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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길영/ 확장된 회화, 연장된 조각으로서의 세라믹워크

고충환

정길영/ 확장된 회화, 연장된 조각으로서의 세라믹워크 


정길영은 원래 회화를 전공했다. 그리고 뒤늦게 흙을 만났다. 그렇게 물을 만났다. 바로 이거다 싶었다. 스스로 물 만난 물고기를 직감했다. 처음부터 형식에 구애받을 필요도 부담도 없었다. 그림도 본성에 부합하지만 흙은 더 부합했다. 본성이란 천성적으로 타고난 자질을 말한다. 그건 보통 예술가적 자질을 말하지만, 원래는 어린아이의 자질에 가깝다. 그렇게 어린아이들은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면서 놀고, 흙으로 형태를 만들면서 큰다. 이런 유희와 놀이에서 예술이 유래했다. 그러므로 어쩜 예술가적 자질 속엔 이런 어린아이의 본성이 여전히 살아있다. 다시, 그러므로 어쩜 예술이란 이런 잠재적인 본성을 발굴하고 캐내는 행위일 수 있다. 저마다 자기 내면에 잠자는 어린아이를 일깨우는 것이다. 때로 천진해 보이는 작가의 작업이기에 더 그렇다. 
그에게 도자는 회화의 확장이었다. 회화적 감수성이면 충분했다. 조각적 감수성이며 도자를 위한 감각이 따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림을 그리듯 도화를 그렸고, 점토를 가지고 놀듯 도조를 조각했다. 질 들뢰즈는 파괴하면서 창조하는 것에 예술의 특수성이 있다고 했다. 굳이 들뢰즈가 아니더라도 파괴를 통한 창조 곧 창조적 파괴에서 예술의 덕목이며 본성을 본 예는 많다. 도자에 관한한 작가에게 파괴할 형식이 따로 있을 수는 없었다. 처음부터 형식에 구애받을 필요도 부담도 없었던 만큼 형식파괴는 저절로 이루어졌다. 물론 그 와중에 특히 기술적인 측면과 관련한 지난한 형식실험의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작업 어디에도 그 지난함은 보이지가 않는다. 다만 자유분방한, 자연스러운, 그리고 때로 천진무구한 예술적 자질이 느껴질 뿐. 아마도 예술적 자질로 지난한 형식실험의 과정을 넘어섰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도화 속에, 도조 속에, 생활자기 속에 어린아이의 본성을 녹여냈다. 때로 도화와 도조와 생활자기가 그 경계를 허물고 혼성되는 자기만의 형식 속에 예술가적 자질을 우려냈다.    

다른 작업들도 그렇지만, 작가의 작업 중 특히 도판 작업이 회화적이다. 아마도 도판 자체를 사실상 그림을 위한 회화적 평면이 확장된 경우로 볼 수 있다는 점과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그런 만큼 도판 위에 그린 또 다른 그림으로 볼 수가 있겠다. 그 대략을 보면 주로 청화백자를 변용한 경우가 많고, 더러 소금유를 적용해 그린 경우가 많다. 백자도판 위에 청화로 그린 그림들이며, 백자소지 위에 소금유로 그린 그림들이다. 그 중 소금유로 그린 그림은 마치 토기항아리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입자가 굵고 거칠거칠한 질박한 표면질감으로 청화로 그린 그림과는 사뭇 혹은 많이 다른 느낌을 준다. 자연 청색 조(청화)와 갈색 톤(소금유) 위주의 모노톤으로 나타난 색채감정이 금욕적이고 세련된 인상을 준다. 이처럼 색채감정으로 치자면 모노톤이 절대적이지만, 그렇다고 원색의 사용을 주저하지도 않는다. 이따금씩 노란색과 빨간색의 부분적인 도입이, 그리고 더러 수금 처리한 부분의 강조가 자유분방한 색채감정과 함께 꼭 필요한 만큼의 장식성으로 작업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그렇게 화면 위를 거침없이 내지르는 활달한 붓질과 분방한 필치가, 그리고 대개는 모노톤의 그리고 여기에 자유자재한 색채감정이 어우러진 그림이 흡사 먹으로 그린 서체추상을, 전통적인 수묵화의 현대적 변용을, 그리고 문인화의 현대판 버전을 떠올리게 만든다. 일종의 드로잉 감각에 의해 지지되는 그림이 표현주의(그리고 추상표현주의)를,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그림(소박파의 한 경우?)을, 그리고 좀 더 현대적인 경우로는 그라피티를 소환해 자기화한 생생한 과정이 느껴진다. 하나같이 몸이 부르는 대로 그린 그림이고, 감각이 이끄는 대로 그린 그림이고, 감정 아님 예술가적 기질 그러므로 어쩜 어린아이의 본성에 충실한 그림들이다. 그 그림 속에 배와 집이, 새와 강아지가, 그리고 사람과 같은 알만한 형상이 들어앉으면서 일종의 내면풍경을 열어놓는다. 그리고 여기에 대개는 그 자체 무의미한 숫자, 기호, 문자, 기하학적 형태, 땡땡이 문양, 그리고 우연을 가장한 비정형의 얼룩이 어우러져 일상이 열리고 서사가 열린다. 특히 간밤에 눈이 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행복은 좁은 문을 통해 들어오네, 와 같은 경구적 문자에서는 평소 삶에 대한 작가의 소소한 철학이며 생활감정이, 자기에게 거는 주술이, 그리고 여기에 작업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가 묻어난다. 보기에 따라선 작가가 열어 보이는 내면풍경과 함께, 그 자체 작가의 주제의식이 불현듯 표출되고 반영된 대목으로 봐도 되겠다. 
이 일련의 작업들에서 작가는 도예와 회화의 접점 가능성을 실험한다. 보통은 도판 위에 직접 그림을 그리지만(도자회화), 때로 따로 만든 도자 오브제를 그림 위에 부착하기도 하고(오브제를 통한 회화의 확장), 경우에 따라선 사람과 같은 특정 형상 그대로 도판을 잘라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식의(평면부조 형식의 도입) 다변화를 꾀한다. 그렇게 작가에게 도판은 말하자면 일종의 확장된 화면이며, 회화적 표현을 증폭시켜주는 계기가 된다. 추상과 형상, 관념적 실재와 감각적 실재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일종의 회화적 드로잉이 자기를 실현하는 장을 열어놓는다. 

그리고 도조와, 그 자체 일종의 독립된 조각이면서 작은 조각이랄 수 있는 생활자기가 있다. 작가는 진즉에 도자를 회화의 확장된 경우로 본 만큼이나 조각의 연장으로 보기도 했다. 그 대략을 보면 꽃을 든 남자와 연인들 같은 아마도 익명적인 주체들이며 선남선녀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반영하고 있을 군상들, 신라 토우와 마리노 마리니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기마상들(말 탄 사람이 창 대신 숟가락을 들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해학적인 면과 함께 오브제의 도입으로 표현을 확장하는 것이 주목된다), 그리고 여기에 우화적인 경우로서 거대한 토끼 형상이, 그리고 신화적인 경우로서 마두인간이 주목된다. 아마도 현대인의 우울한 초상에 대한 알레고리며, 현대판 미노타우루스의 변형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뿔 대신 나무가 자라는 사슴도 있다. 아마도 꿈을 상징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비록 동물을 소재로 할 때조차 동물 자체보다는 동물에 인간의 삶을 빗댄 우의적 표현을 보여준다. 인간화된 동물들인 만큼 친근하게 다가온다. 그렇게 그의 작업에는 현대인의 초상을 연기하고 증언하기 위해 사람들이 그리고 동물들(동물우화)이 소환된다. 
그렇게 소환된 사람들 중엔 작가 자신도 있다. 자소상이다. 가면을 쓰고 있는데, 작가 자신의 그리고 어쩜 우리 모두의 초상에 해당할 것이다. 알다시피 정체성을 뜻하는 페르소나는 그 어원이 가면에서 왔다. 그때그때 사회가 요구하는 그러므로 타자가 욕망하는 정체성의 가면을 매번 바꿔 써야 하는 현대인의 비애를 표현한 것일 터이다. 그리고 아마도 소성과정에서 주저앉고 들러붙었을 깨진 그릇으로 어깨선을 대신한 토르소도 있다. 도예가로서의 자기정체성을 표현한 것일 터이다. 그리고 여기에 선글라스를 낀 채 좌대 위에 걸터앉은 자기도 있고, 조금은 엉뚱한 경우로서, 마찬가지로 선글라스를 쓴 부처도 있다. 타자의 욕망과 부처 사이에서 번민하는, 성속을 넘나드는 자기를 표현한, 그리고 어쩜 우리 모두 저마다의 자기를 표현한 자기반성적인 작업이다. 
마지막으로 생활자기가 일종의 풍경조각으로 부를만한 형식적 가능성을 예시해준다. 이를테면 접시 위에 따로 만든 도기 오브제 형태의 집이 들어서고 배가 놓이고 조깅하는 사람이 서 있다. 이런 오브제의 등장으로 인해 접시가 졸지에 숲이 되고 호수가 되고 공원으로 탈바꿈된다. 그리고 찻잔의 손잡이 자리에 사람형상의 오브제가 앉아있는, 그래서 찻잔에 차라도 따를 때면 찻잔 속이 그대로 호수가 되는, 그렇게 호수의 가장자리에 사람이 앉아있는 풍경이 연출되기도 한다. 그렇게 작가는 하나의 찻잔에마저 회화적이고 조각적이고 풍경적인 형식논리며 상황논리를 도입해 그 표현영역을 확장시켜놓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정길영의 작업은 비록 도자기지만 기(그릇과 용기)보다는 조형물에 가깝고, 생활 속 쓰임새보다는 감상하고 향유하기 위한 예술작품에 가깝다. 재료와 기법을 차용했다 뿐이지, 사실상 조각의 한 경우로 보아야 하고, 도자의 장르적 특수성으로 치자면 현대도예로 범주화할 수가 있겠다. 그러면서도 생활용도로부터 완전히 결별하지도 않는다. 생활과 예술, 예술과 실용, 둘 다를 아우르면서 통합시키는, 그럼으로써 종래에는 생활 속 예술을 실천하고 있다. 형식파괴를 통해, 전통적인 세라믹의 범주를 넘어서는 경계 넘나들기를 통해 자신만의 독자적인 형식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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