을 보여주는, 작가의 도시감정을 보여주는, 작가의 또 다른 자화상일 수 있다. 작가의 그림은 세부가 살아있음에도 왠지 희미하고 흐릿하다. 없어질 것들을 대하는 작가의 도시감정이고 세계감정이다. 도시도, 세계도, 자기조차도 없어질 것들이라는 자기반성적 감정을 희미하게, 흐릿하게 그려놓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일상 속 사소한 변화를 관찰하고 채집하는 도시의 산책자(아님 도시의 아키비스트)가 되고, 그리고 그렇게 소위 도시회화의 또 다른 지평을 열어놓는다. 그리고 여기에 발가락에 낀 골프공을 그린 그림이 있다. 위트가 느껴진다. 위트는 작가가 세계를 애정으로 바로보고 있다는 증거로 봐도 되겠다. 

양재윤. 만약 어딘가로 가게 된다면(갈 수 있다면) 현실이 아닌 어떤 곳으로 떠나고 싶다고 작가는 말한다. 작가의 그림은 그 어딘가로 가는 여로를 그린 것이고, 현실이 아닌 어떤 곳으로 떠나는 여정을 그린 것이다. 여로도 길이고, 여정도 길이다. 그리고 길은 전형적인 삶의 메타포다. 작가들마다 차이가 있지만, 그리고 그 나타나는 양상은 저마다 다를 수 있지만, 어떤 작가들에게 삶의 메타포로서의 길을 그리고 여정을 그리고 여로를 그리는 것은 작업의 이유가 된다.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이 작업의 당위성이 된다. 그렇다면 그 길은 어디로 나 있고, 현실이 아닌 어떤 곳이란 어디인가. 작가 자신의 마음속이다. 그래서 작가는 마음의 공간을 그리고, 마음의 모양을 그린다. 마음공간은 양가적이다. 현실이 아닌 어떤 곳인 만큼 비현실적(상상적)이고, 현실이 아닌 어떤 곳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상상은 현실에서의 경험치에 연동되며, 그 구성요소는 결국 현실에서 건너간 것일 수밖에 없다)이다. 그렇게 작가의 마음풍경은 비현실적 공간과 현실적 공간 사이로 나 있고, 상상적 공간과 현실적 공간과의 경계 위로 펼쳐진다. 사이풍경이고 경계 위의 풍경이다. 그래서 애매하다. 잘 모르는 사람들 속에 있는 것처럼 낯설다. 여정의 끝에서 뭘 봤는지, 뭘 보여주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 그 길 위에서 만난 것들, 이를테면 가득 쌓인 나뭇가지, 옷장 안에 숨겨진 돌, 끈으로 동여맨 것들, 빈 의자, 빈 침대, 하얀 보가 드리워진 테이블, 그리고 섬 같은 호수와 드라이플라워가 어떤 인과적 개연성을 가지고 한자리에 있을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제단인가? 번젠가? 정화의식? 추념(뭘 추념하는가)? 지혜의 돌에 대한 알레고리? 데페이즈망(다른, 제3의 관계설정장치)? 브리콜라주(이질적인 것들을 그러모아 그럴듯한 무언인가를 도출하게 해주는 장치)? 그렇게 작가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지워지고 재설정되는, 또 다른 현실을 열어놓는다. 그리고 여기에 말라죽은 꽃 그림이 있다. 식물채집 하듯 종이 한 장에 마른 꽃 한 송이씩을 그려 넣었다. 말라죽은 꽃의 모양이 마음의 모양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처음엔 생생했다가, 점차 시들해졌다가, 종래에는 말라죽는 꼴이 자기를 닮았고, 존재(존재의 유비)를 닮았다고 생각한다. 

정연주.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대인은 자연을 상실했다. 최소한 자연 그대로의 자연, 원형 그대로의 자연을 상실했다. 인공자연, 유사자연, 이미테이션 자연으로 그렇게 상실된 자연을 대신한다. 그리고 그렇게 현대인은 도시인의 생활습속에 맞춰 재단되고 길들여진 인공자연을, 마치 상품과도 같은 맞춤자연을 자연보다 더 친숙하게 느낀다. 하지만 그건 자연 자체라기보다는 어쩜 거세된 자연에 지나지 않는다. 친숙한 자연은 마치 반려동물과도 같아서 사람들의 눈길과 손길이 가닿는 동안만이라는 한정된 유효기간을 가진다. 사람들의 눈길과 손길이 거두어진 반려동물이 그런 것처럼 인공자연 역시 자신을 향하던 눈길과 손길이 끊기면, 마치 그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이내 거세된 자연성을 회복한다. 그렇게 잃어버린 본성을 회복하면서 친근한 자연이 졸지에 낯설어진다. 그걸 작가는 낯선 자연이라고 부르고, 잃어버린 본성을 회복한 자연이 보내는 낯선 시선을 그린다. 이런 낯선 자연이 보여주는 낯선 시선은 간이 벽 사이에 난 틈새로 설핏 보이는 재개발 현장에도 있고, 유휴지에도 있고, 시멘트로 포장된 길섶에도 있고, 심지어 페인트가 벗겨진 철제 펜스로 둘러친 아파트의 외진 구석에도 있다. 저마다 말 못할 속사정(왜 그들을 향하던 눈길과 손길이 거두어졌을까)을 침묵으로서 증언하고 있는 사회적 풍경으로도 볼 만한 풍경들이다. 자연도 아니면서 인공자연도 아닌, 그렇게 졸지에 등록처가 애매해진, 마구 웃자란 이름 모를 들풀들이 하나로 엉켜 잃어버린 본성이며 생명력을 되찾는 풍경들이다. 이로써 낯선 자연을 그린다는 것은 결국 잃어버린 자연의 본성을 되찾아준다는 것이고, 그 생명력을 그린다는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아웃포커스 기법을 통해 이름 모를 들풀을 부각하는 방법으로 본성을 강조하고, 중력에 의해 마구 흘러내리다 맺힌 비정형의 선(사실은 화면을 뒤집어 놓은)을 외관상 중력을 거슬러 웃자라는 것처럼 보이는 들풀들의 생리와 오버랩 시켜 생명력을 강조한다. 그렇게 작가는 낯선 자연을 그린다. 식물들, 그들만의 삶의 현장을 그린다. 

최명원. 작가는 하늘을 그린다. 밑도 끝도 없는, 가없는, 그래서 아득한, 막막한 하늘을 그린다. 그렇게 아득하고 막막한 하늘 속에 구름이 있다. 변화무상한, 그래서 덧없는 구름이 있다. 구름에 대한 지식이 빈약해서 잘 알 수는 없지만, 얼핏 새털구름이 있고 양떼구름이 있고 먹구름이 있다. 일일이 찾아본다면 그 변화무상한 저마다의 형태에 걸 맞는 이름들을 가지고 있을 허다한 구름들이 있다. 그렇게 대개는 올려다본 구름들이지만, 때로 이게 또 다른 별천지지 싶은, 비행기 창으로 내다본 구름도 있다. 하늘을 그린다는 것은 가없는 것, 경계가 없는 것, 가장자리가 없는 것, 그래서 형태로 표현(아님 재현?)할 수 없는 것을 그린다는 것이다. 구름을 그린다는 것은 변화무상한 것, 정해진 형태가 따로 없는 것, 항상적으로 이행 중인 것, 그래서 형태로 특정(아님 한정)할 수 없는 것을 그린다는 것이다. 정색을 하고 말하자면 그 뒤에 공이 있고, 무가 있고, 허가 있다. 그렇게 형상에서 추상으로, 재현에서 관념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하늘이 있고 구름이 있다. 그러나 작가의 그림에서 추상은 그리고 관념은 감지되지가 않는다. 오직 아득한 하늘이 주는 정서적 환기와 변화무상한 구름의 형태가 주는 감각적 재미가 작가의 그림을 견인하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그 다음을 예비해볼 수도 있을 것이지만, 미리 예단할 일은 아니다. 그리고 작가의 시각은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미친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는 곳이라고는 했지만, 정작 수평선이 지워져서 더 아득한, 더 먼 느낌을 주는 그림들이다. 햇살과 물살이 서로 희롱하는, 비늘처럼, 수면에 반짝이는 자잘한 빛 알갱이의 감각적 유희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그림들이다. 더욱이 작가는 흰색을 위해 흰색안료를 쓰지 않고 종이 바탕 그대로를 살려 흰색을 대신한 것이 투명하고 맑은 기운을 더한다. 여기에 화면 아래쪽으로 도시며 숲의 정경이 펼쳐진 작가의 그림은 흡사 사진처럼 보인다. 멀리서 보면 사진이 보이고, 가까이서 보면 그림이 보인다. 미묘한 음영효과가, 화선지의 배면에 스며들면서 번지는 선염효과가, 빛과 어둠의 대비와 풍부한 중간 톤의 분배가 여실한, 그러면서도 투명한 깊이를 머금고 있는 먹색이 감각적 쾌감을 주는 그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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