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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근, 세상의 모든 B급 인생들에게 바치는 오마주

고충환

김원근, 세상의 모든 B급 인생들에게 바치는 오마주 


파란만장. 파도의 길이가 만장이나 되는 삶이란 얼마나 고단할 것인가. 작가는 이 고단한 삶을 사각의 링 위에 부려놓는다. 링은 경쟁사회와 비정사회의 축도다. 도망갈 데도 도망갈 수도 없다. 그곳에선 오로지 죽느냐 사느냐를 결단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궁지에 몰린 햄릿의 탄식이 들려올 뿐이다. 사람들은 이 사생결단의 현실이 운 좋게도 자기를 피해간 걸 다행스러워하면서, 한편으로 이 사생결단의 현장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기꺼이 돈을 지불한다. 돈으로 남의 불행을, 궁지를, 위기를, 때로 합법적인 폭력을 사고파는 사회다. 속된 말로 돈이란 돌고 도는 것이므로(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필요는 없다) 나도 언젠가 남에게 내 불행을 전시하고 구걸하고 팔아야 하는 처지에 몰릴지도 모른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니 이판사판막가판이다. 모 아니면 도다. 케세라세라다. 사람들은 남의 불행에 관심이 없다. 내 불행이 너무 크므로. 내 불행을 미처 돌아볼 새도 없을 만큼 지대하므로. 그렇게 사람들은 남의 불행은 곧 나의 쾌락임을 증명하기 위해(어쩜 승자보다는 패자를 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고, 스스로를 조소하고 남들을 냉소하기 위해 9시 TV뉴스를 튼다. 그렇게 링은 경쟁사회와 비정사회의 축도다. 그리고 자신의 불행을 온몸으로 감수하고 발산해야 하는(여하튼 돈값을 해야 하는) 링 위의 선수는, 바로 나 자신이다. 

그렇게 작가는 링을 매개로 파란만장한 삶의 현실(그리고 현장)을 풀어놓는다. 상황조각이다. 각 복서와 스폰서(돈을 대는 사람) 그리고 코칭스태프가 등장인물로 출연하는 일종의 상황극을 연출한 것이다. 파란만장한 삶을 일종의 연극적 상황으로 축도한 것이다. 삶에 대한 비유가 여럿 있지만, 그 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인생을 연극에 비유한 것이다. 그렇게 어쩜 우리 모두는 인생이란 연극에 출연한 배우들일지도 모른다. 무대 위에서 쇼를 하도록 운명 지워진, 저마다 자신의 행복과 불행(어쩜 더 많은 경우에 있어서 행복보다는 불행)을 전시하도록 운명 지워진 광대들일지도 모른다. 연극은 현실의 축도다. 현실을 극화(과장)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단순한 현실의 뻥튀기는 아니다. 느슨한 현실을 촘촘한 현실로, 느긋한 현실을 긴박한 현실로 전이시켜(때로 필요하다면 낯설게 하기를 통해서) 혹 간과했을지도 모를 현실, 억압적인 현실, 그러므로 어쩜 진정한 현실의 민낯을 드러내고 폭로하는 것이다. 그렇게 연극은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현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이 상상보다 앞서 현실이 되고 전시되는 사회, 바로 전시사회(스펙터클소사이어티)를 되비치는 거울이다. 
여기서 작가는 조각가이자 연출가가 된다. 자신의 조각(출연인물)을 매개로 삶이라는 연극을 연출한 것이다. 그리고 연극에서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현실의 극화된 형식, 캐릭터, 전형과 반영을 키워드로 꼽을 수가 있다. 이를 위해 작가는 도망갈 데도 도망갈 수도 없는 사각의 링을 통해 경쟁사회며 비정사회의 현실을 극화된 형식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극화된 형식에 걸 맞는 캐릭터가 있어야 한다. 복서와 스폰서 그리고 코칭스태프다. 여기서 중요한 건 존재의 존재다움(하이데거)이다. 복서는 복서다워야 하고, 스폰서는 스폰서다워야 하고, 코칭스태프는 코칭스태프다워야 한다. 여기서 일종의 강조 화법 내지 과장법이 동원된다. 존재의 존재다움을 더 잘 부각하기 위해 느슨한 현실을 더 촘촘하게 짜야 하고, 느긋한 현실을 긴박하게 압축해야 한다. 그렇게 일종의 도상학이 적용되어야 한다. 캐리커처와 카툰에서처럼 잔챙이들을 다 쳐내고 존재의 굵은 선만 빼 올려야 한다. 그게 뭔가. 전형이다. 원래 전형은 반영이론과 함께 리얼리즘미학을 설파하기 위해 제안된 게오르크 루카치의 핵심 키워드 가운데 하나다. 이로써 현상의 전형적인 국면(사각의 링으로 축도된 극적 상황과 무정한 복서)을 통해 현실(경쟁적이고 비정한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예술의 지상과제로서 주어진다. 그리고 작가는 바로 그 과제를 수행한다.  
그렇다면 작가는 리얼리스트인가. 그렇게 보인다. 작가의 조각은, 작가의 조각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때로 과장되고 우스꽝스럽지만 저마다 자기를 대입시켜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쉽게 감정이입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공감을 자아내고 설득력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보편적인 감정에 호소해온다는 점에서 리얼리스트로 봐도 무방하겠다. 극적 연출과 과장된 형식, 해학과 코믹을 시대를 증언하기 위한 도구(문법)로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일종의 블랙유머(때로 무정하고 비정한 현실에서마저 설핏 웃음을 자아내는)에도 그 맥이 닿아있는. 

사실 리얼리즘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처음에 작가는 이 시대를 사는 보통사람들이며 선남선녀들을 조각했다. 길 위에서 흔히 마주칠 법한 사람들, 길 위에서 기다리거나 서성이는 사람들을 조각했다. 그건 그대로 영락없는 일상 속 모습 그대로여서 현실 속 아무데나 세워놔도 현실은 그대로 작가의 조각을 위한 배경이 되었다. 일상을 사는 보통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한 것이지만, 그렇게 보통사람들의 삶에 조명을 비추고 경의를 표한 것이지만, 그리고 그렇게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실천적 미학의 덕목을 획득한 것이지만, 그러나 별 볼일 없는 일상만큼이나 일상 자체만으로는 자칫 일상 속에 파묻히기 쉽다. 
그래서 작가는 별 볼일 없는 일상을 화들짝 깨울 필요를 느꼈고, 현실을 극화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캐릭터다. 원래 캐릭터는 작가주의 영화에서 동시대의 전형적인 현실을 반영하고 재현하고 대변한다. 당대적인 문제의식과 시대정신을 압축한 현실의 물화된 인격체로 보면 되겠다. 
그리고 작가는 이런 물화된 인격체로서 소위 조폭과 건달을 생각해낸다. 그리고 그렇게 깍두기머리에 금목걸이와 금팔찌를 두른, 꽃무늬 셔츠에 배 바지를 입은, 때로 짧게 다듬은 콧수염과 눈이 쪽 째진 전형적인 이미지의 조폭이 탄생했다(굳이 탄생이라고 표현한 것은 전형을 창조라고 본 루카치에 따른 것이다). 길거리를 가다보면 떼인 돈 받아드립니다 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볼 수가 있는데, 한 손에 스마트폰을 그리고 다른 손에 일수가방을 든 무뚝뚝한 사내(사채업자? 해결사?)와 오버랩 된다. 그런가하면 양손에 반쯤 녹아서 흘러내리는 아이스크림을 든 채 전전긍긍해 하는 까까머리 남자가 양철북의 오스카처럼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아이, 어른아이, 키덜트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연신 도도한 여자의 표정을 살피는 꽃을 든 남자에 순정남의 이미지가 겹친다. 그리고 여기에 흥미로운 것은 대개 남자가 여자를 안고 있는, 그래서 남자의 남자다움을 과시하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여기에 때로 이런 일반성에 반하는 경우가 있어서 주목된다. 거꾸로 여자가 남자를 안고 있는 것인데, 피에타의 세속적인 버전으로 볼 수 있겠고, 피에타의 말뜻처럼 연민을 자아내는(조폭이지만 밉지 않은? 약한 모습?) 경우로 볼 수 있겠고, 겉보기에 강한 남자 속에 숨어있는 어른아이가 부지불식간에 드러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렇게 작가가 빗어놓은 조폭 이미지 속에는 해결사와 어른아이 그리고 순정남이라는 다중복합적인 인격체가 하나로 동거하고 있다. 그리고 다만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알고 보면 우리 모두 이런 다중복합적인 인격체로서의 삶을 산다는 점에서 조폭은 조폭(특수성)이면서 동시에 보통사람들(보편성)의 초상이 된다. 

어쩜 작가가 조각으로 빗어놓고 있는 조폭 이미지는 지금(어쩜 샤프하고 스마트할지도 모를)과는 사뭇 혹은 많이 다른 모습이다. 조금은 무식하고, 조금은 어눌하고, 조금은 순진하고, 조금은 천진난만한 것이 빛바랜 아날로그 영화필름을 통해 본 것처럼 구닥다리 구시대 유물 같다. 한때 잘 나가던 시절을 추억하는 이웃사촌 같고 늙다리 아는 형님 같다. 그 이미지는 현실 그대로라기보다는 이본동시상영 영화관을 제집처럼 들락거렸던, 하루 종일 영화관에 죽치고 살았던, 영웅이 없는 시대에 영화 속 주인공(혹은 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조연)에게서 저마다 자기만의 영웅을 발견했던, 그리고 그렇게 폼생폼사만이 의미 있는 삶의 전부인줄 알았던 시절의 헐리우드키즈들의 생활감정과 판타지에 가깝다. 가난이 당연했던 시절에 유일한 돌파구였던 영화 속 빛이 빗어낸 환상에 가깝다. 일반화하기는 그렇지만, 지금은 권투중계를 하지도 않고 보는 사람도 없다. 권투는 이제 킥복싱과 닭장 속의 정글게임으로 바뀌었다. 이것과 비교해 보면 권투는 차라리 순진했고, 어쩜 거의 인간적이었다고까지 말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작가가 빗어놓은 복서가, 조폭이, 이웃사촌이, 늙다리 아는 형님이, 어쩜 별 볼일 없는 보통 사람들과 선남선녀들이 정겹고 살가운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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