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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계남/ 침묵하는 형식과 열린 의미, 순수조형과 관념적 풍경

고충환

차계남/ 침묵하는 형식과 열린 의미, 순수조형과 관념적 풍경 


사이잘삼과 입체조형작업 

차계남은 섬유를 전공했다. 1980년 도일 후 주로 일본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90년대 들어서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작가로서의 주요 이력이 일본에서 이루어지고난 연후에 국내에는 뒤늦게 알려진 케이스다. 뜬금없이 전공이야기로 서두를 시작하는 것은 작가의 작업에 선구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작가의 국내 첫 개인전(1993년 인공갤러리와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 서문을 쓴 이일은 작가에 대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상대적으로 제한적인 분야로 치부되고 있는 섬유작가, 그러면서도 공예로서의 섬유예술의 한계를 뛰어넘는 작가, 그러므로 보다 넓은 의미의 조형작가, 짜는 작업의 개입 없이 자립하는 오브제를 창출한 작가라고 적고 있다. 당시 섬유예술에 대한 국내의 인식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당시 섬유예술은 짜는 작업(그리고 여기에 아마도 염색과 염직작업) 위주의 공예로 여겨졌고, 그런 풍토 하에서 작가의 작업이 이례적으로 공예로부터 탈피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고, 이로써 보다 넓은 의미의 조형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사실 작가의 작업에 대한 이 평가며 섬유예술에 대한 재정의는 진즉에 국내보다 일본에서 먼저 이루어졌고, 그런 만큼 작가의 작업에 대한 국내의 이해는 일본에서의 평가에 힘입은 바 크다. 이를테면 작가는 1992년 오사카 조각트리엔날레에서 은상을 수상했다. 그 당시 이미 일본에서는 작가의 작업을 섬유예술로 보지 않고 조각으로 보았으며, 조형예술로 보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어떻게 그런가. 어떤 연유로 일본에서는 작가의 작업을 조각으로 보고 조형예술로 보았는가. 그동안 작가의 작업에 무슨 변화라도 있었던 것인가. 이를테면 섬유예술로부터 전공을 바꾸기라도 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작가는 여전히 섬유예술의 틀을 벗어난 적이 없었고 지금도 그렇다. 예나 지금이나 작가는 다만 그 틀 속에서 자기만의 형식언어를 희구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러한 사실과 관련해 작가의 전시(1992년 일본 교토 소재 마로니에 화랑 개인전)서문을 쓴 기노시타 나가히로는 소재와 공생하면서도 소재로부터 독립한 작가, 사이잘삼이라는 지금까지 누구도 입체작품의 소재로 선택하지 않은 소재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현대미술작가로 평가하고 있다. 작가는 소재와 공생하고 있다. 여전히 섬유예술 고유의 재료와 물성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소재로부터 독립해 있다. 사이잘삼이라는 섬유재질을 소재로 입체작품을 구사하는데, 그건 심지어 조각에서마저 현대적이다. 
그렇다. 사이잘삼과의 만남은 작가의 작업에 전기가 되었다. 이에 대해 작가는 사이잘삼은 유연하면서도 강인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다만 섬유만으로 자생 자립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도 했다. 사이잘삼은 섬유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조각처럼 견고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섬유와 조각 사이 혹은 섬유와 조각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하나로 아우르는 조각, 바로 부드러운 조각이다. 어쩜 조각의 본성에 반하면서 조각을 확장시키는 탈조각이나 부드러운 조각개념이 국내에 미처 알려지거나 정착되기도 전의 일이다. 그렇게 작가의 입체조형작업은 멀리서 보면 영락없는 조각으로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사이사이로 빛이 투과되는 섬유질 구조가 보인다. 그렇게 작가는 사이잘삼을 소재로 하여 오롯이 섬유만으로 자생 자립하는 조각 작품을 만들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사이잘삼은 섬유질 구조를 가진 소잰데 어떻게 조각이 되고 입체조형작품이 될 수가 있었는가. 여기서 작가는 사이잘삼을 마치 종이를 떠내듯 채로 떠내고 프레스로 압착시키는 방법을 생각해낸다. 종이를 건져 올리는 방법으로 시트를 만들고, 시트를 다림질해 판판하게 편 다음, 접착제를 이용해 시트와 시트를 접붙여 입체로 만든 것이다. 그렇게 만든 입체는 영락없는 조각으로 보이는데, 여기에는 검은색 일색의 단색도 한 몫을 한다. 주로 정육면체나 직육면체의 기하학적인 형태에 단조로운 색상의 색채감정이 하나로 어우러지면서 통일성을 부여하고, 이로써 그 자체 매스를 내재하고 있는(적어도 외적으로 보기에 그렇게 보이는) 조각 고유의 조형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예외가 없지는 않았다. 이를테면 도일 후 작가의 첫 개인전(1984년 일본 교토 소재 마로니에 화랑)에서 작가는 사이잘삼을 소재로 한글자모와 같은 재현적인 작업을 했고(아마도 흔히 그렇듯 유학파 특유의 정체성 내지 주체성 문제를 주제화한 것일 듯), 여기에 알록달록한 색상실험을 선보인 바 있다. 그러나 재현도 색상도 여기까지다. 이후 적어도 입체조형에 관한한 기하학에 바탕을 둔 심플한 형태와 검은색 일색의 단조로운 색상이 작가의 작업을 견인하는 고유 언어가 되고 지배적인 코드로 자리 잡는다. 아마도 재현적인 요소 내지 성질보다는 순수조형에 끌렸을 것인데, 형식논리에 천착한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세대 고유의 조형생리가 반영되고 발현된 것일 터이다. 
그렇게 기하학적 형태의 시트를 공중에 매달아 아래로 늘어트린 작업이 공간연출, 공간개입, 공간창출을 떠올리게 만든다. 공간에 오브제가 개입되면서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비가시적인 역학이 작동하는(조형공간이 심리적 공간으로 전이되는) 공간 환경이 조성되는 것인데, 작가의 작업이 조각을 넘고 공간을 넘어 무대조형작업으로까지 확장되고 변주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해주는 대목으로 봐도 되겠다(무대 그러므로 어쩜 연극은 심리적인 공간 환경 내지 경험과 관련이 깊다). 실제로도 작가의 조형작업이 오페라를 위한 무대미술을 위해 제작 설치된 경우가 없지 않아서 이러한 사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처럼 시트를 이용해 공간 확장을 꾀하는 작업이 있지만, 대개는 기하학적 형태의 구조물을 매개 변주한 설치작업이 지배적이다. 이를테면 도열한 각주 같은, 벽체 사이로 지나가는 통로 같은, 터널지붕 같은, 위가 열린 역 터널지붕 같은, 피라미드 같은, 역 피라미드 같은, 그리고 유사정원 같은 입체구성을 보여주는데, 그 꼴이 미니멀리즘과의 상호영향관계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를테면 기하학적 형태의 최소한의 구조(도널드 저드)가 그렇고, 하나의 단위구조를 모듈 삼아 반복나열하거나 집적(아상블라주)하는 것이 그렇고, 오브제 자체로서 존재감을 주장하는 것(리터럴 오브제 혹은 즉자적 즉물적 오브제)이 그렇고, 이로써 관객이 오브제 주변을 배회하면서 지속하는 시간을 경험하게 만드는 일종의 연극성(마이클 프리드)이 발생하는 것이 그렇다. 
이처럼 사이잘삼을 소재로 한 작가의 조형작업은 일부 평면이 없지 않지만, 대개는 입체조형과 공간설치작업이 많다. 미술사적으론 모더니즘과 기하추상 그리고 미니멀리즘과의 형식논리를 공유하고 있는 편이다. 이로써 섬유를 조각으로, 조각을 공간설치로, 공간설치를 무대미술로까지 연계 확장시키는 형식적 스펙트럼을 전개해 보여주고 있다. 

종이와 먹, 읽을 수 없는 텍스트 

사이잘삼과의 만남이 작가의 작업에 전기를 마련해주었다면, 이후 작가의 작업은 또 한 차례 전기를 맞는다. 평소 작업과 함께 서예와 사군자를 공부하다가 종이라는 소재에 눈 뜨게 된 것이다. 2009년 즈음의 일이다. 반야심경과 같은 고전 문헌을 옮겨 쓴 종이를 일정한 폭으로 잘게 자른 연후에, 이를 꼬아서 길고 가녀린 끈을 만든다. 일종의 종이로 만든 실로 보면 되겠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끈을 촘촘하게 캔버스에 붙이는데, 세로로 길게 붙여 나간다. 특이한 건 사실상 거의 모든 화면에서 세로로 붙인다는 점이다. 가로가 없다. 아마도 가로보다 세로가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서일 것이다. 형태를 지각할 때 생기는 심리현상을 학문적 대상으로 한 형태지각심리학(게슈탈트이론)과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새삼스레 작가가 섬유를 전공한 사실을 되새긴다면, 세로로 길게 촘촘한 화면은 직물구조를 닮아있기도 하다. 
사실 엄밀하게 말해 직물은 각각 씨실과 날실이 교직되는 교차구조를 하고 있다. 이런 직물구조에 말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작품이 없지는 않다. 날실과 씨실이 중첩되고 포개진 겹구조 혹은 층구조 혹은 망구조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 있지만, 대개는 세로로 촘촘한 평면작업이 지배적이다. 사이잘삼을 소재로 입체조형작업을 끌어냈듯, 그리고 그렇게 소재 고유의 물성과 공생하면서도 소재로부터 탈피했듯, 실(종이실)을 꼬고 직조하는 것과 같은 섬유 고유의 프로세스를 통해 섬유와는 다른 자기만의 평면작업을 일궈낸 것이다. 사이잘삼을 소재로 한 입체조형작업도 그렇고 종이를 소재로 한 평면작업도 그렇거니와 그 이면에는 어쩜 섬유전공이라는 베이스가 여전히 작용하고 있고, 이로써 섬유예술의 표현 영역을 확장 심화시킨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섬유 고유의 물성(종이도 섬유다)과 프로세스 그리고 아마도 생리마저 공유하면서도 정작 섬유에 한정되지는 않는, 그리고 그렇게 그 자체 자생하는 오브제, 스스로 자립하는 형식논리를 얻고 있다고 할 수가 있겠다. 
크게는 각각 사이잘삼에서 종이로, 입체조형에서 평면으로 전환되고 분화된 점이 두드러져 보인다. 여기에 검은색 일색에서 흑과 백이 어우러진 색채감정으로의 변화 또한 주목된다. 여전히 검은색(엄밀하게는 먹색)에 방점이 찍혀져 있지만 여기에 흰색(엄밀하게는 여백)을 끌어들여 화면에 변화를 유도하고 있는데, 흰 종이에 먹으로 쓴 서체를 소지로 한 것에 연유한다. 그렇게 흑과 백이 어우러진 화면이, 흑과 백으로 절제된 색채감정이 응축된 스케일과 함께 풍경과 같은 재현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를테면 물보라를 일으키며 쏟아져 내리는 폭포 같은. 운무가 자욱한 산수 같은. 내면의 산수 같고, 내면의 풍경 같은. 그리고 신선이 사는 선경 같은. 혹자는 풍경보다는 내면의 응어리가 맺히고 풀리는, 기가 흩어지고 모이는, 그런 관념적인 경험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그렇게 화면은 의미론적으로 열려있다. 비결정적이다. 가변적이다. 유동적이다. 변태적이다. 저마다 내면의 사정에 따라 세상의 모든 풍경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그리고 그렇게 아무런 풍경을 떠올려도 무방하지만, 어떤 풍경으로 특정할 수는 없는 풍경이다. 일루전이다. 허상이다. 현혹이고 미혹이고 유혹이다. 무슨 말인가. 작가가 종이에 먹으로 옮겨 쓴 반야심경의 핵심은 공이다. 색즉시공공즉시색이다. 색이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다. 있는 걸 있다 하고 없는 걸 없다 하는 것은 모두 마음(엄밀하게는 욕망하는 마음)이 불러일으킨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감각적 현실도 없고, 그것을 가리켜 부르는 이름(그러므로 개념)도 현실이 아니다. 따라서 그 현실에 미혹될 일도 없다. 
작가의 그림이 불러일으키는 감각적 현실은 결국 이런 관념적 현실에 눈뜨기 위한 길잡이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숨겨진 텍스트를 통해 드러내고 싶었던 현실, 읽을 수 없는 텍스트를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현실이라고 한다면 너무 나간 것이라고 할까. 적어도 작가의 그림 앞에 서면 삶과 죽음, 그리고 감각적 현실과 관념적 현실이 비교되는 것과 같은 거대담론을 떠올리게 되는데, 아마도 모든 말(그러므로 의미 그리고 개념)을 빨아들이는 흡사 침묵과도 같은 검은색 때문일 것이고, 흑과 백의 대비가 불러일으키는 관념적 현실 탓일 것이다. 대개는 기하추상이며 순수조형으로 다가오는 작가의 다른 작업들과 사뭇 구별되는 부분이다. 작가의 작업에 또 다른 전기가 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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