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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형/ 존재의 알레고리, 질문하는 돌과 의심스런 털 뭉치

고충환

이주형/ 존재의 알레고리, 질문하는 돌과 의심스런 털 뭉치 


황제에 속하는 동물, 향료로 방부 처리하여 보존된 동물, 사육동물, 젖을 빠는 돼지, 인어(人魚), 전설상의 동물, 주인 없는 개, 이(곤충) 분류에 포함되는 동물, 광폭한 동물, 셀 수 없는 동물, 낙타털과 같은 미세한 모필로 그릴 수 있는 동물, 기타, 물 주전자를 깨트리는 동물, 멀리서 볼 때 파리같이 보이는 동물(미셀 푸코. <말과 사물>의 서론 중에서).  

하이데거는 진리를 과학적 진리와 예술적 진리로 구분한다. 그 자체 증명의 대상이면서 실제로 증명을 해보면 증명이 되는 종류의 진리가 과학적 진리다. 이에 반해 처음부터 증명의 대상이 아니거니와 실제로 증명을 해봐도 증명이 안 되는 부류의 진리가 예술적 진리다. 예술적 진리는 과학적 진리가 간과하거나 접근 불가능한 진리를 드러내고 심층적인 진리를 드러낸다. 
이처럼 과학적 진리는 증명 가능성을 그 근거로 하는 만큼, 그렇다면 과학적 진리는 완전한가. 이에 대해 미셀 푸코는 유보적인 답을 내놓는다. 원래 보르헤스가 인용한 것을 재인용한 고대 중국의 한 백과사전에 수록된 동물 분류법 항목을 보고 푸코는 지시 대명사 바로 그것에 대한 사고가 절대적으로 불가능함을 느꼈다. 황제에 속하는 동물이라니. 도대체 이 분류로부터 어떤 동물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동물들을 이렇게 분류하게 만든 근거는 무엇인가. 도대체 이 분류법은 정통성을 부여받은 분류법(상식과 합리, 독사와 클리셰)을 아무렇지도 않게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푸코는 지식을 권력과 헤게모니의 산물로 본다. 원래 다양한 분류법(지식)이 공존했는데, 그 중 하나의 분류법(지식)이 헤게모니를 쥐게 되면서 정통성을 부여 받는다. 그리고 다른 분류법(지식)은 사장된다. 정통성을 부여 받은 분류법이 과학적이어서, 객관적이어서, 보편타당해서, 상식과 합리에 부합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이것들은 모두 전제조건으로서보다는 사후적으로 추인하는 과정에 동원된 목록들에 지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사장된 분류법이 그것들을 결여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전적으로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상당할 정도로 그렇다. 문화가 그렇고 관습이 그렇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상징투쟁과 인정투쟁도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토마스 쿤의 연속성 개념과 바슐라르 가스통의 불연속성 개념도 있다. 토마스 쿤에 의하면 과학(정상성 과학)은 실패와 수정, 검증과 합의로 이어지는 점진적이고 연속적인 과정을 거친다. 이에 대해 바슐라르 가스통에 따르면 과학은 다만 돌발적인 사태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불연속적 연쇄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전적으로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상당할 정도로 그렇다. 여기에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예술은 재현 불가능한 것이면서 매번 일회적인 사건이라고 했는데, 일맥상통한 경우로 보면 되겠다. 예술과 과학이 그리 멀지 않은 것임을 밝히고 있는 대목으로 봐도 되겠다. 특히 상상력은 예술에서 결정적이지만, 상당할 정도로 과학에서도 그렇다. 이처럼 상상력을 매개로 예술과 과학이 하나로 만나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여기서 바슐라르 가스통의 물질적 상상력 개념은 의미심장하다. 물질을 매개로 한 상상력, 물질과 상상력, 과학과 예술과의 상호 유기적인 관계에 대한 코멘트로 봐도 되겠다. 
이주형의 작업이 겨냥하고 있는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상상력은 과학도 매개하고 예술도 매개한다. 과학이 (비)논리적인만큼 예술도 (비)논리적이다. 과학이 (비)실제적인만큼 예술도 (비)실질적이다. 다만 그 종류며 경향, 대상과 방법에 차이가 있을 뿐.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과학과 예술이 하나로 만나지는 접점을 향하고 있고, 특히 인식론적 예술(어쩜 개념미술과도 통하는)을 다루고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김춘수의 시 <꽃> 중에서). 

우리에게 이름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름은 어떻게 생성되는가. 그저 내가 부르면 몸짓이 대상이 되는가(이주형). 

작가는 근작의 주제를 <단어의 이름>이라고 부른다. 단어의 이름? 단어 자체가 이미 이름이 아닌가. 그렇담 이름의 이름? 이런 동어 반복적이고 메타적인 경우는 아닌 것 같다. 익히 알려진 단어, 특히 예술과 관련해서 알만한 단어에 다른 이름을 붙여 부른다. 이를테면 아트에 아크라타 또는 오레테 같은 다른 이름을, 파인아트에 페이르나에스 암루타 같은 다른 이름을, 륄(실제)에 라에르아틀라 같은 다른 이름을, 그리고 판타지의 경우에는 프라그나이트오세이 같은 다른 이름을 붙여 부르는 식이다. 
이로써 기왕의 이름이 또 다른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번역인가? 대첸가? 여기서 새롭게 부여받은 다른 이름들은 하나같이 그 어감이 라틴어 같다. 그렇담 기왕의 이름이 유래했을 라틴어 어원을 찾아서 표기한 것인가.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그렇담 도대체 이 오리무중의 단어들의 출처는 어디인가. 바로 원소 주기율표다. 이로써 아트와 원소 주기율표가 상관관계에 놓이게 되는데, 여기서 작가는 나름 규칙(어쩜 문법)을 적용하고 있다. 기왕의 단어를 이루는 각 철자에 해당하는 원소 주기율표를 찾아 하나로 조합하는 과정을 통해서 일종의 조어를 만들어낸 것이다. 
앞서, 번역이라고 했다. 이로써 작가는 아트를 원소 주기율표로 환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과학으로 번역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생각한 바를 개념으로 그리고 드로잉(이러저런 원소들을 포함하고 있을 광석을 소재로 한)으로 예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웬 논리적 비약, 이라고 하겠지만 꼭 그렇게 볼 일만은 아니다. 실제로 예술을 과학으로 그리고 과학을 예술로 표현하거나 환원하거나 번역하는 일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거니와, 이미 현대미술 현장에서 낯선 경우도 아니다. 앞서, 다른 이름들의 어감이 라틴어 같다고 했다. 어쩜 신화 속 주인공들의 이름 같다. 여기서 다시, 작가는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신화 속 주인공들을 소환하고 있는 것이다. 알다시피 신화는 이야기들의 이야기, 원형적 이야기, 그러므로 이야기들의 원천이며 특히 상상력의 원천이다. 이로써 작가는 예술도 과학도 그 먼 조상이 다름 아닌 상상력임을 주지시키는 한편(이를테면 천문학의 조상은 점성술이며, 화학의 조상은 연금술), 상상력을 매개로 예술과 과학이 하나로 만나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예술은 배열과 배치의 기술이다. 배열이 달라지면 의미도 달라진다. 배열은 관계의 기술이다. 그러므로 관계가 달라지면 의미 또한 달라진다. 그러므로 예술은 탈맥락과 재맥락의 일련의 과정(조작과정?)을 통해서 또 다른 의미를 생성하고 파생시키는 의미론적 기술이다. 그 기술을 작가는 환상영역이라고 부른다. 작가에게 예술은 말하자면 환상영역을 여는 것이다. 환상영역? 그렇다면 환상영역은 어디에 있으며, 또한 어떻게 열리는가. 
그건 알고 보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우선, 뒤통수에 있다(포자 시리즈). 분명 존재하지만, 스스로는 결코 볼 수 없는 뒤통수를 통해서 존재론적 한계와 불안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얼굴에 있다(초상 시리즈). 온통 털로 뒤덮여있어서 알아볼 수 없는 얼굴을 통해서 존재에 대한 불신을 표현한 것이다. 나는 나를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 어쩜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다시금 이런 존재론적 한계를 의미할 것이다. 나는 내가 아니다. 나는 내가 하는 말 속에 들어있지 않다(자크 라캉). 나는 타자다(랭보).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리어왕). 환상영역은 바로 이런 현대인의 이중분열과 다중인격 속으로 열린다. 그리고 내가 내뱉는 말들 속에 있다(말풍선 시리즈). 내가 던지는 말들이 과연 지시적이고 명확한지에 대한 의문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말들의 의미는 계속 지연되고 보류된다(자크 데리다의 차연). 계속 미묘한 차이를 만들어내면서 미끄러진다. 내가 하는 말의 의미는 결코 너에게 가 닿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쩜 실패는 필연이다. 나는 네가 아니고, 너 또한 내가 아니므로. 
그렇게 작가가 열어놓는 환상영역은 한눈에도 실패와 한계의 인정처럼 보인다. 그리고 작가는 그 실패를 본질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고, 아마도 진실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사실 작가의 그림은 털 뭉치를 그린 것이다. 알 수 없는 털 뭉치, 오리무중의 털 뭉치, 자기 속에 수수께끼를 품고 있는 털 뭉치(예술은 질문의 기술이다)를 그린 것이다. 그것이 최소한의 형태적 유사성에 힘입어 뒤통수 같이 보이고, 얼굴 같이 보이고, 말풍선 같이 보일 따름이다. 질 들뢰즈의 00같은, 00처럼 철학을 떠올리게 되는 대목이다. 우리는 결코 지시적이고 명확한 것에 대해 말할 수 없고, 지시적이고 명확하게 말할 수가 없다. 다만 언제나 00같은, 00처럼, 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 그렇게 매번 나는 네가 아니라는 사실을, 너는 결코 내가 될 수 없다는 사실(그리고 차이)을 확인할 수가 있을 뿐. 그렇게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아리송한 털 뭉치 그림은 존재론적 조건으로서의 실패와 의심, 불신과 불안, 다름과 차이의 표상이다. 질문하는 존재의 알레고리다. 

여기에 그림이 하나 있다. <무의미의 승리>다. 원래 피터 브뤼겔의 원작 <죽음의 승리>를 차용하고 각색한 것이다. 원작 <죽음의 승리>는 알다시피 중세서양의 대표적인 알레고리 테마 중 하나를 그린 것이다. 이를테면 천상의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의 알레고리(거세된 욕망을 테마로 한), 죽음의 알레고리(금욕을 테마로 한), 바니타스 알레고리(무상한 삶을 테마로 한)와 같이 대개는 중세 기독교 이데올로기가 반영된 전형적인 알레고리 중 하나다. 여기서 원작을 차용하고 각색했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차용과 각색이 무색할 정도로 전혀 다른 두 개의 그림이 되었다. 더욱이 <죽음의 승리>라는 원제가 <무의미의 승리>로 바뀌었다. 죽음의 승리란 사실상 무의미의 승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어쩜 죽음처럼 철저하게 무의미한 것도 없을 것이므로. 실제로 작가의 그림을 보면 황량한 대지 위에 떠있는 알 수 없는 유기적 덩어리가 죽음의 그림자처럼도 보이고 무의미의 화신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무의미의 의미는 단순히 죽음을 대체하는 의미 이상이다. 모든 결정적인 의미로 굳어진 것들, 이를테면 상식과 합리, 선입견과 편견, 독사와 클리셰, 그러므로 어쩜 지식을 의심하는 태도를 표상한다. 그리고 그런 의심을 기꺼이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여기서 작가는 혼란에 빠진다. 이것에 이름을 붙여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내버려두어야 하는지, 과연 이건(기왕의 이름을 굳이 다른 이름으로 고쳐 부르는 일) 의미가 있는 일인지 하는 번민에 빠진다. 무의미는 바로 이 혼란에 붙여진 이름이고 이 번민을 부르는 이름이다. 
여기서 다시,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환상영역을 설정하고 여는 것이라고 했다. 모든 결정적인 의미로 굳어진 것들, 이를테면 상식과 합리, 선입견과 편견, 독사와 클리셰, 그러므로 어쩜 지식 바깥(모리스 블랑쇼)에 의미가 자생할 수 있는 영역을 설정하는 것이다. 의미의 바깥에 의미가 자생할 수 있는 장소를 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그림은 작가의 작업 자체와 전체, 그러므로 어쩜 예술가적 태도를 표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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