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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춘오/ 근원, 그 첫 순간의 떨림을 그리워하다

고충환

류춘오/ 근원, 그 첫 순간의 떨림을 그리워하다 


일부 추상회화, 예컨대 그림 자체가 주제고 형식 자체가 주제인 그림에서처럼 주제가 무의미한 경우가 있지만, 그런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대개 주제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함축하는 인문학적 배경으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류춘오의 회화주제는 근원이다. 개별그림의 제목도 근원이고, 주제도 근원이고, 시종 근원이다. 이쯤 되면 추상회화의 무제에서처럼 그저 형식적인 경우 아니면 관성적인 경우로 보아 넘길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근원은 작가의 작품세계를 견인하는 전제가 되고 있다. 여기서 근원은 대략 세 가지 정도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작가의 오리지널리티를 추적하고 재구성하게 해주는 작가의 작품세계가 유래한 근원, 페인터로서의 작가적 아이덴티티를 밝혀주는 회화의 근원, 그리고 페인터 이전에 존재로서의 근거가 되고 있는 존재의 근원을 동시에 의미하고 함축한다. 이 세 인격과 세 근원이 작가의 작가적 아이덴티티 속에 녹아들어 근원이라는 이름을 얻고, 작가의 작품세계를 열어 놓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만큼 이 세 근원의 유기적인 관계를 캐는 것이 곧 작가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고 밝히는 일이 될 것 같다. 

작가의 작품세계가 유래한 근원(소재?)은 자연으로 보인다. 여기서 자연은 다만 자연에 한정된다기보다는 자연과 인간, 그리고 그 상호관계를 포괄하는 광의의 범주개념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런데 정작 작가의 그림 어디에도 자연은 없다. 그러나 사실은 자연이 없는 것이 아니다.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는 자연, 감각적 실재로서의 자연, 재현적인 자연이 없을 뿐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마주했을 자연은 어디에 있고 어떻게 있는가. 작가는 자연 자체를 직접 그리지는 않는다. 자연에 대한 인상을 그리고 기억을 그린다. 자연과의 상호교감을 그리고 감정이입을 그린다. 그 긴밀했을 순간을 그리고 흔적을 그린다. 작가로부터 자연 쪽으로 건너간 것과 자연으로부터 작가에게로 건네진 것 간의 상호 긴밀한 관계를 그렸다. 무슨 말인가. 그 자체로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관계를 어떻게 그릴 수가 있는가. 그리고 여기서 관계란 뭘 의미하는가.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 중 가장 많이 알려진 경우로 치자면 예술은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고 비감각적인 것을 감각의 층위로 끌어올리는 일(표현)이다. 자연과 마주했을 때 일어난 일 모두가 상호교감의 성분이 되고 감정이입의 질료가 되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자연과 마주했을 순간 불어온 바람이, 꽃잎에 맞닿을 것 같은 숨결이, 지저귀는 새 소리가, 아롱거리는 햇살이, 수면에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내뱉어진 한숨이, 몽롱한 기억과 되새기고 싶은 그리움이, 그 경험의 총체며 그 사건의 전체가 성분이 되고 질료가 되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과 자연 자체, 물리적 자연과 자연성, 피직스와 나투라를 구분한다. 아마도 자연 자체, 자연성, 나투라, 그러므로 자연의 원동력, 자연의 원인, 자연의 근원이 성분이 되고 질료가 되었을 것이다. 
이로써 그 관계의 실체며, 또한 그 관계를 어떻게 그림으로 옮겨 그릴 수 있는지의 대략이 밝혀졌지만, 그래도 미진한 부분은 남는다. 이를테면 자연의 원동력, 자연의 원인, 자연의 근원을 어떻게 가시화할 것인가. 기? 원형? 흐름? 결? 비록 그 자체로는 정해진 형태도 꼴도 색깔도 질감도 따로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암시할 수는 있다. 여기서 다시, 예술은 그러므로 암시의 기술이다. 그려진 걸 통해서 미쳐 그려지지도 않은 무엇인가를 떠올려주는 기술이다. 얼핏 무분별해 보이는 흔적과 자국(회화)을 통해서 분별한 무엇(근원)을 상기시키는 기술이다. 결국 감각이 가닿을 수 있는 최대치는 상기까지이다. 감각은 말하자면 관념을 상기시키고(플라톤), 관념에로의 길을 터준다(다시, 아리스토텔레스). 
이처럼 작가의 그림에서 흔적과 자국은 자연의 관념을, 자연의 원형을, 자연의 근원을, 그리고 어쩜 존재의 근원을 상기시키기 위한 도구며 과정으로서 제시된다. 이를 위해 작가는 그리고 지우고 재차 덧그리기를 수도 없이 반복 수행한다. 그 과정에서 밑칠 혹은 먼저 그린 이미지가 설핏 드러나 보인다. 그리고 그렇게 밑칠과 덧칠이, 밑그림과 덧그림이 레이어를 이루면서 하나의 층위로 포개진다. 그리고 여기에 분방한 때론 머뭇거리는 붓질로 고착된 비정형의 얼룩(타시즘)과 우연을 가장한 흩뿌리기(드리핑)가 중첩된다. 때로 화면 위로 물감이 마구 흘러내리다 맺히는데, 마치 완료형을 거부하는 몸짓처럼 읽히고, 항상적으로 이행 중인 회화에 대한 표명처럼 읽히고, 마찬가지로 항상적으로 변화하는 자연의 표상처럼 읽힌다. 그리고 여기에 때로 마치 수묵화의 선염법에서처럼 안료가 부드럽게 퍼져나가는 효과를 꾀하기도 하고, 스텐실기법이나 프로타주 기법과 같은 일종의 변형된 판법을 도입해 회화적 질감효과를 꾀하기도 하고, 한지 콜라주를 통해 색면 구성을 확장하고 심화시킨다. 특이한 것은 때로 실에 물감을 묻혀 그리는 것으로 붓질을 대신하기도 하는데, 아마도 회화적 관성을 탈피하기 위한 시도로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이처럼 우연하고 무분별한 흔적과 자국으로 남은 작가의 그림이 자연의 근원을 상기시키는데, 이때의 자연의 근원은 회화의 근원과 만나진다. 여기서 근원은 기원과는 그 의미의 결이 다르다. 회화는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시작이 됐는가를 밝히는 것이 기원이라면, 회화의 근원은 회화의 바탕 곧 본질에 해당한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회화의 본질은 모더니즘패러다임과 형식적 환원주의로 알려져 있다. 회화로 하여금 회화이게 해주는 계기로 치자면 어떤 의미내용이나 메시지보다는 순수한 형식요소와 형식논리가 결정적이다. 이를테면 점 선 면 색채 양감 질감과 같은 형식요소와 그것들이 서로 충돌하거나 어우러지는 조형관계가 그림을 만든다는 논리다. 자연의 근원이며 존재의 근원과 같은 소재 혹은 주제의식을 전제하고 있음에도, 정작 작가의 그림은 추상으로 보이고 실제로도 그렇다. 앞서 예술은 암시의 기술이고 상기의 기술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어쩜 작가의 그림은 자연의 근원(다르게는 자연의 생리)을 암시하고, 존재의 근원(혹은 존재의 생리)을 상기시키는 추상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암시와 상기를 매개로 추상과 자연, 추상과 존재의 경계를 넘나든다. 아마도 형상미술보다는 추상미술에 정서적 교감이 닿아있는 모더니즘 세대로서의 작가적 아이덴티티(혹은 세대감정)와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시간 앞에 서게 만든다. 오랜 회벽이나 박락된 벽면을 보는 것 같은, 색 바랜 존재의 흔적을 마주하는 것 같은, 때로 수평선 너머 아득한 존재를 대면하는 것 같은, 그런 시간의 화신을 보는 것 같다. 흔적과 자국, 잔영과 잔상이 아득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흔적은 남겨진 존재다. 잔영은 남겨진 상이다. 지금은 부재하고 없는 존재를 잔상(실제로는 없는 상 혹은 겨우 상의 기미)으로나마 되살리고 싶은 기억의 고집이고 집요한 그리움이다. 흔적을 그린다는 것은 결국 시간의 살(아님 시간이 존재에 남긴 흔적)을 그린다는 것이고, 부재하는 존재에 대한 그리움을 그린다는 것이다. 다시, 작가의 주제는 근원이다. 근원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자기가 유래했을(존재의 근원), 그림이 시작됐을(회화의 근원), 자연과 교감했을(자연의 근원) 그 첫 순간의 떨림을 그림 그리는 내내 간직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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