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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날씨 맑음_3.1운동 100주년 기념전

고충환

1919년 3월 1일 날씨 맑음_3.1운동 100주년 기념전. 
역사를 해석하는 도구개념, 기록과 기억 그리고 기념. 


역사는 해석이다(크로체의 해석학으로서의 역사.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 곧 현재의 역사라고 했다. 좀 비약해서 말하자면 모든 과거는 현재라고 고쳐 부를 수도 있겠다. 과거에 의미부여하는 것, 그러므로 과거를 현재 속에 살아있게 하는 것이 현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해석은 헛소리다(파스칼 키냐르). 여기에 예술비평에 관한한 오독은 없다(움베르토 에코의 열린 예술작품)는 말도 있다. 저마다 문맥은 다르지만 이렇게 열거해놓고 보니 이것들을 하나로 관통하는 지점이 보인다. 바로 원전에 대한 주관적 해석의 의의를 인정하고 있는 점이다. 이 전언들 가운데 외관상의 표현만 놓고 보자면 가장 급진적인 경우가 단연 파스칼 키냐르가 될 것이다. 모든 해석은 헛소리다(문학이다?). 주관적인 첨언이고 부언이고 주석이다. 원전의 일부를 형성시키지만, 때론 롤랑 바르트의 작가적 텍스트에서처럼 또 다른 원전을 생성시키기조차 하지만, 원전이 없었더라면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첨언이고 부언이고 주석이다. 그러므로 해석은 어쩜 원전으로부터 파생된, 원전에 기생하는, 원전이 낳은 문학일 수 있다. 그렇게 역사는 해석을 매개로 해석을 넘어 문학이 된다. 
여기에 중간자 역할을 하는 것이 가다머의 지평융합 개념이다. 원전을 읽을 때 원전이 속한 지평과 해석자가 속해있는 지평 간의 융합현상이, 객관과 주관과의 융합현상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여하한 경우에도 원전에 대한 객관적인 읽기는 불가능하다. 해석자의 주관적 해석이, 해석자가 속해있는 현재상황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 혹은 현재의 역사라는 크로체의 말은 바로 이런 의미일 것이다. 역사는 현재상황의 반영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해석의 토대가 되고 있는 원전은 어떤가. 도대체 원전이 뭔가. 객관적인 원전은 가능한가. 역사 혹은 역사학으로 치자면 원전이란 기록사 혹은 기술사가 될 것인데, 그렇게 기록으로 혹은 기술로서 전수되는 원전은 객관적인 사실들의 기록이고 기술일 수 있는가. 어쩜 원전을 해석하는 사후적 행위는 차치하고라도, 원전 자체가 이미 해석이 아닌가. 이를테면 하나의 역사적 일이 있었다고 치자. 그것에 의미부여하고 성격을 부여하는 것은 사후적이다. 사후적으로 그 일을 사건 혹은 사태 혹은 사변 혹은 정변 혹은 운동 혹은 혁명으로 정의할 수 있다. 하나의 사건을 어떻게 정의하는지에 따라서 그 일의 의미도 성격도 달라진다. 그리고 거꾸로 그렇게 부여된 의미와 성격이 역사적으로 일어난 일(원전) 자체를 왜곡시킨다. 
역사적 사실 자체가 이미 최소한의 객관성을 결여하고 있다거나, 모든 역사는 다만 해석의 결과일 뿐이라는 생각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역사와 해석, 원전과 해석, 객관과 주관의 상호 간섭작용에 대해서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예술이 역사에 간여할 수 있는 가능성도 생긴다. 바로 상상력을 매개로 역사적 현실과 예술적 현실이 지평융합 되는 것이다. 

예술비평도 해석이고 역사도 해석이다. 그리고 전시 큐레이팅은 비평행위이고 해석행위이다. 역사를 테마로 한 이번 전시는 바로 이처럼 열린 해석에 근거해 역사를 비평하고 해석하는, 어쩜 역사에 견주어 현재를 비평하고 해석하는 행위를 수행하고 예시한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이를테면 이번 전시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형식으로 열렸다. 그럼에도 전시 어디에서도 3.1운동을 찾아볼 수는 없다. 3.1운동으로부터 직간접으로 파생된 문헌자료도 없고, 3.1운동을 테마로 한 예술작품도 없다. 아마도 박물관 전시라면 사정은 달랐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번 전시는 미술관 전시다. 그렇다면 사료전시와 이를 통한 계몽에 방점이 찍힌 박물관 전시와 어떻게 차별화할 것인가. 사료도 없이, 문헌도 없이, 파생상품(테마 예술작품)도 없이 어떻게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할 것이며, 더욱이 현대미술의 형식으로 기념할 것인가. 여기서 전시는 열린 해석(3.1운동을 우회하는 혹은 에두르는 해석)을 매개로 그때보다 지금에, 역사적 현실보다 예술적 상상력에 무게중심이 실리는 쪽을 택한다. 
이를테면 전시제목 <1919년 3월 1일 날씨 맑음_3.1운동 100주년 기념전>에서 1919년 3월 1일은 그때와 그날로 나타난 역사적 현실이다. 그러나 날씨 맑음에 대해선 그 경우가 다르다. 굳이 당시 기록을 역 추적해 그날 날씨가 실제로 어땠는지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영 없지는 않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그날 실제로 날씨가 어땠는지에 대해선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날씨 맑음은 임의적인 것이다. 의미부여한 것이다. 해석이다. 오늘이고 지금이다. 그런 만큼 날씨 맑음으로 1919년 3월 1일을 해석한다는 것이고, 오늘 지금의 시각으로 그때 그날을 해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시각이 맑은 날씨다. 3.1운동을 긍정적 에너지와 밝은 기운의 원천으로 보고, 그 기운의 현대적 의미와 동시대성을 조망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전시는 각 기록과 기억 그리고 기념을 키워드로 했다. 서로 구분되면서 유기적으로 연결된 세 섹션으로 보면 되겠다. 3.1운동 자체보다는 3.1운동을 계기로 본 역사적 현실을 해석하는 세 가지 도구개념들로 봐도 되겠다. 
먼저 기록 섹션에선 의친왕의 딸 이해원 옹주와의 인터뷰를 통해 조선황실의 비극적 종말을 다룬 이상현의 다큐멘터리 영화 <조선의 낙조>(2006), 당시 현장교육자의 기억을 받아쓰는 형식으로 지역의 교육변천사를 복원하고 재구성한 조동환 조해준 부자 작가의 지역연구 드로잉 시리즈 <정읍, 일제강점하의 식민통치 시기부터 한국전쟁까지>(2005-2017), 결혼사진이나 단체사진과 같은, 흐릿한 기억처럼 빛바랜 사진 속 보통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재현한 안창홍의 사진회화 <아리랑>(2012)과 <기념사진>(2017), 당시 일상적인 거리 모습이며 삶의 풍경을 소재로 한 김우조의 목판화 <50년대 회상>(1968) 등이 있다. 
이 섹션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주변인 아니면 익명인, 보통사람 아니면 지역민들이다. 재현되는 장면 역시 일상적인 모습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무슨 말인가. 종래 기록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던 거대서사와 연역적 역사(어떤 전제로부터 시작하고 기술하는 역사) 대상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고 모습들이다. 이처럼 역사기술대상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역사대상으로 편입시켜 역사를 기술하는 방법론에 있어 대변혁을 가져온 것이 아날학파다. 거칠게 말해 밑으로부터의 역사며 잡다한 것들의 역사다. 일상적인 것들의 역사란 점에서 미시서사고, 적어도 논리적으로만 보면 구조주의(혹은 연역적) 역사에서와 같은 어떠한 틀도 전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귀납적 역사다. 미술사로 치자면 신미술사, 대중문화로 치자면 문화과학이 모두 아날학파의 범주에 속한다. 신미술사도 문화과학도 모두 1960년대 영국 태생이며, 그것이 가져온 역사기술의 변혁에 대해서는 가히 코페르니쿠스적 전기랄 만하다. 그 결은 좀 다르지만, 프로이트의 <억압된 것들의 귀환> 논의에 힘입어 되돌아온 것들, 이를테면 정신분석학, 몸담론, 퀴어담론, 타자들의 담론, 그리고 페미니즘 담론이 모두 그 자장 속에 있다. 그리고 담론은 주지하다시피 작은 역사며 역사소에 해당한다. 기록섹션에선 이처럼 역사의 주변인들과 그네들의 미시서사를 역사적 현장 위로 소환해 그 삶의 의미며 존재의미를 강조한다. 

그리고 기억 섹션에선 겸제 정선의 <단발령망금강>, 1910년에 간행된 <경성시가전도>를 비롯한 각종 근대건축물 드로잉, 그리고 여기에 북한 생활포스트 이미지, 조선조말 생활풍속도와 매체사진을 차용하고 재구성한, 그럼으로써 의미론적으로 그때와 지금을, 과거와 현재를, 서울과 평양을 하나로 연결한 김보민의 <렬차>(2019), 그리고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격변으로 인해 현재 타국에서 살고 있는 재외 동포들의 초상사진과 인터뷰 영상자료를 병치해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환기시키는 손승현의 <삶의 역사 프로젝트 시리즈>(2003년부터 현재 진행 중인)가 포함된다. 
이 섹션의 키워드는 아카이브다. 실제로도 전시된 작품들 중 아카이브에 가장 충실한 경우를 보여주고 있거니와, 두 작가 모두 아카이브의 일차적이고 이차적인 의미를 예시해준다. 먼저 손승현의 경우를 보면, 현대미술의 달라진 신을 반영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사진과 영상의 등장은 현대미술의 생리를 바꿔놓았고, 전시공학마저 변화시키고 있다. 사진과 영상은 태생적으로 기록매체인 만큼(이에 반해 회화와 조각과 같은 전통매체는 표현매체랄 수 있다) 각종 사회적 이슈와 시대현상에 발 빠르게 부응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반영된 현실, 그러므로 어쩜 재현된 현실, 재구성된 현실을 디스플레이하는 방식이 아카이브다. 자료(그리고 문헌)를 디스플레이하는 방식 자체, 그리고 여기에 자료를 매개로 현실을 재현하고 재구성하는 방식 자체가 아카이브다. 아카이브의 일차적 의미가 자료와 문헌을 의미한다면, 그 처음 의미가 전시공학적인 한 방법론을 지칭하는 전문용어로 확대 적용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렇게 확대 적용된 경우가 아카이브의 이차적 의미에 해당한다. 그런 만큼 아카이브의 이차적 의미는 전시공학적인 기술에 속한다(그 기술을 아카이브적이라고 부를 수가 있을 것이다). 전시는 네트워크의 기술이다. 외관상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것과 저것을 하나로 연결해 제삼의 의미를 파생시키는, 그리고 그렇게 가상적인 맴을 그리는 기술이다. 김보민의 <렬차>가 그렇다. 작가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배열과 배치에 의해 견인된다. 구성과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그 꼴이 처음에는 그저 우연하고 무분별해 보인다. 작가는 그렇게 우연하고 무분별한 섬들(파편적인 자료들)을 네트워크로 연결해 각각 그때와 지금, 과거와 현재, 그리고 서울과 평양이 하나로 만나지는 의미망을 짠다. 그런 만큼 작품제목 <렬차>는 연결망의 표상으로서 의미기능하고 있고, 섬들을 연결하는 빨간색 라인테이프는 가상의 인식론적인 지도 위에 기입된 표식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전시공학으로 치자면 큰 전시(본 전시) 속에 작은 전시(김보민의 작품)가 중첩되면서 전시주제를 확장하고 심화시키는 경우로 보면 되겠다. 

기념 섹션에선 위로와 위무를 다룬다. 3.1운동 이후 1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그 시간을 살았었을 청춘들의 삶을 위로하고(이우성), 할머니들의 삶을 위무한다(안은미). 전시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며, 날씨 맑음으로 나타난 전시의 역사 해석(3.1운동을 긍정적인 에너지와 밝은 기운의 진원으로 보는)이 결정화되는 지점이다. 
먼저 이우성의 경우를 보자. 동백나무 숲에 청춘남녀들이 모였다(동백나무 숲. 2011). 하나같이 결의에 찬 표정이며 손에 횃불까지 든 것이 뭔가 일을 도모할 기세다. 그리고 유원지의 플라스틱 오리 배가 불에 탄다(아무도 내 슬픔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2011). 그들이 도모한 일이 오리 배를 불태우는 것이고, 이로써 그들의 도모가 실현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다만 상상력 속에서 일어난 일이다. 처음부터 오리 배를 불태우는 것은 도모할 만한 깜이 아니었고, 그건 다만 표상에 불과했다. 무슨 표상? 제목으로 유추해보건대, 내 슬픔에 귀 기울이지 않는 세상을 향한 무력감이며 분노를 표상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 분노는 출구를 얻는다(빛나는, 거리 위의 사람들. 2016). 손에 촛불을 든 사람들이 광화문에 모여든 것이다. 
그렇게 최초 동백나무 숲에서 도모한 결의의, 불타는 오리 배에 전가된 표상의 실체가 드러났다. 그런데, 이로써 그들의 도모는 실현된 것이고, 그들의 분노는 해갈된 것인가. 그렇게 세상은 변했는가. 왠지 이 일련의 그림들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혁명의 불씨로서보다는 청춘의 무기력한 삶의 알레고리처럼 읽힌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뀔까, 하는. 광화문에 모인 사람들의 잿빛 정경 때문일까. 아님 양가적 감정의 표출로 볼 수는 없을까. 도모는 실현되었고, 분노는 해갈되었고, 세상은 바뀌었는데, 그런데...그리고 각각 횃불로, 불타는 오리 배로, 촛불로 이어지고 변주되는 불의 연금술이 있다. 연금술은 신화적 서사(이를테면 횃불로 표상되는)와 현실인식 혹은 시대감정(이를테면 분노로 표출되는)이 화학반응을 일으켜 언어를 확장시키고 의미를 심화시키는 알레고리의 주요 원천에 속한다. 그렇게 작가의 회화적 문법은 알레고리에 능하다. 무기력도 위로의 한 형식이다. 그리고 무력감은 어쩜 실존적 존재의 존재론적 조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무기력한 인간은 위로 받아 마땅하다. 
이우성의 경우가 위로치곤 좀 우울한 경우, 위로마저도 우울한 청춘의 경우에 해당한다면, 안은미는 위로가 무색할 정도로 쾌활 발랄 유치찬란한 경우에 해당한다. 이를테면 작가의 영상작업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2010)는 시골 할머니들의 막춤을 보여준다. 전국 각지를 다니면서 채집한 영상 속 할머니들의 막춤에서 조상님께 바치는 경건함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경거망동에 조상님이 노하시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여기서 작가는 발상전환을 꾀한다. 귀신들을 무겁게 짓누르기보다는 귀신들의 배꼽을 빼는 방식을 택한다. 그렇게 할머니들이 추는 막춤에는 경우가 없다. 경우가 없다? 경우를 벗자고 추는 춤이고, 경우를 벗어던지자고 추는 춤이다. 살아생전 충분히 경우에 맞춰 살았을 조상님들께 같이 경우를 한번 던져버려 보자고 초대하는 춤이다. 
여기서 막춤은 살풀이춤과 비교된다. 둘 다 귀신을 위로하는 춤이지만, 하나는 귀신을 무겁게 짓누르는 춤이고 다른 하나는 귀신의 배꼽을 빼는 춤이다. 하나는 귀신을 더 귀신답게 만들어주는 춤이고, 다른 하나는 귀신으로 하여금 자기가 귀신임을 잊게 만드는 춤이다. 살아생전 충분히 경우에 맞춰 살았다면, 이제 귀신이 된 이후에는 경우를 좀 내려놔도 좋지 않을까, 하고 재롱을 바치는 춤이다. 조상님이 아닌 저마다 자기 입장에서 보면 한 많은 세상살이를 온몸으로 떨쳐내는 춤이고, 한을 한바탕 웃음과 해학으로 승화시킨 춤이다. 이 전시의 역사해석이 여기에 있고, 클라이맥스가 여기에 있다. 한쪽에 한 많은 세상살이가 있고, 다른 한 쪽에 그걸 온몸으로 떨쳐내는 막춤이 있다. 한쪽에 3.1운동이라는 역사적 현실이 있고, 다른 한쪽에 3.1운동이라는 역사적 현실로부터 발원한 긍정적 에너지와 밝은 기운이 있다. 사실은 역사적 현실을 그렇게 소환하고 싶고, 해석하고 싶은 것이다. 역사가 그렇게 현실 속에 살아있게 하고 싶고, 현실을 살리게 하고 싶은 것이다. 
한편으로 위로와 위무로 치자면 자연만한 것도 없다. 시간과 자연, 그것은 천연치료제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 잊어진다. 때론 체념이, 포기가, 내려놓는 것이 약이다. 그리고 자연은 존재가 유래한 배꼽(옴파로스)이며, 존재가 돌아갈 집(무덤)이다. 존재를 뱉고 거두어들이는 것이 다 자연에 있으니 그 깊이와 넓이를 헤아릴 길이 없다. 인간이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도 푸르릅니다. 엔도 슈사쿠의 글귀다. 자연이 약이 될 수가 있는 건 아름다움이며, 괘념치 않는 아름다움이다. 인간의 상처를 돌보지 않는 것이며, 인간의 한과는 무방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희한하게 상처를 품고 한을 보듬는다. 강요배(1992년 해갈, 2010년 물과 불의 산)와 바이런 킴(2001년부터 현재 진행 중인 선데이페인팅)이 바로 이런 치유하는 자연을 그린다. 
강요배는 제주의 풍광을 그린다. 시간과 자연의 합작품인 풍화된 흔적을 그린다. 때론 사납고 때로 무심한 자연의 성정을 그린다. 그렇게 무심한 자연 속에 일제 강점기 일제가 구축해놓은 군사시설이며 제주 4.3의 상흔을 숨겨놓고 있다. 무성하게 웃자란 자연으로 마치 인간사의 흔적을 모조리 자신의 일부로서 흡수해 들이는 것 같은 자연의 복원력이며 자가 치유력을 보는 것 같다. 
그리고 바이런 킴은 매주 일요일 하늘을 그린다. <선데이페인팅>은 그래서 붙여진 제목이다. 아마도 평생 작업이 될 것 같다. 그가 그린 하늘은 무심하고 무덤덤하다. 요즘처럼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는 것과 같이 하늘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경우가 아니라면, 아마도 하늘은 가장 무심하고 무덤덤한 사물대상일 수 있다. 여기에 원래 하늘을 그리는 작가가 아닌 만큼 극적인 장면이나 조형성을 강조하는 것과 같은 일체의 의도를 애써 피한 느낌이 이런 무심하고 무덤덤한 인상을 더한다. 일정한 시간간격을 두고 같으면서 다른(사실은 다만 그렇게 보일 뿐인) 사물대상을 반복적으로 그리는 것에는 수행적인 측면이 있다. 일상을 인정하고, 일상을 사는 자기의 생리를 반추하고 반영하는 자기반성적 측면이 있다. 의식 혹은 의례의 측면이 있다. 자연과 대화하면서, 자연을 거울삼아 자기를 되비쳐보는, 그리고 그렇게 자연의 무심한(아님 무상한?) 성정을 배우고 닮아가는 자기치유의 한 형식이며 과정으로 볼 수가 있겠다.  

그리고 경계가 있다. 경계는 도처에 있다. 일제와 조선을 나누는, 남과 북을 나누는, 나와 너를 나누는, 자기가 자기를 나누는, 좌와 우를 나누고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경계들이다. 어쩜 문명화된다는 것, 제도화된다는 것은 이런 경계 짓기며 구별 짓기(피에르 부르디외)의 과정일지도 모른다. 이런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배성미. 2019. 시인 함민복의 시를 인용한). 평소에 경계는 잘 보이지가 않는다. 거울 앞에 서면 보인다. 거울 앞에 서면 내가 보이고, 경계가 보이고, 경계 위로 핀 꽃이 보인다. 거울이 자기반성적 행위를 매개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거울은 그 경계가 사실은 다름 아닌 내가 그어놓은 것임을 알게 해준다. 그렇게 꽃은 결국 경계를 지우고 무성할 것이다. 경계가 만든 상처를 치유할 것이다. 처음상태를 복원할 것이다. 
한국은 분단국가다. 분단 자체가 경계다. 이데올로기적 경계다. 그래서 유독 경계에 민감하다. 각 <판문점>(2013)과 DMZ(489년. 2016)를 소재로 한 권하윤의 영상작업이 이런 민감한 경계를 다룬다. 판문점에 가면 실제로 남쪽 지역과 북쪽 지역을 나누는 경계를 볼 수가 있다. 작가의 작업은 그 경계 위로 남북한 군인들이 제식 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제식 하는 반복동작이 어김없는 기계 같고, 추상화된 패턴 같다. 제도는 기계다(질 들뢰즈). 정해진 룰에 따른 반복동작을 수행할 뿐인, 입력된 정보를 실행할 뿐인, 시스템에 의해 작동할 뿐인 비인간적 기계다. 작가는 바로 그 제도기계의 비인간화를, 무의미와 공허함을 극적인 형식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민간인은 비무장지대에 들어갈 수가 없다. 여기서 작가는 비무장지대를 탐색하는 가상의 여행을 제안한다. 들어갈 수 없는 곳에 들어간 것, 금지구역을 침범한 것, 금단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것인 만큼 낯설고 생경하다. 언케니하고 그로테스크하다. 작가는 바로 이처럼 낯설고 생경한, 언케니하고 그로테스크한 이데올로기를 극화시켜 보여준다. 

그리고 여기에 이육사의 시가 있다.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정재완. 2019). 일제강점기의 생활감정을, 절망과 희망을 계절과 자연현상에 빗대어 표현한 것일 터이다. 그 냉정한 계절 위로 100개의 하얀 단어들이 흰 눈처럼 내린다(백백. 정재완. 2019). 그 날 이후 1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10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시대가 겪은 갈등과 번민들이다. 시대가 뱉어낸 아픔이고 상처들이다. 시대가 보듬은 치유고 위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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