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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광/ 초상화, 상식적인 개념과 정의들의 알레고리

고충환

손민광/ 초상화, 상식적인 개념과 정의들의 알레고리 


Various points of view. 다양한 시점 혹은 관점이란 의미다. 시점보다는 관점으로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작가의 작업은 시점에 대한 형식실험보다는 관점의 차이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사람도 관점이 달라지면 다르게 보인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다르게 보인다. 관점은 어디서 오는가. 타자로부터 온다. 타자들의 다른 관점이 똑같은 사람을 본다. 그러므로 그는 어쩜 더 이상 똑같은 사람이 아니다. 타자들의 수만큼이나 많은, 다른 관점들의 수만큼이나 많은 똑같은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똑같은(아님 다른?) 사람들이다. 그(혹은 그들)는 누구인가. 타자들이 지금 보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바로 그(혹은 그들)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다름 아닌 바로 그(혹은 그들)라고 어떻게 특정할 수 있는가. 본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보는 건 그저 보는 것이 아니다. 그저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보는 것은 욕망이다. 난 널 그렇게 봐. 난 네가 그렇다고 생각해. 넌 결코 너를 향한 나의 봄을, 그러므로 나의 욕망을 배신할 수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가 없어. 그렇게 네가 나를 만든다. 타자가 주체를 만든다. 그러므로 나를 향한 너의 봄이 없으면 나도 없다. 나를 향한 타자의 욕망이 없으면 주체도 없다. 
그렇다면 그이면서 동시에 그들이기도 한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바로 얼굴이다. 한 사람의 얼굴 속엔 그이면서 동시에 그들인 그가 산다. 얼굴이란 얼이 사는 굴이고 꼴이고 집이라는 말이다. 얼이 뭔가. 타자들의 욕망이 형성시켜준 인격이다. 그러므로 타자들의 욕망이고 타자들이다. 그렇게 한 사람의 얼굴 위로 타자들이 기거한다. 잘 안 보이지만, 잘 보면 타자들의 희미한 그림자가 보인다. 작가는 시종 사람 얼굴을 그렸다. 그건 어쩜 한 사람의 얼굴 위에 어른거리는 타자들의 희미한 그림자를 붙잡으려는 몸짓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결단코 다른 사람일 수는 없다고 특정할 수 있게 해주는 근거가 있는가. 근거가 있다면 그 근거는 뭔가. 보는 관점이 약간만 삐끗해도 안 보이던 것들(얼들? 유령들?)이 보이는데, 약간만 한눈을 팔아도 타자들이 보이는데 어떻게 동일인이라고 확신할 수가 있는가. 그렇게 작가는 바로 그라고 확신할 수 있는 그의 실체를 찾아서 얼굴 위를 헤맨다. 그리고 지우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면서. 긍정과 부정을 수도 없이 오가면서. 그렇게 그가 그린 얼굴 위엔 치열한 흔적이 남는다. 어쩜 이로써 타자들의 희미한 그림자가 오롯한 실체를 얻었을 흔적이 남는다. 그렇게 작가는 그이면서 동시에 그들인 그의 얼굴을 그렸다. 존재론적인 얼굴들이다. 

그이면서 동시에 그들이나, 하나의 얼굴 위에 어른거리는 타자들의 그림자는 결국 자기분열을 의미한다. 이중인격과 다중자아를 의미한다. 그렇게 분열적인 주체, 이중적인 인격, 다중적인 자아가 얼굴 위로 낱낱이 등록된다. 그래서 작가의 초상그림은 재현과 탈 재현을 넘나든다. 얼핏 알 것도 같고(재현) 모를 것도 같다(탈 재현). 그렇게 작가는 처음에 주변사람들부터 그리기 시작하다가 점차 익명적인 주체들로 옮겨간다. 익명적인 주체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알려진 공인들이며 공적주체들이다. 이를테면 애국심 투철한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와 유관순 열사, 전 국민의 정의 실현을 위한 결실을 가져온 이정미 전 헌법 재판관, 자식 잃은 타들어가는 가슴을 가진 세월호 희생자 김유민양 아버지 김영오씨, 안타까운 희생으로 큰 변화를 가져온 젊은이 태안화력발전소 사고 희생자 김용균씨, 진정한 의인의 자질을 보여주는 사람 이국종 아주대 외상외과 교수 같은. 
그림도 흥미롭고 제목도 흥미롭다. 제목이 아니라면 도대체가 오리무중인 그림이다. 초상화에 대한 관습이 아니라면 미처 얼굴로 알아보기조차 쉽지 않은 그림이다. 그럼에도 얼추 누군지는 알겠다. 언론을 통해 이미 충분히 노출된 탓에 전형성이라고 부를 만한 눈에 익은 형태가 있어서다. 친절하고 장황한 설명을 곁들인 제목은 또한 어떤가. 각 개별 인물에 대한 설명(혹은 차라리 논평?)은 작가 개인의 생각인가 아님 언론이 정의한 걸 퍼다 나른 것인가. 주관적인 생각인가 아님 대중적인 생각인가. 자기인식의 결과인가 아님 언론플레이와 프레이밍 그리고 이미지정치학의 소산인가. 미디어의 시대에 개별주체의 자기인식은 곧잘 미디어의 영향을 받는다. 그렇게 자기인식과 미디어의 인식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혼동된다. 그 과정에서 일종의 인식론적 효율성의 법칙이 작동해 복잡한 현상은 삼빡한 전형으로 정리되고, 무미한 선명성 개념으로 재단된다. 애국심, 정의, 희생(그리고 희생자), 그리고 의인 같은. 그리고 작가는 애국심을 표상하는 형태, 정의에 걸 맞는 색깔, 희생자에 부합하는 질감, 그리고 의인에 어울릴 만한 분위기를 찾아준다. 그렇게 의인은 의인답게, 정의는 정의롭게, 희생자는 희생자답게 그려진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은 결국 누군가를 특정해 그렸다기보다는(비록 외관상 누군가를 특정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그리고 어쩜 결과적으로는 초상에 빗대어 의로움의, 정의의, 희생의 알레고리를 그린 것일 수 있다. 통념적인, 상식적인(롤랑 바르트라면 독사 doxa라고 했을), 그리고 어쩜 미디어적인 개념과 정의들의 알레고리를 그린 것일 수 있다. 

그렇게 작가는 사람과 함께 장소를 그렸다. 대전 이응노미술관,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 홍성 이응노의 집(기념관)을 그렸다. 일정기간 작가의 삶을 함께한(이를테면 레지던시) 곳도 있고, 그저 스치듯 다녀간 곳도 있다. 그 장소 역시 인물초상과 마찬가지로 감각적으로 재현하는 대신 그곳에 대한 인상과 느낌에 부합하는 형태, 사건과 사고에 걸 맞는 색깔, 역사와 정보에 어울릴 만한 질감으로 해체하고 재구성해 그렸다. 이로써 작가 개인에겐 사사로운 기억이나 추억을 되새기게 해주는 그림이 될 수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무슨 말인가. 알만한 장소를 그린 것인 만큼 최소한의 객관정보(이를테면 건물구조와 같은)라는 것이 있을 터이지만, 그 밖의 것들, 이를테면 기억이나 추억이란 것이 워낙에 사사로운 것이어서 하는 말이다. 여하튼 그렇게 작가는 건물에 사사로운 기분을 투사하고, 장소에 자기감정의 입김을 불어 넣는다. 이로써 건물을 빌려, 장소에 기대여, 그리고 물론 익명적인 초상을 구실 삼아 자기서사(개인사)를 기술하는 자기만의 방식을 찾아냈다고나 할까. 그리고 여기에 최근에는 페인팅과 드로잉을 넘어 도기로 그리고 영상으로 매체를 확장하고 있는 것도 주목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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