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한국현대목판화의 개괄적 흐름과 이해

고충환

한국현대목판화의 개괄적 흐름과 이해 


근대목판화 

불교목판화 
유교목판화 
생활 및 계몽목판화 

1960년대 

한국판화협회 
한국현대판화가협회 

1970년대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 

1980년대 

민중목판화 
기행목판화 
이응노의 경우 

현대목판화의 확장과 전개 


근대목판화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소유하고 있는 만큼 판화 중에서도 특히 목판화와 관련된 오랜 전통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 전통은 현재에도 동시대적인 특수성을 반영하면서 그대로 계승 발전되고 있다. 국내에서의 전통판화는 특히 불교와 유교 등 당대적인 종교와 관련이 깊다. 즉 불교의 설법을 그림으로 도해한 변상도 판화나, 삼강오륜 등의 유교의 교리를 그림으로 옮겨 책에다 삽입한 전적판화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그 쓰임새가 더 광범위해지는데, 문자와 그림을 결합한 문자도, 민화를 판화로 제작한 민화판화, 책의 장정을 장식할 목적으로 제작된 능화판화를 비롯해 심지어는 서간지(편지지)를 제작할 때마저 판화가 쓰일 정도였다. 국내에서의 판화는 이런 종교판화와 생활 판화를 비롯해 궁중에서의 각종 의례를 위해 제작된 궁중판화에 이르기까지 대표적인 일상 품목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일제강점기와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대중의 계몽을 목적으로 한 각종 삽화들, 그리고 프로파간다를 위한 각종 포스터들이 판화로 제작되었다. 판화가 사회적 현실과 결부된 최초의 사례로 볼 수가 있겠다. 

1960-70년대 

그렇게 판화가 일상생활의 쓰임새를 위해 제작되는 것을 넘어, 그 자체 조형예술과 장르적 특수성을 의식하고 판화가 제작되기 시작한 것은 1950-60년대 들어서 일이다. 이와 관련해 볼 때 대개 한국판화협회의 창립(1958)에서 한국현대판화의 시점이 비롯했다고 보는 데에 별다른 이견이 없다. 물론 전사가 없지는 않다. 이를테면 1905년 해강 김규진이 석판화로 제작한 시전 <난초>가 있지만, 편지지를 위한 밑그림으로 제작된 것인 만큼 생활 판화로 분류된다. 그리고 이인성이 제작한 목판화(작곡가 박태준의 악보집 물새 발자욱의 표지화)를 비롯해 각종 잡지와 신문, 만화와 만평의 형식으로 다수의 판화가 제작된 사례들이 전해진다. 이런 전사들이 있지만, 처음으로 판화를 구심점으로 한 집단운동의 형식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판화협회의 창립을 한국현대판화의 시점으로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역사는 사실상 한국판화협회를 계승한 한국현대판화가협회(1968년 창립)의 역사이기도 하다. 한국판화협회의 작가들이 한국현대판화 1세대 작가들이라고 한다면, 한국현대판화가협회 작가들은 그 2세대에 해당한다고 볼 수가 있겠다. 
한국판화협회는 1958년 이항성이 창립했다. 이항성은 협회를 창립하고, 같은 해에 제 1회 한국판화협회전을 중앙공보관에서 개최했다. 당시 이항성을 비롯한 유강렬, 이상욱, 김정자, 최영림, 정규, 임직순, 장리석, 변종하, 차혁, 박성삼, 박수근, 최덕휴, 전상범, 이규호 등이 창립회원으로 참여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항성(석판화)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작가들이 목판화를 제작 전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본격적인 판화제작이 어려운 당시의 열악한 여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이면에는 오랜 목판화의 전통에 대한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공감이 작용했으리라 짐작된다. 
그 대략을 보면 목판의 무늬를 그대로 살려낸 유강렬의 목판화에서는 전통적인 서체의 자유분방한 변형이 돋보이며, 닥지에 찍어낸 이상욱의 목판화는 심플하면서도 서정적인 화면이 특징이다. 향토성 짙은 최영림의 목판화는 일본 태평양 미술학교 유학 시절, 당시 일본의 목판화가 무나카타 시코의 영향을 반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리 부는 소년과 나체의 여인들이 어우러진 목가적인 전원 풍경화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각각 1934년과 40년에 일본창작판화가협회전에 입선하기도 한 그는 국내 최초의 현대판화작가로 평가된다. 또한 1956년 국내 최초로 목판화 개인전을 개최하기도 한 정규의 목판화는 심플한 구성과 회화성이 두드러져 보이는 화면이 특징이다. 그리고 박수근의 목판화는 한국에서 가장 흔한 석재인 화강암의 표면질감과 나목(헐벗은 나무)으로 특징되는 그의 회화에서와 같은 당시 한국의 서민적 삶의 한 전형을 예시해주고 있다. 우둘투둘한 표면질감과 굵고 간략한 선으로 축약된 인체 표현을 통해 그의 목판화는 자신의 회화와 마찬가지로 한국적인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경우로 생각된다. 
한국판화협회는 이후 정기적인 협회전과 함께, 1968년에 처음으로 개최된 이후 1975년까지 존속된 신인 공모전을 통해 송번수, 이승일, 김진석, 김태호, 백금남, 이인화 등 차세대 판화가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목판화를 중심으로 그 경향을 보면 이승일은 목판에 나타난 나뭇결을 그대로 떠낸 릴리프판화에다가 꽃과 인물 등의 형상을 채색으로 그려 넣은 일련의 작업을 보여준다. 그렇게 펄프릴리프와 실크스크린을 혼용한 판화로 공(空)의 정신세계를 표상한다. 그리고 이인화는 회화의 자율성과 목판 고유의 물성을 극대화한 목판화를 선보이고 있는데, 에너지의 방출이 느껴지는 목판화가 추상화적인 감수성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1970년에는 동아일보가 창간 50주년을 기념해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를 창설했는데, 그 첫 회 수상자로 김상유가 선정되었다. 김상유는 정상적인 미술교육을 받지 않고 독학으로 판화를 습득했다는 점에서 한국현대판화사에 있어서 특이한 존재로 생각된다. 대상을 수상한 작품 <출구 없는 방>은 실크스크린과 목판화 기법을 혼용한 것으로서, 흑백의 모노톤의 화면에 담아낸 함축적이고도 강렬한 이미지가 암울했던 당시 시대적 정황에 대한 보편인식을 엿보게 하는 한편, 이로써 인간 실존의 부조리함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이 평가받았을 것이다. 이외에도 그는 마치 전통적인 문양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일종의 모자이크를 보는 것 같은 에칭 동판화를 내놓고 있는데, 이로부터 소박하고 고답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런가하면 연못을 끼고 있는 정자 한가운데 정좌해 있는 노인(아마도 작가 자신의 초상일 듯싶은)을 소재로 전통적인 선비 정신의 한 전형을 예시해준다. 그리고 포토스크린 판화 <판토마임>으로 2회 대상을 수상한 송번수는 이후 근작에서 주로 페이퍼캐스팅을 통한 가시나무 형상을 다양한 형식으로 변주해오고 있다. 

1980년대 

민중목판화  

국내적으로 1980년대는 모노크롬과 개념미술로 대변되는 제도권미술과 현실참여에서 예술의 존재이유를 찾는 민중미술과의 이념대립이 첨예화된 시기였다. 당시 현실참여를 위한 표현도구로서 벽화와 걸개그림 그리고 특히 민중목판화운동이 꼽힌다. 
민중목판화와 관련해서는 오윤을 대표작가로 거론하는 것에 별다른 이견이 없을 것이다. 오윤이 제작한 판화는 널목판 형식의 목판화(우드컷)와 일부 고무판화(리놀륨) 작업들이다. 선을 위주로 하고 있으며, 동시에 여백의 묘미를 최대한 살리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선이 굵고 각이 뚜렷하며 목판 특유의 칼 맛이 여실해서 전체적으로 힘이 넘치면서도 유연한 선이 감지된다. 여백과 모티브 부분을 하나로 넘나드는 호흡으로부터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며, 이로써 이념성(메시지)과 도상성(전형성)이 강하게 부각된 인물 표현을 낳고 있다. 소재를 중심으로 판화를 보면 대략 당대적인 시대정신에 기초한 도상성과 전형성이 강하게 표현된 판화, 춤사위나 풍물 등 세속적인 풍속을 소재로 한 전통적인 놀이문화에 대한 공감과 해학과 신명을 표현한 판화, 새 등의 자연 소재를 끌어들인 자연 친화적이고 정적이며 서정적인 판화, 그리고 말년의 도깨비를 소재로 한 판화 정도로 구분된다. 원래 조각을 전공한 작가가 정작 조각보다는 판화에 주력하게 된 이유는 아마도 판화가 갖는 특징 즉 특정의 이념을 보다 손쉽고 효율적으로 표현하고 전달하고 소통하게 해준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그의 주요 판화 작품들 대개가 유명을 달리하기 불과 수년 내에 집중적으로 제작된 것들이어서 그런지 어떤 응축된 힘이 느껴진다. 그 힘의 이면에는 한의 정서가 면면히 흐르고 있다. 그의 목판화가 하나같이 힘이 넘치면서도 유연성을 잃지 않는 것은 그 힘이 이렇듯 한의 정서적인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작가의 목판화는 일종의 정한의 미(한을 자기 내부로 불러들여 정조화한)로 정의할 만한 미적 감수성의 한 경지를 예시해준다. 
그리고 오윤과는 일정한 시차를 갖는 것이지만, 이념면에서 생각을 같이하고 있는 경우로서 작가 정원철이 주목된다. 정원철은 리놀륨 판화 <대석리 사람들>과 위안부 할머니들을 소재로 한 <초상> 시리즈를 통해 보통 사람들의 초상의 한 전형을 제시한다. 이를테면 개인사 즉 개인의 삶의 역사가 집약된 일종의 상징이자 기호이며 삶의 지도로서의 초상이 갖는 주제의식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작가의 판화를 특징짓는 요소로서 초소형 핸드드릴에 의한 경직되지 않으면서도 대상의 세밀한 부분까지를 포착해내는 특유의 선묘를 들 수 있다(박영근 역시 초소형 핸드드릴을 이용해 특유의 초상표현을 보여주고 있다). 조각칼에서는 느낄 수 없는 속도감이 회화적 깊이를 더할 뿐만 아니라 유기체의 생리를 그대로 닮은 유연한 선묘와 스크래치가 초상에 각인된 삶의 상처를 드러낸다. 그리고 다른 작업에서 초상을 도장 또는 지문으로 대체하기도 하는데, 도장으로 대변되는 사회적 혹은 신분적 주체와 지문으로 대변되는 생물학적 혹은 생체적 주체로 주체의 개념을 확장하고 있다. 그리고 근작에서 작가는 기존의 초상과 함께 환경과 생태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기도 하는데, 어느 경우이건 작가의 초점은 현실주의 미학에 바탕을 둔 리얼리티의 실천에 맞춰져 있다. 

기행목판화 

이처럼 1980년대 민중미술과 함께 민중목판화운동이 시대적 이념을 견인했던 사실은 알려진 대로이다. 아마도 소통의 매개체로서의 목판화가 정점을 찍었던 시기로 봐도 될 것이다. 그러나 이후 첨예한 이념대립의 시대를 지나쳐온 이후에 당시의 민중목판화운동을 견인했던 목판화가들(이를테면 김봉준, 김진하, 김억, 김준권, 남궁산, 류연복, 이철수, 이인철, 정비파, 홍성담, 홍선웅)의 정체성도 덩달아 변화를 강요받는다. 현재 이 일군의 작가들은 당시의 민중목판화운동의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변화된 시대환경에 걸 맞는 자기변신을 꾀하고 있다. 
그 대략을 보면 유명무명의 문화유적지를 답사하고 그 인상을 그림으로 옮겨 그린, 삶의 터전으로서의 환경에 그 맥이 닿아 있는 생태주의와 지역주의에 대한 관심을 표현한 기행 혹은 생태목판화(류연복, 홍선웅, 김억, 김준권, 정비파), 전통적인 민화를 차용해 현대적인 어법으로 각색한 민화풍의 목판화(오경영), 도가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는 간결한 묘사와 경구가 함축적인, 삶의 성찰에서 유래한 경구를 축약된 표현과 문기(文氣)가 있는 화면에 담아낸 선적인 목판화(이철수) 등 다양한 형태를 보여준다. 대개는 생태주의와 기행 목판화가 변주된 주제의식의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는 경우들이 많다. 여기에 특이한 경우로서 장서표(남궁산)를 들 수 있다. 장서표는 책의 표지나 뒷면 또는 안겉장에 붙여 책의 소장자를 밝히는 일종의 소형판화의 한 형식으로서, 문자와 그림의 조화로운 결합을 그 기본으로 한다. 예로부터 전래하던 장서인이 더 예술적인 형태로 가공되고, 그 자체 독립된 장르로서 정착된 경우랄 수 있겠다. 
이 가운데 김준권의 수성 혹은 수인목판화는 종이에 스며드는 성질과 번짐 효과로 인해 투명하고 맑은 느낌을 주며(이에 반해 유성안료는 종이에 일종의 피막을 형성시키는 불투명성이 특징이다), 그 질감이나 색감이 흡사 전통적인 수묵화를 떠올리게 한다. 종이에 스며들어 종이와 안료가 일체를 이루는 침윤성과 이로 인한 투명하고 깊은 발색이야말로 수성목판화만의 특징이며 묘미일 것이다. 지금까지 중국의 전통적인 목판화 기법인 수인목판화 기법을 구사해온 작가는 근작에서 새로이 수묵목판화 기법을 고안해 제작한 목판화를 선보인다. 선명하면서도 맑고 투명한 느낌을 주는 색감이 진천(현재 작가의 작업실이 자리하고 있는) 고유의 첩첩히 중첩된 산세를 더 아득하게 만든다. 그리고 김억의 판화는 지도를 연상시키는 세밀 목판화가 특징이며, 항공 지도를 연상시키는 산세의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생생한 묘사가 겸재 정선의 진경정신을 이어받고 있는 진경목판화의 한 가능성을 예시해주고 있다. 

이응노의 경우 

한편으로 한국현대목판화사와 관련해볼 때 고암 이응노의 존재는 그의 회화적 성과 못지않게 지대한 것으로 보이고, 그런 만큼 한국현대목판화사의 공백을 채울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고 생각한다. 
주지하다시피 이응노는 1958년 도불해 파리에 정착한 후, 1989년 호암미술관 초대전시에 참석하지 못한 채 파리 현지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둔다. 그동안 1967년 동베를린(혹은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2년 6개월 옥고를 치른 것 외에 사실상 국내에 정착한 적이 없다. 작가는 투옥된 와중에도 종이, 천, 돌멩이, 비닐, 은박지, 밥알과 신문지를 반죽한 재료로 작품을 제작했고, 당시 제작된 작품을 따로 옥중미술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후 백건우 윤정희 납치사건에 휘말리는 등 작가는 윤이상과 함께 왜곡된 정치적 현실의 희생양으로서의 삶을 감내해야 했다. 그런 만큼, 아니 그래서 오히려 더 망향의 한이 남달랐던 것 같고, 도불 이후의 형식파괴의 와중에도 도불하기 전의 한국화에 대한 뿌리근성이 작업의 밑바닥에 면면히 흘렀던 것 같고, 그 뿌리근성을 자양분 삼아 동서양을 아우르고 뛰어넘는 독자적인 형식으로 우뚝 설 수 있었을 것이다. 
자료를 보면 1969년에 프랑스 누벨 이마쥬 출판사에서 고암의 옵셋 판화집을 제작했고, 1973년에는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이 주최한 <현대판화전>에 초대 받았으며, 1977년에는 고암이 가르치던 동양미술학교 수강생들의 전시를 위해서 개설한 파리 고려화랑(부인 박인경 여사가 운영한)에서 <이응노 판화전>이 열렸던 것으로 나와 있다. 여기에 파리 국립도서관 전시에 초대 받은 것(전통적으로 유럽에서는 판화관련 주요 전시들이 곧잘 미술관 대신 도서관에서 열린다), 그리고 비록 옵셋이긴 하지만 개인 판화 모음집이 출간된 것 등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판화는 고암 작업세계의 뚜렷한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주제별로 그 경향을 보면 주로 70년대 제작된 구성 시리즈(도불 직후인 60년대의 자유분방한 형식의 한지 콜라주를 본격적인 문자추상으로 발전시킨)와 80년대 제작된 군상 시리즈(광주민주화항쟁과 같은 한국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현실에 대한 응답으로 내놓은, 그러면서도 시대상황을 초월해 인간 일반의 보편적인 존재론적 조건을 표상한), 이렇게 두 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기타 오리와 난 같은 동식물을 소재로 한 경우와 현액(현판에 새긴 글씨)을 위한 일종의 문자도(대개 4자의 한문자로 된)를 소재로 한 경우들이 확인된다. 특이한 것은 구성 시리즈나 군상 시리즈 할 것 없이 시리즈 명 앞에 한문으로 試作(시작)이라고 병기한 경우들이 많은데, 아마도 시험쇄(A.P 곧 아티스트 프루프)에 대한 작가 식의 표기법일 수도 있고, 이로써 판화라는 특정 장르 이전에 작가의 작업 전반에 나타난 간단없는 형식실험이 현재진행형임을 암시하고 강조한 것일 수도 있겠다. 
판종으로는 단연(혹은 아예 전체가) 목판화가 많고, 목판화 중에서도 일반적 경우인 널목판(종단면으로 자른 판목을 사용한 경우로서 칼이 지나가면서 남긴 뚜렷하고 힘찬 자국이 특징인)의 경우가 많다. 판목으로는 송판과 합판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송판이 고른 칼자국을 보여주는 것에 반해, 합판은 그 결과 가장자리 선이 거칠게 떨어지면서도 강한 질감을 떠올려준다. 대개는 단색 목판화로 제작된 경우가 많고, 더러 다색 목판화가 확인된다. 대개는 유성잉크 대신 전통적인 수성 먹을 사용해 찍은 탓에 마치 먹그림처럼 부분적으로 번지는 효과가 엿보인다. 곧잘 판화를 찍은 연후에 그 위에 가필을 하는가 하면, 판화로 찍어낸 부분 이미지를 다른 종이에 올려붙인 일종의 콜라주 형식의 경우도 확인된다. 먹이 번지는 것이나(물론 먹이 번지는 효과를 살리면서 에디션을 찍어내는 중국의 수인목판화의 경우가 없지 않지만) 가필하는 것, 그리고 특히 콜라주는 애초에 에디션을 염두에 둔 경우로는 보기가 어렵다. 판화의 형식에, 그 장르적 특수성에 구애받지 않고 있음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이처럼 구성 시리즈(문자추상)와 군상 시리즈로 나타난 일련의 판화 작업들은 다만 매체가 달라진 것을 제외하면, 작가의 다른 작업들(회화)과 그 생리가 크게 다르지가 않다. 서체에서 촉발된 계기가 문자추상을 낳은 것에서도 엿볼 수 있듯 그의 판화는 칼리그래프(서체추상) 같고 먹그림 같다. 이처럼 작가의 파리 시절에 뚜렷한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판화를 계기로, 향후 한국근현대 판화사 혹은 목판화사의 공백을 메우는 일이 우리의 과제로 주어진 것 같다. 판화에 한정된 경우는 아니지만, 국내외적으로 문자추상을 변용한 적지 않은 예들이 발견되고 있어서 그만큼 작가와의 영향관계를 따져 묻게 하는 근거들이 있다. 

현대목판화의 확장과 전개 

여기에 목판화를 계기로 뚜렷한 자기세계를 구축한 작가들이 있다. 많은 작가들이 있을 것이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경우로 치자면 김형대와 김상구 그리고 강행복이 주목된다. 김형대는 목판 고유의 나뭇결을 조형화하는 방법으로, 김상구는 널목판 고유의 칼 맛을 살린 특유의 화면구성과 서정적인 분위기가 돋보이는 경우로 목판화의 한 전형을 예시해주고 있다. 그리고 아티스트북은 목판화를 확장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와 관련해 강행복은 아마도  왕성한 활동과 함께 가장 완성된 경우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례적인 경우로 이경희의 우드인그레이빙이 주목된다. 주지하다시피 목판화는 크게 널목판과 눈목판으로 구분된다. 널목판이 나무의 종단면을 판목으로 사용한다면, 눈목판은 나무의 횡단면을 판목으로 사용하는 점이 다르다. 나무의 횡단면은 종단면에 비해 목질이 단단하고 치밀해 거의 세밀 동판화와 흡사한 세부묘사를 가능하게 한다. 때론 돋보기를 통해 보면서 이미지를 새겨야 할 만큼 섬세하고 정치한 묘사가 요구되는 탓에 작가 층이 두텁지는 않다. 작가는 이런 우드인그레이빙에 주력해온 국내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작가로서, 이를 통해 그만의 독특한 판화세계를 전개하고 있다. 미의식 면에서 일종의 초현실주의와 싱징주의를 전용하고 변용하는 과정을 통해서 작가만의 판타지를 열어 보인다. 그 비전은 무의식의 지층으로부터 길어 올린 것인 만큼 의식세계와는 그 존재양태가 다르다. 그 비전은 친근하면서도 낯선데, 그것이 친근한 것은 그 모티브들이 알만한 것들이라는 점이며, 낯선 것은 그럼에도 이처럼 알만한 이미지들이 관계 맺고 결합되는 낯 설은 방식이며 예기치 못한 방식 탓이다. 이처럼 친근하고 낯 설은 이미지가 존재의 이중성(그리고 다중성)을 열어 보이며, 이로써 끝이 없는 이야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것만 같은 서사구조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인 비전을, 꿈과 판타지의 세계를 열어 보인다. 
목판화의 확장가능성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경우가 있다. 한국화 베이스를 가지고 있는 작가들의 목판화인데, 이상국, 유근택, 강경구 그리고 이동환(최근에 목판화집, 칼로 새긴 장준하를 펴낸) 같은 작가들이 그렇다. 목판화도 선 위주고 한국화도 선 위주다. 여백을 중요한 표현수단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도 동일하다. 여기에 먹과 한지를 주요 재료로서 공유하고 있는 것도 같다. 차이점으로 치자면 붓이 칼을 대신하고 칼이 붓을 대체하는 것이 다르다. 붓질처럼 칼질을 하고 칼처럼 붓을 사용한다고나 할까. 형식적으로나 생리적으로 서로 부합하는 면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렇담 이번엔 칼 얘기를 해보자. 목판화에서 칼은 결정적이다. 그렇다면 목판화에서 칼은 어떻게 확장될 수 있는가. 앞서 살핀 것처럼 정원철과 박영근의 초소형 핸드드릴을 들 수가 있겠고, 임영길의 레이저커팅이나 정상곤의 프로토에칭 그리고 안정민의 경우가 주목된다. 
전통적인 도상을 이용한 현대적인 재해석에 천착해온 임영길은 그동안 12지신 시리즈, 4원소 시리즈, 그리고 5독부 시리즈를 제작한 바 있다. 그 중 4원소 시리즈를 보면, 세계의 4대 근원물질로 여겨지는 흙, 물, 불, 공기를 소재로 한 철학적 사유를 전개해 보인다.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사유와 4원소설이 만나지는 접점에 대한 모색을 통해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에 대한 성찰을 예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5독부 시리즈를 보면, 각 두꺼비, 지네, 거미, 뱀, 전갈과 같은 그 속에 독을 포함하고 있는 동물을 소재로 한 것으로서, 이 동물들이 예상되는 나쁜 일을 미리 막아준다는 민간신앙에 착안한 것이다. 이 모든 판화들을 작가는 컴퓨터를 이용한 레이저커팅 기법으로 제작했다. 레이저커팅 기법에 의한 세밀 목판화와 디지털 이미지를 중첩시킨 그의 판화는 전통적인 소재와 현대적인 기법과의 결합 가능성을 예시해주고, 이로써 전통적인 소재가 여전히 유효하다(새로운 의미를 덧입고 재생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작가는 이 소재를 판화로 찍어내기도 하고, 아티스트북 형식으로 묶어내기도 하고, 여러 부수적인 오브제와 함께 설치하는 등 다변화하는 과정을 통해서 판화의 소통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한편, 형식적으로도 판화의 확장을 꾀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상곤의 프로토에칭은 비록 동판화로 제작된 것이지만, 사실은 목판화에도 적용할 수 있다. 컴퓨터에 새기고 싶은 이미지 값을 입력하면 프린트가 대신 판을 만들어주는 것이 작가가 직접 판을 만드는 일반적인 경우와는 다르다. 작가는 진작부터 컴퓨터를 판화에 도입해왔는데, 흔히 그렇듯 아날로그 방식을 디지털 방식으로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을 아날로그 쪽으로 수렴해 들이는 식의 일종의 역 확장 방식이 흥미롭다. 중요한 건 디지털의 완벽한 기술적 구현이나 실현이 아니다. 그렇다면 작가의 기술은 애초에 관련분야 전문가의 경쟁상대가 되지 못한다. 결국 중요한 건 기술의 인간화(인간적인 기술)에 대한 형식실험이다. 디지털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그리고 이를 통해 판화의 표현 영역을 어떻게 확장시킬 수 있는가와 관련해서 시사해주는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런가하면 안정민의 목판화는 여성적인 감수성보다는 남성적인 힘이 느껴져서 성별과 관련한 선입견을 무색하게 만든다. 그의 목판화는 목판화와 관련한 선입견과도 사뭇 혹은 많이 다르다. 목판도 틀리고 칼도 틀리고 판법도 다르다. 이런 다른 판법으로 작가는 자신만의 독특한 목판화를 예시해주고 있고, 이로써 목판화의 표현 가능성을 확장시키고 있다. 이를테면 작가는 보통의 목판 대신 베니어합판을 판목으로 사용한다. 여기에 날이 주걱처럼 생긴 칼을 손아귀에 움켜잡고 사선으로 그어 내리는 방식으로 이미지를 묘사한다. 그러면 합판의 결이 찢어지면서 이미지가 새김질 된다. 이때 그 결이 어떻게 얼마만큼 찢어질지는 알 수가 없다. 칼이 지나가는 자리는 계획하고 통제할 수 있지만, 칼이 지나가면서 찢어지는 자국은 예측할 수가 없다. 그렇게 작가의 목판화에는 우연성과 필연성이 상호작용하고 묘사와 표현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그렇게 작가의 목판화는 마치 상처를 즉물적으로 옮겨놓은 것 같은 마구 찢어진 자국이 여실하다. 아마도 작가는 이런 찢어진 자국이 주는 여실한 상처에, 마치 감정을 가감 없이 직접적으로 표출한 것 같은 질감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거칠고 강렬하고 서정적인 느낌을 준다. 판화면서도 회화적인 분위기가 물씬하다. 간접표현매체인 판화를 직접표현매체인 회화로 확장시켜놓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작가의 작업은 목판과 칼을 도구로 한 전통적인 목판화에 충실하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형식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실리콘캐스팅 작업을 보면, 주로 눈 덮인 도시의 고즈넉한 정경이나 물보라를 일으키며 떨어지는 폭포 등 일련의 풍경을 소재로 한 작업에서 작가는 원하는 이미지를 목판으로 제작한다. 그리고 그 형태 그대로 실리콘으로 떠낸 것인데, 실제로는 실리콘을 겹겹이 발라 일정한 두께를 갖는 투명한 패드를 얻는 식이다. 실리콘으로 떠낸 탓에 세부가 살아있고 섬세하다. 마치 반투명한 살갗(혹은 피부)의 이면에서 은근하게 내비치는 것 같은 은회색의 부드러운 색감과 함께 촉각적인 성질마저 감지되는 편이다. 베니어합판에 주걱 칼로 찍어 내리듯 제작한 목판화가 내적 파토스의 가감 없는 표출과 함께 남성적인 힘을 느끼게 한다면, 실리콘패드로 떠낸 목판화는 한결 섬세하고 부드럽고 은근한 여성적 미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실로 감각의 양 극단을 자유자재로 소화해내는 작가의 폭넓은 역량이 읽혀지는 대목으로 봐도 되겠다. 
이외에도 판화이면서도 마치 회화와도 같은 물성과 밀도감을 보여주는 소멸법(김익모, 임영재, 박구환), 페이퍼캐스팅(이혜영)과 실리콘캐스팅(안정민), 설치판화(이은희), 먹지를 대고 그린 그림으로 프린트 과정을 대신한, 이로써 프린트의 개념이며 방법론을 확장시킨 경우(홍인숙, 김미로), 일종의 사진전사기법을 전용한 경우(배남경), 그리고 서사의 확장(숲 사람으로 대변되는 그 자체 순례자로 볼 법한 고유의 캐릭터를 통해 신화적인 서사의 가능성을 예시한 윤여걸, 바람과 같은 비물질 요소를 소재로 서사의 폭을 넓힌 이하나, 패러디 곧 차용을 매개로 서사를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예시한 민경아)이 주목된다. 각각 목판화에서 파생되거나 목판화를 확장하는 과정을 통해 뚜렷한 자기형식에 이른 경우라고 생각된다. 
이 가운데 사진을 목판화로 재현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는 배남경의 경우가 흥미롭다. 작가의 작업은 흔히 사진의 질감(혹은 생리)과 목판화의 질감(혹은 생리)이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다는 선입견을 재고하게 만든다. 작가의 판화는 색 바랜 흑백사진을 보는 듯 아련하고 아득하다. 신기루를 보는 듯 흐릿하고 모호하다. 언젠가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이 비현실적인 아우라로 그림을 감싼다. 실체감이 희박한 만큼 오히려 암시력이 강조되는 편인데, 보는 이로 하여금 저마다의 감성의 결에 따라서 그림에 참여하고 향유하도록 유도하는 열린 그림을 예시해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보통 판화에서 사진의 차용은 흔히 사진제판법으로 알려져 있다. 석판화와 공판화(실크스크린)를 비롯한 동판화에서는 흔한 일이지만 목판화에서 사진제판법을 차용하는 경우는 이례적인 만큼 성공적인 경우도 드물다. 아마도 그 구조가 성근 목판에다가 사진을 전사하기가 용이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지난한 형식실험을 통해서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 독특한 색감이며 질감이 우러나는 목판화를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판법을 목판평판법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목판화에서 필수과정인 판각 곧 새김질 없이 석판화처럼 평판으로 찍어낸다고 해서일 것이다. 여기에 먹과 한국화 물감을 사용해 한지의 배면에 충분히 스며들게 하는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한국화물감을 수차례 반복 중첩시킨 그의 판화에서는 마치 수묵화를 보는 것과 같은 먹의 색감이며 질감이 느껴진다. 색 바랜 흑백사진을 보는 것 같은 시간의 결이 느껴지고, 그림의 표면 위로 부각된 나뭇결에 그 시간의 결이며 존재의 결이 고스란히 중첩돼 보인다. 
작가는 자신의 그림을 도시의 그림자라고 부른다. 사진은 도시적인 미디어다. 그리고 목판화는 아날로그적인 미디어다. 어쩜 이질적일 수 있는 이 두 미디어를 합체해 무미건조한 도시를 존재의 희미한 그림자며 흔적으로 변화시킨다. 그 과정에서 사진을 피와 살이 통하는 따뜻한 미디어로 전이시킨 것에 작가의 남다른 해석이 있고 개성이 있다. 

일반적으로 판화는 版畵로 표기한다. 판을 매개로 한 그림을 의미하며, 회화의 직접성에 비교되는 판화의 간접성을 강조하는 의미를 포함한다. 이처럼 판화와 관련해서는 版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보편화돼 있지만, 이와 함께 더러 板이란 용어를 사용해 판화를 板畵로 표기하기도 한다. 이 표기 속에는 한중일 동양 3국의 판화와 관련한 전통적 이해와 특수성이 내재돼 있다. 즉 지금 시각에서 볼 때 목판화는 다양한 판종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지만, 전통적으로 동양에서 판화라고 한다면 당연히 목판화를 의미했기에 판화를 이렇게 표기한 것이다. 그 표기 속엔 말하자면 서양과는 다른 동양의 전통에 대한 차이의 인식과 함께 정체성 인식이 들어있다. 이를테면 적어도 목판화에 관한한 그 뿌리는 동양이라는 식의. 
마지막으로 한국현대목판화의 미래를 열어갈 유의미한 계기로서 국내 유일의 판화전문 미술관을 표방한 진천생거판화미술관, 전국에 흩어져 있는 목판 화가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한편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는 한국현대목판화협회의 창립, 그리고 한국목판문화원과 울산국제목판화비엔날레가 주목된다. 이 가운데 2017년 한국목판문화원이 개설한 목판대학은 일반시민(혹은 지역민) 중심의 커뮤니티아트와 탈작가주의를 표방하는 일종의 대안학교로 보인다. 현재 안성(제1스튜디오)과 진천(제2스튜디오) 그리고 서울(나무화랑), 3도시를 유기적으로 연계한 레지던시 형태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판화제작 수업과 함께 그 성과를 모아 최종적으로 전시와 도록을 발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교수로는 목판화가 6명(김준권, 김억, 윤여걸, 류연복, 정비파, 이윤엽)과 미술평론가 1명(김진하)이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2012년 시작해 작년(2018)까지 총 7회에 걸쳐 열렸던 울산국제목판화페스티벌을 올해 개명 확장시킨 울산국제목판화비엔날레는 처음에는 한중일 3국을 중심으로 시작했지만, 이후 점차 참여 국가를 다양화함에 따라 참여 작가 수도 덩달아 확장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렇게 올해 전시에는 11개국에서 70명의 작가가 참여해 총 120점에 달하는 작품을 출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