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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공예비엔날레_ 경계 위의 작가들, 현대공예의 확장성을 중심으로

고충환

청주공예비엔날레_ 
경계 위의 작가들, 현대공예의 확장성을 중심으로 


현대미술의 계기가 여럿 있지만 그 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탈의 논리를 들 수가 있을 것이다. 탈장르와 탈형식, 탈경계와 탈형이상학 같은. 여기서 탈은 다르게는 파괴로 이해해도 무방하다(질 들뢰즈는 파괴하면서 창조하는 것에 예술의 특수성이 있다고 했다). 장르파괴와 형식파괴 같은. 그렇게 현대미술은 장르를 넘나들고 형식을 가로지른다. 심지어 인문학과 같은 학문과의 교류에도 거침이 없는데, 학제간 연구방식은 현대미술에서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현대공예도 마찬가지. 세계적으로 유명한 현대미술상으로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영국의 터너상 수상자로 그레이슨 페리(2003)가 선정된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전통적인 도자기 표면에 전쟁과 섹스 그리고 폭력과 같은 도발적인 이미지를 그려 넣어 사회비판적인 주제를 실천한 것이 주효했다. 전통적으로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도자기에 어울리지 않는 도발적인 이미지를 그려 넣은 것, 그럼으로써 도자기의 다른 용법을 제안하고, 도자기의 사용법(그러므로 어쩜 전통의 사용법)을 확장시킨 것이 인정을 받은 것이다. 

공예와 현대공예는 어떻게 다른가. 공예는 실용성에 방점이 찍힌다. 이에 반해 현대공예(그리고 예술)는 실용성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렇다면 현대공예는 실용성이 아닌 무엇을 추구하는가. 조형성이다. 그런데 사실을 알고 보면 조형성은 실용성만큼이나 공예의 필수요건이며 필요충분조건이기도 하다. 기능주의며 자연주의 같은 경우가 그렇다. 기능에 충실한 최소한의 형태와 구조가 감각적 쾌감을 자아낸다거나, 장식을 배제한 채 자연의 본성에 따른 질감과 색감이 미적 감흥을 준다는 태도다. 조형예술 혹은 순수미술로 치자면 도널드 저드의 최소한의 구조(미니멀리즘)며, 자연의 본성만한 위대한 예술이 없다는 로댕의 전언에 부합하는 입장이다. 빈티지는 어떤가. 빈티지는 시간의 미디어고, 향수(멜랑콜리와 노스탤지어)를 생산하는 매체다. 시간과 향수는 예술일반의 키워드이기도 하다. 백자와 청자와 분청의 구분에서도 이런 조형성은 어김없이 매개된다. 백자는 조선시대 유교의 이데올로기를 미적으로 실현한 것이고, 청자는 고려시대 귀족들의 화려한 생활감정을 반영한 것이고, 분청은 민초들의 분방한 생명력을 표출한 것이다. 
그렇게 공예는 이미 그 자체 실용성과 조형성을 포함한다. 그렇담 공예와 현대공예를 구분하고 나누는 것은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 편의적이고 임의적인 것이다.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다. 중요한 건 현대공예가 현대미술과 예술일반의 생리를 추구하고 실천한다는 점이다. 특히 주제 면에서 현대미술과 예술일반이 다루는 주제와 구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예(혹은 전통공예)와 현대공예는 구분된다고도 할 수가 있겠다. 여기에 현대미술 혹은 예술일반의 맥락에 속해져 있으면서, 동시에 현대공예에도 접속될 수 있는, 그럼으로써 현대공예의 확장가능성을 시사해주는 일군의 작가들이 있다. 


현대도예의 경우 

김효선(달 항아리) 
신동원(가정생활) 
옥현희(페이퍼포슬란) 
정길영(청화백자) 
엄성도(캐스팅) 
김지아나(몰딩) 
김준(페티시) 
이수경(번역된 도자기) 
이윤희(백야) 
조광훈(미운오리새끼) 
위에량(스케일) 
시용 야후이(도유화) 
류단화(죽음) 
한애규(테라코타) 
김주호(테라코타) 

유리조형의 경우 

김현정(유리착색드로잉) 
김대관(유리회화) 
이상민(유리샌딩) 
임정은(큐브의 변주) 
황선태(유리샌딩) 
오정선(유리알 유희) 
이후창(자기정체성 문제) 
유충목(자기정체성 문제) 

섬유조형의 경우 
    
차계남(사이잘삼) 
장연순(아바카 섬유) 
함연주(머리카락) 
이지현(훼손된 옷) 
김주연(옷과 식물) 

기타 

신미경(비누조각) 


현대도예의 경우 

김효선(달 항아리). 폭넓은 흰 빛의 세계와 형언하기 힘든 부정형의 원이 그려주는 무심한 아름다움...원의 어진 맛은 그 흰 바탕색과 아울러 너무나 욕심이 없고 너무나 순정적이어서 마치 인간이 지닌 가식 없는 어진 마음의 본바탕을 보는 듯...아무런 장식도 고운 색깔도 아랑곳할 것 없이 오로지 흰색으로만 구워낸 백자 항아리의 흰빛의 변화나 그 어리숭하게만 생긴 둥근 맛...산 배꽃이나 젖 빛깔에도 비길 수 있는 순정어린 흰빛의 조화...아주 일그러지지도 않았으며 더구나 둥그런 원을 그린 것도 아닌 어리숙하면서도 순진한 아름다움...계산을 초월한 아름다움...신기스럽고도 천연스러운 아름다움(백자 달 항아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최순우). 달 항아리는 부정형과 비정형 탓에 비로소 완벽한 형태가 될 수가 있었다. 자본주의의 상품화 기획에서라면 아이러니고 모순이지만, 미의식의 관점에서라면 가능한 일이다. 미의식으로 봤을 때 완벽한 형태는 결정적인 지점을 가지고 있지 않고, 고정된 좌표로 등재되지도 않는다. 흔들리는 결정, 움직이는 좌표, 유격이 있는 기준에 연동되는 미의식은 말하자면 사물의 다른 존재방식을 열어놓는 형식실험에 비유할 수가 있다. 작가는 그렇게 달 항아리를 보는 다른 존재방식(사실을 말하자면 달 항아리를 보는 전통적인 미의식과도 통하는)을 예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신동원(가정시대). 작가는 도기를 제작할 때처럼 물레를 사용하는 대신, 조각과 마찬가지로 손으로 빚어 형태를 만든다. 물론 조각처럼 주형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렇게 만든 주전자는 납작해서 물을 따를 수가 없고, 컵은 막혀있어서 물을 담을 수가 없다. 도기처럼 보이지만, 도기가 아니다. 더욱이 평면으로 압축된 오브제가 도기보다는 조각처럼 보이고, 특히 납작한 조각인 부조처럼 보인다. 실제로 작가는 이렇게 만든 오브제를 부조처럼, 나아가 무슨 그림처럼 벽면에 걸기조차 한다. 보기에 따라선 벽면을 캔버스 삼아 도자로 그림을 그리는, 무슨 벽면 드로잉 같기도 하다. 현실적인 모티브(이를테면 주전자나 컵 같은)를 취하고 있지만, 정작 현실의 공간적 조건에 제약받지는 않는 자유분방한 판타지를 그려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벽 위에 얹힌 낱낱의 모티브들이 마치 무중력 속을 떠다니듯 부유하는 모습이다. 무겁다기보다는 가볍고 발랄한 감각으로 현실원칙에 대한 도발(가벼운 반란?)이 감행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작가의 작업은 도자이면서도 조각에 흡사한 생리를 내재하고 있고, 부조나 평면회화처럼 벽 위에 걸리는가 하면, 나아가 설치작업이나 공간 드로잉마저 아우른다. 편의상 도조로 명명하고 범주화할 수 있을 작가의 작업은 이렇듯 도자와 조각, 조각과 회화, 평면과 입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상호 삼투되는 제 삼의 어떤 지점을 예시해준다. 

옥현희(페이퍼포슬란). 작가의 작업은 페이퍼포슬란 즉 일종의 종이도자로 범주화된다. 종이펄프와 도자기 흙(고령토)을 혼합해 만든 재료로써 형상을 빗은 연후에 그 표면에 채색을 더하거나 그림을 그려 넣는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유약을 바르고 불에 구워 건조시키는 소성과정을 거쳐 크고 작은 형상들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 조각들을 캔버스 표면에다 부착하는데, 그 방법이 일종의 모음그림이나 모자이크를 연상시킨다. 형상의 편린들을 임의적으로 조합하는 과정을 통해 하나의 전체형상을 재구성해내는 것이다. 흙을 재료로 한 조형작업이란 점에서 현대도예에 그 맥이 닿아있으면서도, 평면화의 경향성이 강하다는 점에서 그 인상이나 생리가 도조보다는 회화에 가깝다. 특히 온갖 현란한 색채들의 향연을 연상시키는 화면이 이러한 회화로서의 인상을 강화시켜준다. 작가의 작업에서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이처럼 형상 하나하나에 덧입혀진 투명하고 맑은 발색효과를 들 수 있다. 보통의 페인팅을 통해서는 접하기 어려운 이 선명한 색채나 아름다운 발색은 실상 불과의 소성과정을 통해 비로소 가능해진 것이다. 이로써 작가의 작업은 범속한 것들, 평범한 것들, 소소한 것들에게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발견해내는 한편, 이를 통해 일상에의 긍정을 주제화하고 있는 것이다. 

정길영(청화백자). 작가는 도판 위에 청화로 그림을 그린다. 작가에게 도판은 일종의 확장된 화면이며, 회화적 표현을 증폭시켜주는 계기가 된다. 화면을 거침없이 내지르는 활달한 붓질과 분방한 필치, 그리고 여기에 때로 모노톤의 그리고 더러는 자유자재한 색채감정이 어우러진 그림들이 서체추상과 수묵화를 연상시킨다. 일종의 드로잉 감각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경우로 보인다. 주로 풍경이라고 할 만한 것으로서, 그 속에 배가 담기고 집이 담긴다. 그리고 여기에 숫자, 기호, 도형, 땡땡이 문양, 우연을 가장한 비정형의 얼룩이 축약된 형태의 사람형상과 어우러져 일상이 열리고, 서사가 열린다. 그리고 여기에 투명유약처리하거나 소금유로 마감하는데, 소금유는 보통의 유약에 비해 마치 토기항아리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입자가 굵고 거칠거칠한 질박한 표면질감을 얻을 수가 있다. 그리고 도조를 통해서는 각종 기마상과 거대 토끼 형상(현대인의 우울한 초상에 대한 알레고리?) 그리고 신화적인 경우로서 마두인간(현대판 미노타우루스?)이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 수금처리마감으로 청화와 대비시켜 물성을 강조하고 다채로움을 더한다. 그리고 설치작업으로 캡슐 형태의 알약 포장지와 골판지, 비자카드와 LG로고 같은 각종 생활오브제 콜라주, 그리고 여기에 폐목과 시멘트와 세라믹이 어우러진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들이 있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세라믹의 범주를 넘어서는, 경계와 영역 넘나들기를 통해 자신만의 독자적인 형식논리를 예시해주고 있다. 

엄성도(캐스팅). 엄성도는 캐스팅이라는 특유의 방법에 의해 제작된 일련의 도조작품을 보여준다. 조각과 관련해선 보편적인 방법으로 정착된 것이지만, 도예와 관련해서는 아직 생경한 기법이다. 도예에서의 캐스팅은 공법이나 재료가 갖는 한계 등 기술적인 제약조건으로 인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작가는 캐스팅을 도예와 도조의 표현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는 계기로 본다. 작가는 캐스팅 공법을 통해 비정형의 원형을 몸통으로 하여 그 표면에 마치 원형생물의 감각촉수와도 같은 무수한 돌기들이 나 있는 특유의 형상을 빚어낸다. 이런 하얀 돌기들과 함께 몸통의 표면에는 청색과 분홍색조의 얼룩 반점들이 나 있어서 한눈에도 살아있는 유기체를 연상시킨다. 이는 마치 원형생물들이 정지된 시간 속을 유영하는 태곳적 풍경과 대면케 한다. 작가는 이를 통해 생명을 잉태하고 있는 우주적 자궁 속으로 관객을 인도한다. 보기에 따라서 돌기 형상은 몸통 내부로부터의 에너지의 분출이나 기의 방출을 상기시키며, 이 역시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인 생명 혹은 생명력의 발현과 통한다. 이로써 작가는 캐스팅으로 나타난 특유의 공법을 통해서 도예의 장을, 그 표현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김지아나(몰딩). 하나의 몰드로부터 떠낸 다른 형태의 유닛들이나, 종이만큼이나 얇은 세라믹 파편들을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서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를 표현한 작가의 작업은 현대도예의 또 다른 양상을 예시해준다. 대개 흙을 빗어 형태를 만들기 마련인데, 작가는 세라믹 자체의 본성으로부터, 질료 자체의 본성에 주목하는 것으로부터 작업을 풀어내는 편이다. 작가의 작업이 세라믹이면서도 어떤 기능이나 형태(도조?)보다는 빛과 질료가 어우러진 조형적 성과가 두드러져 보이는 것도 알고 보면 이러한 사실의 인식과 무관하지가 않다. 세라믹의 본성을 이해하고 극대화하는 것, 이를 변주하고 심화시키는 것에서 작업이 가능한 또 다른 지점을 탐색하고 발굴해내는 것이다. 그 탐색 과정에서 소재의 피막, 껍질, 피부와 같은, 그 존재감이 박약하고 미소한 것들과 관련한 미학적이고 감각적인 어떤 지점이 예감된다. 

김준(페티시). 작가는 그 표면에 자본주의의 도상이며 시대적 아이콘이 문신으로 아로새겨진 파편화된 신체 조각들을 무슨 음식인 양 도제 접시에 담아낸다. 이 일련의 작업들에서 작가는 욕망과 특히 성적 페티시와 관련해 꽤나 도발적인 해석을 제안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인간을 탐욕과 탐식의 대상으로 설정하는 식의 보다 직접적인 화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인격의 상품화를 겨냥한 자본주의 욕망이 성적 페티시로 나타난 숨 막히는 살들의 향연을 경유해 마침내 본격적인 만찬의 형태로까지 발전되고, 덩달아 자본주의의 욕망은 노골화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런 자본주의의 욕망은 작가의 작업에서 보다 근본적인데, 이를테면 하나같이 얼굴이 없는 신체들이 그렇다. 얼굴 없는 신체는 인격이 거세당한 신체며 익명적인 신체, 그래서 철저하게 상품화를 실현한 신체에 해당하며, 그 자체가 자본의 무차별성을 암시한다. 그리고 자본의 무차별성은 일종의 브리콜라주의 형태로도 변주된다. 이를테면 온갖 이질적인 사물의 편린들이 하나의 전체(억지 전체?)로 조합되고 합성된 혼성잡종으로서, 실제와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어떤 대상성을 겨냥하며, 그 자체 가상 실재의 한 경우로서 제안된다. 알만한 리얼리티를 재현하거나 재확인시켜주는 대신, 새로운 리얼리티를 창출하고 또 다른 가상 실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런 만큼 비록 그 외양이 감각적 실제를 닮았지만, 사실은 감각적 실제와는 동떨어진 차원을 향하는데, 그 다른 차원에서 열리는 육체의 향연이 자본주의의 판타지 산업과 닮았다. 

이수경(번역된 도자기). 작가는 접착제를 이용해 도자기 파편들을 붙여나가는 과정과 방법을 통해서 하나의 온전한(?) 형태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작가의 작업은 전통적인 도자기 복원기술에 따른 것인가. 얼핏 그렇게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무슨 말인가. 하나의 형태로 조합된 도자기 파편들은 알고 보면 그 출처가 각양각색이다. 적어도 논리로만 치자면 그것들을 한데 모아놓을 근거는 없다. 작가는 그렇게 억지 조합된 형태를 번역된 도자기라고 부른다. 문명사적으로 도자기는 최초 발원지역으로부터 다른 지역으로 흘러가 영향을 준다. 그렇게 다른 도자기가 만들어진다. 같은 도자기지만, 저마다 자기 식대로 해석하고 번역한 도자기, 그러므로 다른 도자기들이 만들어진다. 작가의 작업은 바로 그 상호영향사를 주제화한 것이다. 문화충돌과 문화번역을 주제화한 것이다. 이로써 존재치고 저 홀로 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어쩜 나는 너고 너는 나라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순혈주의와 전체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의심하게 만든다. 

이윤희(백야).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백야라고 부른다. 주로 극지방에서 일어나는, 몇날 며칠을 길게는 몇 달 동안 해가 지지 않는 자연현상을 백야라고 한다. 그러나 작가에게 백야는 백자의 하얀 피부를 의미하고, 표백된 것과도 같은 순수를 의미하고, 하얗게 질리게 만드는 광기를 의미하고, 의식보다 깊은 무의식을 의미하고, 낮보다 또렷한 밤을 의미하고, 그렇게 밤이 꽃피운 사물들(그리고 서사들)을 의미한다. 그렇게 쾌락의 정원이 열리고, 거미의 성이 열린다. 정원에는 고승이 사유하고 있고, 성에는 곰 인형이 잠들어 있다. 반복 패턴 뒤편으로 밑도 끝도 없는 벽감들이 열리고, 식물이 자라는, 무슨 과일처럼 해골이 열리는 머리가 비밀스런 의미들을 풀어놓는다. 흡사 메두사의 뱀 머리칼과도 같은 그 의미의 다발들은 아마도 의미의 비결정성이며 가변성을 상징할 것이다. 그리고 머리 위로 자라는 뿔은 정신의 파수꾼을 상징할 것이다. 여기에 왕관이며 왕홀과 같은 왕권을 상징하는 도상들, 꽃그림이 그려진 해골들, 만다라 그림들, 그리고 얼굴에 그려진 산수가, 아모르가,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조상이, 낮과 밤의 알레고리가 자기분열하고 자가 분열한다. 그리고 무수히 분기되는 손들, 광기와도 같은 손들이 하얀 손짓을 한다. 모두가 생소하고 기묘한, 믿을 수 없을 만큼 감미롭고 아름다운, 치명적일 만큼 섬세한 작가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작가의 손끝에서 되살아난 악몽들이다. 

조광훈(미운 오리새끼). 미운 오리 새끼가 있었다. 미운 오리 새끼는 다른 오리들과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미움을 받는다. 그러나 나중에 미운 오리 새끼는 오리가 아닌 백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행복을 되찾는다. 안데르센의 동화 <미운 오리 새끼>다. 이처럼 미운 오리 새끼가 있으면 백조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정작 작가의 작업 어디에도 백조는 없다. 다만 미운 오리 새끼와 함께, 남이 한 말만 하고 똑같은 말만 하는 앵무새가 등장할 뿐이다. 굳이 발설하지 않아도 알만한 미운오리새끼와 더불어서 또 다른 냉소적인 캐릭터일 수 있다. 지금여기의 천민자본주의를 살아내는 청춘남녀들의 초상일 수 있다. 이와 함께 한눈에도 방어 자세를 보여주는, 여기에 익명성 뒤에 숨는 캐릭터들을 형상화한 또 다른 작업이 청춘남녀들의 초상을 넘어 분열적인 인간, 부조리한 인간의 실존적인 초상을 예시해준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온몸을 가리고 있으니 도대체 누군지 알 길이 없고, 그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잘 보면 호주머니 속에 찔러 넣은 손가락 욕을 볼 수가 있다. 겉으로는 상대방을 인정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욕하는 식이다. 작가는 이런 손가락 기호를 매개로 사실은 세상을 향해 수신호(SOS)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 신호란 것이 대개는 절박(읍소)하고 냉소적인 것이어서 씁쓸함을 자아낸다. 작가는 코일링 기법 즉 흙을 길게 말아, 그렇게 말린 흙을 위로 쌓아올리면서 원하는 형태를 빚어 만들었다. 

위에량(스케일). 작가는 통념을 벗어난 작업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아마도 상식을 넘어서는 스케일 때문일 것이다. 도자 고유의 기(그릇과 용기)에 충실한 편이지만, 전통적인 도자에 작가의 작업이 잇닿아 있는 것은 여기까지(기형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가 전부다. 그의 작업이 예시해주고 있는 형태, 이를테면 그릇과 항아리는 너무 커서 한눈에도 실생활에서의 쓰임새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순수한 관상 혹은 감상을 위해 제작된 일종의 조형물임을 알게 된다. 건축과 결합되거나 조화를 이룬 경우도 있는데, 거대한 기둥이 그것이다. 기둥 자체는 독자적인 개체로서보다는 구조적으로 건물의 일부에 속한다는 점에서 건축과 세라믹이 일체를 이룬 어떤 차원을 실현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이런 거대한 그릇과 항아리와 함께, 기둥 표면에는 전통적인 화조나 산수를 그려 넣어 일종의 화폭을 대신하게 했다. 초현실주의에서처럼 스케일에 변화를 준 의외성으로 도자의 표현영역을 확장시킨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시용 야후이(도유화). 멀리 설산이나 암산이 보이는 풍경, 아마도 그곳에서 발원했을 강줄기가 초원지대 너머로 범람하는 풍경, 초원지대 위로 배를 드러낸 강바닥과 군데군데 물웅덩이가 있는 풍경, 초원지대를 가로지르며 끝도 없이 이어지다가 산속으로 숨어든 길이 있는 풍경, 산이 끝나는 지점에서 맞닿는 강과 하늘이 아득하고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풍경,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초원지대에 멈추어 선 자동차, 먹구름 사이로 비쳐드는 빛줄기의 세례를 받고 있는 자동차, 뒤쪽으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초원지대를 내달리는 자동차, 그리고 칠흑 같은 밤 속을 저 홀로 관통하는 버스와 꿈을 꾸듯 아롱거리는 마천루. 사물대상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와 정서를 파고드는 울림, 그리고 여기에 투명성을 머금은 색감과 형언할 수 없는 질감이 그림을 넘어선다. 도유화다. 도자기유약으로 그린 그림이다. 원래 유화로 수상경력이 있을 만큼 유화에 능했지만, 도중에 유화를 접고, 혹은 유화를 살려 도유화로 전환했다. 와중에 숱한 형식실험들이 있었지만, 그 형식실험들은 크게 색요(색유)와 요변으로 모아지는 것이었고, 전통적인 색요와 요변을 현대적으로 계승해 자기화한 것이었다. 여기서 색요는 말할 것도 없이 색이 있는 유약을 의미하고, 요변은 유약이 불러일으키는 천변만화한, 변화무상한, 종잡을 수가 없는, 우연한, 우연과 필연의 상호작용성이 만들어낸 효과를 의미한다. 그렇게 작가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오묘한 효과를 통해 원초적인 풍경 앞에 서게 만들고, 원형적인 자연과 대면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종래에는 자신의 내면적 자아에 직면하게 만든다. 

류단화(죽음). 작가는 재를 조형한다. 속이 깊은 접시에 수북한 재를 조형하고, 포개진 꽃잎 형태가 여실한 종이꽃(아마도 죽음을 상징하는) 그대로 태운 재를 조형한다. 그러나 여기서 재는 사실 재가 아니다. 다만 재처럼 보이게 만든 세라믹이다. 전통적인 도자 방식을 통해 흡사 불에 탄 종이처럼 얇고 섬세한 표현의 형상을 빗어낸 것이다. 섬세한 표현으로 보나 실재 대상과의 영락없는 닮은꼴에 있어서 아마도 재는 작가에게 도자의 한계에 도전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고, 그리고 여기에 평소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성찰과 자기반성을 표현하게 해주는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한갓 재로 화한 종이꽃을 통해 삶과 죽음과의 관계를 주지시킨다. 그 연장선에서 꽃과 해골을 결합한 소위 해골 꽃을 통해 무상한 삶(아마도 꽃 시절에 죽음을 생각하라는 전언을 담았을 것이다)을 주지시킨다. 그리고 낫과 망치, 도끼와 작두 같은 평화의 도구가 때론 폭력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는 도구의 이중성을 주지시킨다. 그렇게 도자의 표현영역을 확장시키고, 죽음을 통해 삶의 깊이를 더한다. 

한애규(테라코타). 한애규의 조각은 여성주의와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시사해주고 있다. 여성주의의 한 축인 전투적이고 공격적인, 이데올로기적이고 체제비판적인 경향성과는 다르게 여성의 본질을 모성에 바탕을 둔 포용력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부드럽고 우호적인 질감과 함께 세상을 향한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 주지하다시피 테라코타는 그 재료가 흙이며, 이처럼 흙으로 빚은 여성의 본성은 그대로 흙의 본성을 닮았다. 그리고 그 본성은 생명의 근원이기도 하다. 즉 생명을 낳으면서 거둬들이는, 재생하고 순환시키는 생명원리와 함께, 지모와 대모로 나타난 고대 모계사회의 여성신화와 맞물려있다. 한편 그 생명원리는 여성성의 원리이면서 동시에 보편인간의 원리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작가의 작업은 여성주의를 넘어 인간주의에로 확장된다. 그렇게 작가는 항아리처럼 넉넉한 몸매를 가진 여성들이 꽃을 들고 있거나 품고 있는 다양한 형상을 빚어낸다. 여성들의 풍만한 몸은 실제 그대로를 재현한 것이라기보다는 모든 이질적인 것들을 자기 속에 감싸 안는 무한한 포용력과 모성, 그리고 생명과 풍요의 원형을 암시한다. 그리고 때로 모성은 사악한 기운을 막아내는 지킴이로서 나타나기도 한다. 이로써 원초적인 생명력과 함께 전통적인 무속에 대한 일정한 공감이 감지된다. 이 일련의 여성들이 들고 있는 꽃은 자신의 분신이며 삶에 대한 애정을 상징한다. 자신의 일부인 생명을 내밀어 세상과 소통하고 싶은 열망을 제스처로 보여준 것이다. 그 가운데에는 시든 꽃도 있고 말라죽은 꽃도 있다. 크고 넉넉한 몸매와 작은 꽃, 생명을 환기시키는 몸매와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하얀 꽃과의 대비를 통해서 작가는 생명과 죽음이 순환하는 재생의 원리며 모성의 원리를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김주호(테라코타). 주부와 샐러리맨, 아가씨와 건달, 조깅하거나 악수하거나 손가락질하거나 쑥덕거리는 사람 등 이웃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사람들을 소재로 한 그의 인물조상은 특유의 해학과 유머를 불러일으킨다. 해학적인 인물상을 통해 유머로부터 지난한 삶을 살아내는 원동력을 얻는 보통사람들의 삶의 지혜를 조망한 것이다. 힘세고 잘난 사람들이 아닌 보통사람들의 흔한 삶의 행태에 조명을 드리운 그의 작업의 이면에선 때로 시대의 이면을 겨냥한 날카로운 비판이 번득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비판은 상대방의 정수리를 겨냥한 비수로서보다는 방심한 상대에게 똥침을 놓는 풍자적인 것으로서, 여기에는 상대방의 못남을 인정하고 끌어안는 넉넉함이 있다. 이런 보통사람들의 해학정신은 종이를 오려붙여 만든 부실한 인물이나, 닳고 해진 부삽이나 쓰레받기를 소재로 만든 초상작업에서 극대화된다. 이로써 작가는 너무나 평범해서 때론 무의미해 보이기조차하는 보통사람들이 주연으로 출연하는 세속적인 삶의 무대를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유리조형의 경우 

김현정(유리드로잉). 김현정의 작업은 스테인드글라스의 전통의 연장선에 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각색하고 자기화한 독창적인 형식을 예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평면의 유리 패널에 안료로 페인팅을 하거나 드로잉한 후 500도 이상의 고온에 구워낸 작업은 장르적 특수성으로 치자면 유리페인팅으로 범주화된다. 이때 온도는 결정적인데, 온도 여하에 따라서 색감이 달라지고 질감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결국 관건은 페인팅 혹은 드로잉과 함께 온도의 수위를 조절해 자신이 원하는 색감과 질감을 찾아내는 일이다. 이 일련의 지난한 과정을 거친 작업은 유리조형이면서도 회화적인 느낌이 강하고, 따라서 일종의 유리를 소재로 한 회화로 볼 수 있겠고, 그럼으로써 회화의 표현 가능성이며 범주를 확장하고 심화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회화적 평면을 근간으로 하는 만큼 드로잉 친화적인 점도 특징이다. 비록 재료도 다르고 색감도 다르고 질감도 다르지만 서로 대리하고 보충하는 상호작용이 꽤나 긴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편이다. 저마다 독자적인 표현영역을 견지하면서도 상호영향관계에 놓여 있다고나 할까. 작가에게 드로잉은 말하자면 일종의 생활일기와도 같은 것이고, 이처럼 드로잉으로 표현된 생활감정의 소회를 유리작업으로 옮겨놓는 식이다. 마치 한지에 먹이 스며들고 번지는 것과 같은, 먹의 번짐 효과랄지 선염효과를 연상시키는 부드럽고 모호하고 깊은 색감이며 질감으로 직조된 존재의 아우라를 불러일으킨다. 

김대관(유리회화). 얼핏 추상화(이를테면 색면추상)로 보이는데, 정작 작가는 강물을 그린다고 했다. 강물을 어떻게 그리는가. 유리회화로 그린다. 유리판에다가 유리착색안료를 칠한다. 이 상태로 620도까지 서서히 온도를 높여가며 가마에 구워낸다. 그리고 재차 색을 덧칠하고 구워내기를 수차례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은근하면서도 투명한 질감의 색채가 착색된 유리판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렇게 착색된 두 장의 유리판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하나의 화면으로 중첩시키는데, 같은 계열의 색채가 착색된 유리판을 중첩시킨다. 그리고 착색유리판과는 대비되는 보색의 점을 찍어 완성한다. 여기서 안료가 착색된 유리판은 수면을 암시하며, 화면을 가로지르는 라인이 수면의 방향과 유속(물이 흐르는 느낌)을 암시하며, 점들이 수면에 던져진 빛의 편린을 암시한다. 이렇게 물이 흐르는 느낌과 함께 수면에서 난반사되는 빛의 산란효과를 강조한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흐르는 강물을 그렸다. 모든 고향에 흘렀었을 강물을 그렸고, 작가가 서있는 지금여기의 시간 위에 흐르는 강물을 그렸고, 작가의 마음속에 흐르는 강물을 그렸다. 원래 고향에 흐르던 강이 지금여기 위로 차고 넘치고, 마침내 내 마음속에마저 범람한 강물을 그렸다. 이렇게 범람된 강물은 그 원천이 고향이란 점에서 모든 강물은 결국 그리움의 대상이다. 그래서 강물을 그린다는 것은 곧 그리움을 그린다는 것이다. 작가는 유리회화를 통해서 이처럼 존재에 대한 그리움이 투사된 강물을 그린다. 그 그림이 막막한, 가없는, 아득한 감정에 빠져들게 만든다. 강물 앞에 선다는 것, 그것은 밑도 끝도 없는 그리움에 사로잡힌다는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그 그리운 강물 앞에 서게 만든다. 

이상민(유리샌딩). 작가는 유리조형을 매개로 유년시절 물수제비의 추억을 그린다. 작가에게 유리판은 마치 결정화된 물과도 같다. 유리판의 평면이 정체된 듯 흐르는 수면과 통하고, 이면과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성이나 빛을 투과하는 투과성 그리고 외부환경을 반영하는 반영성이 그대로 물의 성질을 닮았다. 작가는 이처럼 수면에 해당하는 유리판에 물수제비를 조형하고, 수면에 일렁이며 퍼져나가는 파장이며 파동을 조형하고, 빛과 물의 상호작용을 조형한다. 그라인더를 이용해 유리판의 뒷면에 형태를 음각하는 것인데, 정작 정면에서 보면 음각은 유리의 투명한 성질 탓에 양각처럼 보인다. 형태며 덩어리가 유리판 속에 그대로 갇혀있다고나 할까. 그 형태며 덩어리는 그라인더로 간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반투명한 작업에서 두드러져 보이고, 아예 간 흔적을 없앤 투명한 작업에서 상대적으로 애매해 보인다. 반투명한 작업에서 덩어리가 강조된다면, 투명한 작업은 더 오묘한 느낌을 준다. 그렇게 투명한 유리조형작업은 물수제비(물방울)와 물의 경계를 허물고, 재료(유리)와 소재(물)의 경계를 허문다. 그리고 박물관 유적(그릇)을 조형한다. 쥘 수 없는 물을 형상화한다는 것, 담을 수 없는 유적을 조형한다는 것, 물수제비의 추억을 화석으로 만들어 간직한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시간을 조형한다는 것이다. 그렇담 어떻게 물수제비의 추억을, 부재하는 시간을 그릇에 담아낼 것인가. 작가는 그렇게 없는 듯 있는, 그림자와 실감을 놓고 다투는, 어쩜 처음부터 없었을지도 모를, 스스로 공과 허와 무의 표상일지도 모를 빈 그릇 앞에 서게 만든다. 작가의 오묘한 조형이 아니었다면 마주할 일이 없었을 귀한 일이다. 

임정은(큐브의 변주). 유리를 소재로 한 임정은의 작업은 유리에칭과 큐브 형태의 유리 덩어리, 그리고 여기에 거울이 더해지면서 환영적인 효과를 극대화한다. 유리 표면에는 주로 기하학적 형태의 큐브를 평면으로 그려 넣는데, 그렇게 그려진 큐브가 벽면에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실재와 그림자가 실체감을 두고 다툰다. 실재와 그림자, 실상과 허상, 실체와 환영이 경계를 허물고 넘나들어진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는 무엇이고 실재와 그림자를 가름하게 해주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 경계며 근거가 지워지면서 현실은 순수한 환영놀이로 이행한다. 이처럼 현실을 예술로, 현실을 놀이로, 현실을 환영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에 작가의 작업의 묘미가 있다. 그리고 무채색의 유리에칭 대신 착색유리를 도입하면서 시각적 이미지는 더 다채로워진다. 종전의 독립적인 오브제 위주에서 부분과 부분이 어우러져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를 이루는 설치작업으로 확대되는데, 조명을 매개로 반투명한 다채로운 색 그림자들이 서로 간섭하고 충돌하고 스며드는, 음악으로 치자면 합주(오케스트라)를 연상시키는 색채의 향연을 펼쳐 보인다. 그렇게 비록 이미지 자체는 고정돼 있지만 여기에 조명이 매개가 되면서 미묘하게 움직이는 빛의 스펙트럼을 보는 것 같은, 빛을 색깔로 환치(분광)시켜놓은 프리즘을 보는 것 같은 판타지를 열어놓는다. 유리를 매개로, 기하학적 형태며 큐브로 나타난 엄정한 형식논리를 매개로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지면서 무한 변주되는 일루전을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 

황선태(유리샌딩). 작가의 유리조형 작업은 주로 실내정경을 보여준다. 최소한의 가구와 구조가 단출한 느낌을 주는 실내정경에서 인상적인 것은 빛이다. 벽면에 난 유리창을 통해 비쳐든 빛이 바닥에 유리창 그대로의 또 다른 화면을 드리운다. 유리창 그대로라고는 했지만, 사실은 각도와 기울기에 따라 굴절된 화면이다. 조도의 차이와 굴절의 엄밀함이 실재감과 함께 감각적으로 다가온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정적인 실내정경 위로 다만 빛과 그림자만이 오롯한, 다만 빛과 그림자를 부각하기 위해 연출된 것 같은, 실내정경은 다만 빛과 그림자를 위해 부수되는 것 같은, 그런 상황논리가 감지된다. 부드럽고 따뜻한, 우호적이고 감각적인 빛의 질감이 인상적이다. 유리샌딩과 라이트박스만으로 이렇듯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진 환영적인 효과를, 일루전의 창출을 일궈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오정선(유리알 유희). 오정선은 원형의 볼록렌즈를 그물처럼 연결시켜 일종의 유리벽 내지 주렴을 만들었다. 똑같은 단위원소의 입자들이 반복되면서 만들어낸 패턴이 인상적이다. 유리알은 그 표면에 외부환경을 반영하면서 그 영역과 범주를 확장한다. 그 앞에 서면 하나의 존재가 무수한 개체들로 분화되고 복제되는 흥미로운 경험을 할 수가 있다. 자기복제를 통해 무한 증식하는 클론처럼 주체가 주체들로 분화되고, 우주가 우주들로 분절되는 착각에 빠져들게 만든다. 아마도 헤르만 헤세가 그린 유리알 유희가 이런 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후창(정체성 문제). 대개 덩어리는 불투명해서 그 속이 보이지가 않는다. 그런데, 만약 그 속이 보이는 덩어리가 있다면? 얼굴을 소재로 한 이후창의 작업은 유리의 투명한 성질 탓에 내 속에 내재화된 너(타자)의 시선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내가 너로 소외되고 분열되는 양상을 설득력 있게 전해준다. 작가는 한 덩어리의 유리 속에다가 두 개의 얼굴을 중첩시키는데 형태 바깥에 아로새겨진 얼굴과 유리 속에 들어있는 얼굴, 불투명한 얼굴과 투명한 얼굴, 양각된 얼굴과 음각된 얼굴, 이 두 얼굴이 하나의 덩어리 속에 머물고 있다. 그렇게 나는 나의 분신, 나의 아바타, 나의 도플갱어와 만난다. 외면적인 나와 내면적인 내가 대비되는 자기소외와 자기분열을 재확인시켜준다. 그렇게 내 속에 또 다른 내가 있다. 그 다른 나를 형태 위로 불러내기란 쉽지가 않다. 암시가 아니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작가는 투명한 유리 소재를 매개로 그 다른 나에게 형태를 부여해준다. 그 다른 나의 또렷한 실체감을 손에 쥐어준다. 이로써 작가의 유리조형작업은 유리를 일종의 덩어리로, 매스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조각과의 친근성을 예시해준다. 그러면서도 조각의 경계를 넘어선다. 이를테면 투명성을 통해 유리 속에 유리가, 덩어리 속에 덩어리가, 형상 속에 형상이 담겨지는 이중구조를 실현해 보인다. 이런 이중구조는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이를테면 나를 보고 싶다는 욕망)을 효과적으로 전달해주는데, 바깥 형상과 속 형상이 대비되고, 자기와 내적자아가 대면하고, 보는 나와 보이는 내가 분열되는 양상을 손에 잡힐 듯 실감나게 전해준다. 

유충목(정체성 문제). 작가는 피부를 매개로 몸담론을 주제화한다. 자신의 피부 구석구석을 사진으로 찍어 유리판에 전사해 열처리한 것이다. 타자의 피부색을 채집하고 분류해 만든 인덱스로 인종담론을 주제화한 그동안의 작업을 바탕으로, 자신의 피부를 채집한 아카이브로 자기정체성 문제를 다룬다. 크게는 피부 시리즈와 물집 시리즈로 나뉜다. 피부 시리즈는 마치 지문이 그런 것처럼 자기정체성이 등록되는 장으로서의 몸의 좌표를 탐색하는 것이며, 여기서 몸을 탐색하는 것은 그대로 정체성을 탐색하는 것에 연동된다. 그리고 물집 시리즈는 외관상 피부의 표면에 기생하는 이물질을 형상화한 것이지만, 의미론적으론 자기정체성을 형성시켜주는 타자, 자기정체성의 일부로서의 타자를 표상한다. 그리고 피부에 난 물집은 동시에 일종의 외상 곧 트라우마의 표상일 수 있다. 그렇게 작가는 잔털과 미세한 주름, 땀구멍, 털과 머리카락과 같은 피부의 세부를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탐색해 보여주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세부를 강조하면 할수록 차이가 부각되기는커녕 오히려 엷어진다는 점이다. 비록 자신의 몸을 채집한 것이지만, 보기에 따라서 그 몸은 우리 모두의 몸이기도 하다. 세부를 강조하면 할수록 차이가 줄어들고, 이질성을 부각하면 할수록 오히려 동질성에 가까워진다. 존재의 아이러니다. 혹은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의 아이러니다. 그렇게 작가는 자신의 몸을 탐색하면서, 사실은 자신을 형성시켜준 타자, 자신의 일부인 타자, 자신의 몸에 아로새겨진 타자의 흔적을 탐색하고 있었다. 

섬유조형의 경우 

차계남(사이잘삼). 사이잘삼과의 만남은 작가의 작업에 전기가 되었다. 이에 대해 작가는 사이잘삼은 유연하면서도 강인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다만 섬유만으로 자생 자립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도 했다. 사이잘삼은 섬유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조각처럼 견고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섬유와 조각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하나로 아우르는 조각, 바로 부드러운 조각이다. 어쩜 조각의 본성에 반하면서 조각을 확장시키는 탈조각이나 부드러운 조각개념이 국내에 미처 알려지거나 정착되기도 전의 일이다. 그렇게 작가의 입체조형작업은 멀리서 보면 영락없는 조각으로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사이사이로 빛이 투과되는 섬유질 구조가 보인다. 그렇게 작가는 사이잘삼을 소재로 하여 오롯이 섬유만으로 자생 자립하는 조각 작품을 만들 수가 있었다. 대개는 기하학적 형태의 구조물을 매개 변주한 설치작업이 지배적이다. 이를테면 도열한 각주 같은, 통로 같은, 터널지붕 같은, 위가 열린 역 터널구조 같은, 피라미드 같은, 역 피라미드 같은 입체구성을 보여주는데, 그 꼴이 미니멀리즘과의 상호영향관계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를테면 기하학적 형태의 최소한의 구조(도널드 저드)가 그렇고, 하나의 단위구조를 모듈 삼아 반복나열하거나 집적(아상블라주)하는 것이 그렇고, 오브제 자체로서 존재감을 주장하는 것(리터럴 오브제 혹은 즉자적 즉물적 오브제)이 그렇고, 이로써 관객이 오브제 주변을 배회하면서 지속하는 시간을 경험하게 만드는 일종의 연극성(마이클 프리드)이 발생하는 것이 그렇다. 이처럼 사이잘삼을 소재로 한 작가의 조형작업은 미술사적으로 모더니즘과 기하추상 그리고 미니멀리즘과의 형식논리를 공유한다. 이로써 섬유를 조각으로, 조각을 공간설치로, 공간설치를 무대미술로까지 연계 확장시키는 형식적 스펙트럼을 전개해 보여주고 있다. 

장연순(아바카 섬유). 작가는 섬유를 소재로 하여 추상적인 구조와 형태를 구현한다. 마의 일종인 아바카 섬유를 정련한 사각형을 모듈로 하여 이를 무수하게 중첩시킨 겹 구조를 보여주고 있는 작가의 작업에서는 빛과 공간 그리고 공기의 흐름이 중요한 요소로서 작용되어진다.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의 기하학적 형태를 기본형으로 이를 반복적으로 쌓거나 덧붙여나가는 방법으로 구조적인 다변화를 꾀하는데, 이 모든 과정이 풀 먹임과 바느질이라는 지난한 수작업을 통해서 수행된다. 수행은 작가의 작업에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즉 작가는 단순히 구조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속에 자신의 존재를 투사한다. 이러한 사실은 자신의 몸을 최대한 단순화시켜 육면체로 인식하고 있으며, 그 상자 속에 자신의 마음을 담는다는 작가의 고백에서도 확인된다. 쪽빛으로 염색한 섬유에 풀 먹임과 재봉만으로 조형적이고 건축적인 형태를 만들어내는가 하면, 겹 구조를 통해 드러나 보이는 쪽빛 염색의 은근하고 맑고 깊은 색감이 동양적인 관조의 세계에로 이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안과 밖이 서로 닫혀있으면서 열린, 막혀있으면서 통하는 역설적인 구조를 실현한다. 구별하면서 통하는 구조, 이는 어쩌면 섬유의 가장 일반적인 특징이며 본질적인 국면이랄 수 있는데, 작가는 그 성질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극대화한 것이다. 작가는 그 중첩된 망구조의 조형물을 <늘어난 시간>이라고 부른다. 시간이 늘어나는 것은 주관적인 경험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베르그송의 지속 개념도 주관적인 시간개념도 알고 보면 모두 주체의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게 신축성 있는 섬유 구조물이 주관적인 시간을 추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 이로써 무궁한 시간의 망 속에서 존재와 존재가 끊임없이 연기(緣起)하여 만나지는 것임을 주지시킨다. 

함연주(머리카락). 작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실 삼아, 그리고 투명한 레진을 접착제 삼아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이어 붙이는 과정과 방법을 통해서 마치 거미줄에 이슬이 맺힌 것 같은 환상적인 효과를 연출한다. 그리고 이런 망구조가 확대되면서 공간을 잠식하는데, 흡사 온통 거미줄이 점령하고 있는 오랜 폐가를 보는 것 같은 황량하면서도 서정적인 풍경을 전개해 보인다. 미세한 바람에도 하늘거리는 미약하고 섬세한 망 구조물이 덧없는 존재를 증명해 보이는 시간의 그물이며 미망의 그물 같다. 머리카락을 소재로 공간에 개입하고 공간을 구성한 공간설치작업으로서 공간 자체가 작품으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장소특정성이 강하게 작용하는 편이다(공간이 없으면 작품도 없다). 머리카락이라는 미약한 소재를 사용해 서정적인 공간을 연출한 것에서는 여성주의의 감성과 몸 담론(특히 애브젝션)에 대한 공감이 읽힌다. 작가는 이처럼 부드러운 소재를 매개로 하여 소재 특유의 장력을 가시화한다. 허공에 떠 있는 구조물이 너무나 미약해서 그 실체감이 쉽게 손에 잡히지가 않는다. 오히려 벽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조형물과 실체감을 겨룬다는 느낌이 든다. 이처럼 존재감이 희박한 조형물과 상대적으로 실체감이 뚜렷한 그림자가 어우러져 허공중에 실제와 허상의 레이어를 만든다. 작가의 작업은 부드럽고 우호적이고 심약한 소재 속에 일말의 긴장감을 숨기고 있다. <부드러운 긴장>이라는 주제도 그렇거니와 그 드러나 보이는 형식이 부드러운 조각의 특정성과도 통한다. 

이지현(훼손된 옷). 이지현은 옷을 소재로 작업한다. 그런데 그가 옷을 다루는 방식이 예사롭지가 않다. 멀쩡한 옷을 망치고 해체한다. 옷을 망치로 두들겨 그 조직을 해체해 너덜너덜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해체된 천 조각을 다시 한 땀 한 땀 바느질해 원형 그대로 복원한다. 복원이라고는 했지만, 그렇게 복원된 옷이 처음의 옷과 같을 수는 없다. 전체적인 형태는 여전할지 모르나 이미 조직이 변질되고 의미가 달라진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그런 헛짓을 하는가. 그 헛짓에는 무슨 의미심장한 의미라도 있는가(헛짓은 예술의 특수성과 관련이 깊다). 옷은 옷 이전에 천이다. 물성이다. 옷 이전에 천의 물성을 강조한 것이다. 옷이라는 기호(사회적 기호 그리고 문화적 기호)를 해체해 천이라는 물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렇게 어쩜 기호화된 사물대상, 기호에 가려진 사물대상의 본성(그리고 본질)을 복원하는 과정이며 행위일 수 있겠다. 그리고 옷은 인격과 그리고 감정과 무관하지가 않다. 바로 너덜너덜해진 옷이 상처를 암시하고 삶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어떤 서정적인 느낌(이를테면 분노와 증오 그리고 그리움과 같은)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너덜너덜해진 옷은 말하자면 존재론적 상처의 표상이며 물화된 형식일 수 있다. 얼핏 아름답고 우아한 드레스가 상처와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아름다움은 상처와 관련이 깊다. 하나의 옷이 아름답다면 그건 옷에 내재된 상처 때문이다. 내면적인 아름다움이라고 할까. 그렇게 작가는 옷을 해체하고 복원하는 과정을 통해서 내면을 외화 한다. 내적 아름다움에 걸 맞는 형상을 찾아주는 것이다. 

김주연(옷과 식물). 김주연은 식물을 키우는 작가다. 식물은 누구나 키우고, 또 식물을 키운다고 저절로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작가가 식물을 키우는 방식이 예사롭지가 않다. 그리고 그 예사롭지 않은 방식을 지지하는 인문학적 개념이 이숙이다. 다른 방식의 성장을 의미하는 불교용어다.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을 수 있고, 그 방식들이 다 존중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담았을 것이다. 그럼 이 개념이 작가의 작업에는 어떻게 적용되는가. 보통 식물은 땅에서 생장한다. 이숙이 아니다. 작가는 땅 대신 드레스에, 스웨터에, 저고리에, 소파에, 침대에, 그리고 심지어 신문더미에 식물을 심는다. 이숙이다. 그리고 그렇게 식물이 심겨지고 생장하는 토양(환경)이 달라지면서 매번 그 의미도 달라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생육기간이 짧은 식용식물을 키운다는 것이다. 생육기간이 짧아야 한자리에서 생과 사가 물고 물리는 생사순환의 고리를 보여줄 수가 있다. 작가의 작업은 생명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리고 주로 옷을 대지 삼아 식물을 생장시킨다는 점에서 흔히 에코페미니즘으로 분류된다. 다른 한편으로 생과 사가 순환하는 생생한 현장을 예시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바니타스(무상한 삶)의 또 다른 버전으로도 읽힌다. <존재의 가벼움>이란 의미심장한 제목도 이런 정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기타 

신미경(비누조각). 미술사책에서나 보았던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의 조각들, 그리고 중국이나 대만 국립박물관에서나 볼법한 고대 자기 유물들의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오롯하다. 전시를 위한 정경 같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이 유물들은 실물이 아니다. 비누조각이다. 실물 그대로 비누를 조각해 만든 영락없는 이미테이션이다. 보통 이미테이션으로 치자면 좀 더 견고하고 영속성 있는 재료로 만드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작가는 왜 하필이면 비누로 이 유물들을 애써 만든 것일까. 알다시피 비누는 영속적인 재료가 아니다. 일정기간 공기에 노출되면 건조되면서 바스라지고 종래에는 가루로 부서져 내린다. 더욱이 작가는 화장실에 조각을 비치하는데, 사람들이 세척을 위해 비누를 사용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마저 든다. 주지하다시피 작가가 재현해놓고 있는 대상은 하나같이 미술사에서 그 가치며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고대 유물들이고 미술작품들이다. 영원할 줄만 알았던 위대한 예술작품도 결국에는 영속적이지는 않다는, 존재치고 영원한 건 없다는 역설적인 사실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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