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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웅, 데이터맨 혹은 무균질의 신인류의 출현을 예고하는 사진조각 이전, 생명의 씨앗

고충환

정기웅, 데이터맨 혹은 무균질의 신인류의 출현을 예고하는 
사진조각 이전, 생명의 씨앗 

전작이 있을 터이지만, 작가의 작업이 하나의 뚜렷한 주제의식을 견지하기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생명의 씨앗을 테마로 하면서부터일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처음에 자기복제와 자가 분열하는 원형세포를 조형했다. 그리고 그걸 생명의 씨앗이라고 불렀다. 그 자체 생명의 씨앗이면서, 동시에 처음으로 주제로 제안된 것이란 점에서 주제의식의 씨앗으로도 볼 수가 있겠다. 그렇게 조각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생명의 씨앗으로부터 발아된 것이었고, 존재의 원형에 맞춰진 것이었다. 각 생명, 씨앗, 원형에 맞춰진 주제의식이 종래에는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인간은 무엇인가와 같은 정체성 문제에 연동된 것이었고, 존재의 궁극을, 존재의 본질을, 생명의 최소단위원소를 묻는 것과 같은 거대담론에 맞물린 것이었다. 그건 정체성 상실과 함께 본질에 대한 회의가 팽배한 시대에 던져진 질문이라서(예술은 질문의 기술이다) 오히려 진정성이 느껴지고 그 만큼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평소 조각을 대하는 작가의 입장과 삶의 태도 내지 성향을 말해주는 대목으로 봐도 되겠다. 
그렇게 원형세포로부터 비롯된 작가의 작업은 이후 이러저런 형태변이를 보여주며, 특히 엉덩이와 남근을 연상시키는 반추상적 형상으로 확대재생산 된다. 감각적으로 실재하는 것임에도 정작 추상적인 형태로 다가오는 원형세포가 그렇듯 추상적인 형태 속에 알만한 형상을 숨겨놓고 있는 암시적인 경우로 보면 되겠다. 최초 원형세포로 나타난 생명의 최소단위원소에 대한 관심이 생명을 표상하는 신체의 부분대상으로 전이된 경우로 보면 되겠다. 그렇게 작가는 원형세포 이후, 신체의 부분대상을 변주하는 일련의 작업들을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흥미로운 것이 슬라이스 형태로 자른 스테인리스스틸 패널을 일정 간격으로 배열하고 조합한 작업이다. 아마도 본격적인 사진조각으로 넘어가기 전 마지막 조형작업일 것이다. 그 세부를 보면 간격이 패턴을 만들고, 패턴이 이미지를 만든다. 마치 사진과도 같은 일루전을 불러일으키는 것. 한편으로 패턴이 불러일으키는 일루전으로 치자면 옵티컬아트가 전형적인 경우에 해당하며, 작가의 작업 역시 그 현상과 무관하지가 않다. 여기서 이미지든 일루전이든 그 성질이 형태 중심의 조각보다는 회화(아님 사진)에 가깝다는 점도 주목해볼 일이다. 
그렇게 작가는 슬라이스 형태로 자른 패널을 배열하고 조합하는 방식과, 이로써 마치 사진 같은 일루전을 불러일으키는 시지각 현상을, 그러므로 조각이면서 동시에 회화(아님 사진)적 비전을 떠올리게 만드는 성질을 잇따른 사진조각을 위해 예비해놓고 있었다. 어쩜 작가의 작업에서 사진조각은 불현듯 돌출된 경우가 아닌, 사진조각이 출현할 수 있는 선행과정과 예비 작업이 전작에서 이미 상당할 정도로 뒷받침되고 있었다고도 볼 수가 있겠다. 

사진조각 이후, 조각의, 혹은 인류의 확장 

현대미술을 연 계기가 여럿 있지만, 그 중 가장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탈의 논리를 들 수가 있을 것이다. 탈장르, 탈형식, 그리고 탈경계와 같은. 이런 탈의 형식논리가 가장 광범위하고 첨예하게 나타난 장르가 조각이다. 현대미술에서 조각은 설치와 개념, 영상과 사진, 오브제와 레디메이드로 분화 결합되면서 그 영역이며 범주를 확장시키고 있다. 사진조각은 바로 이처럼 확장된 현대미술(그리고 현대조각)의 자장에 속해있다. 여기서 사진조각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단순하게 말하자면 사진은 평면이고, 조각은 입체다. 그래서 사진조각이란 일단은 사진적인 평면을 조각적인 입체로 구현한 것 일체를 포함한다. 그리고 사진의 강점은 재현이고, 조각의 본성은 형태다. 결국 사진조각이란 재현적인 이미지를 입체적인 형태 위에 덧입혀 일체화하는 것이다. 저마다 그 구현방식이 다를 수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런 형식논리의 프레임 안에 아우러질 수 있는 것으로 보면 되겠다. 
여기서 재현적인 이미지는 사진이 도맡고, 구조며 형태는 조각의 몫이다. 작가는 작품경향에 따라서 차이는 있지만 대개는 유리와 아크릴판 그리고 폴리카보네이트를 소재로 사용하는데, 아마도 그 속이 비쳐 보이는 투명한 소재와 사진이 결합할 때 그 효과가 극대화된다는 사실에 착안했을 것이다. 작가의 사진조각은 크게 3가지 정도의 버전으로 나뉜다. 그 대략적인 경향과 과정을 보면 먼저 입체로 옮기기 전에 컴퓨터 모델링 시뮬레이션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신체의 부분 이미지 또는 전신상을 드로잉 하는데, 전체를 자잘한 부분 이미지로 세분화해 보여준다. 그리고 그렇게 세분화된 부분 이미지 그대로 따로 준비해둔 사진 이미지를 잘라서 유리판(혹은 투명한 아크릴판)에다 붙인다. 그리고 일정간격을 유지하면서 유리판을 중첩시키는데, 마치 보이지 않는 구조물 속에 사람이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멀리서 보면 허공에 서 있는 사람이 보이고, 가까이서 보면 슬라이스 형태로 분화된 절편구조가 보인다. 멀리서 보면 이미지가 보이고, 가까이서 보면 구조가 보인다. 그렇게 작가는 이미지와 구조가 상호작용하는, 사진과 조각이 길항하고 부침하는, 그리고 여기에 감각적 실재와 허구(아님 허상)가 경계 너머로 넘나들어지는, 일종의 경계 위의 조각(혹은 조형)을 예시해준다. 
또 다른 경우를 보면, 이번엔 투명한 폴리카보네이트 소재를 긴 육각형 막대 형태로 만든 다음, 그 안쪽에다 마찬가지로 세분화된 사진 이미지를 붙인다. 그리고 접촉면을 리벳으로 고정시켜 막대를 층층이 쌓아 구조물을 만든다. 그렇게 서 있는 사람, 허공에 부유하는 사람, 질주하는 사람과 같은 인간군상이 만들어진다. 이 사람들 가운데 특히 질주하는 사람의 경우에 감각적 실재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여기에 무슨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처럼 속도감을 암시하는 것이 흥미롭다. 아마도 형상 뒤편으로 길게 연장된 투명한 소재 때문이겠지만, 흡사 빛을 관통해 내달리는 사람 혹은 빛의 속도로 질주하는 사람을 보는 것 같다. 앞서 작가의 사진조각은 멀리서 볼 때 다르고 가까이서 볼 때 틀리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이 작업 역시 가까이서 보면 구조가 보이는데, 특히 정 측면에서 보면 촘촘한 벌집구조가 보인다. 다시, 가까이서 보면 텅 빈 구조가 보이고, 멀리서 보면 형상이 보인다. 가까이서 보면 빈 것이 보이고, 멀리서 보면 찬 것이 보인다. 있음과 없음, 유와 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여기에 공과 허의 개념을 재정의 하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한 버전은 앞서 살핀 버전들과는 다른 점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앞선 버전들에서 사람형상은 투명한 구조물 속에 들어있었다. 사람형상이 구조물 속에 갇혀있다고나 할까. 그런데 이 일련의 작업들에서 사람을 가두는 구조물은 없다. 그 자체 입체로 재현된 사람형상이 있고, 그래서인지 더 조각적이고, 말을 하자면 더 사진조각적이다. 어떻게 그런가. 이 일련의 작업들에서 작가는 그 자체 지지대 역할도 겸하는 투명 소재와 사진 이미지의 크기를 여백이 없이 하나로 맞췄다. 투명 소재의 폴리카보네이트 판에 사진을 붙여 만든 신체의 부분 이미지들을 입체로 재구성해 전신상(때로 토르소)을 만들었다. 이번에는 접촉면을 인두로 지져 붙였다. 그렇게 만든 형상이 친근하면서도 낯선데, 영락없는 감각적 실재 그대로인 것이 친근하고(말할 것도 없이 사진 이미지에 기인한), 사실은 크고 작은 각진 면이 재구성된 것이 낯설다(사진보다는 조각적 성질이 반영되거나 두드러져 보이는). 무슨 말인가. 형상에서 사진 이미지를 걷어내고 나면 추상조각이 남는다. 엄밀하게는 사람형상을 자잘한 각 면들로 분화하고 재구성한 반추상 조각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작가는 전작에서 이미 스테인리스스틸 소재의 꼭 그런 반추상 조각을 만든 적이 있다. 이번엔 소재가 달라지고, 더욱이 그 위에 사진 이미지가 덧입혀진 것이 다른 점이다. 그렇게 작가는 재차 사진과 조각, 형상(아님 감각적 실재)과 추상의 경계를 흔들어놓고 있다. 
여기서 의문이 남는다. 작가의 조각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실존하는 인물인가, 아님 모델인가. 그렇지는 않다. 감각적 실재 그대로의 영락없는 닮은꼴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어디선가 본 것 같고 볼 것 같은 사람이 친근함을 자아내는 것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무슨 말인가. 사실을 말하자면 그는 데이터를 조합하고 재구성해 만든 일종의 데이터맨이다. 이전 같으면 허황된 소리라 하겠지만, 아바타인격체며 홀로그램인간이 보편화된 가상현실에서라면 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유형무형의 모든 존재대상이 한갓 정보로 환원되는 시대로부터 인간 역시 자유롭지는 못하다. 그렇게 작가는 어쩜 한갓 정보로 축소되고 데이터로 환원된 인간, 그러므로 아무도 아니면서 동시에 우리 모두일 수 있는 인간, 그런 자신만의 가상인격체를 창조했다. 
앞서 작가의 작업은 생명의 씨앗에서 비롯했고, 이는 그대로 정체성 문제며 거대담론에 맞물린 것이기도 하다고 했다. 그리고 정체성 상실을 앓는 시대에 던져진 질문이라서 더 의미가 크다고도 했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어쩜 이렇듯 정체성 상실을 앓고 있는 우리 모든 익명적 존재들을 대리하는 가상의 인격체를 제안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님 현생인류가 앓는 모든 징후와 증상으로부터 자유로운, 무균질의 신인류의 출현을 예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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