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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우/ 혀끝에 맴도는 말, 너를 배회하는 말

고충환

최정우/ 혀끝에 맴도는 말, 너를 배회하는 말 


잠시 꿈을 꿨을 뿐...다들 미친 거 아냐...썩어 없어질 것들, 이라고 작가 최정우는 중얼거린다(2005 혼잣말). 다소간 냉소적으로 들리는 이 말들은 혼잣말이고 속말이며 독백이다. 남들이 들으라고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혹은 남들이 들으라고 하는 말이지만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이다. 남에게 가닿지 못한 말이고 자신에게 비수처럼 꽂히는 말이다. 실패한 말이고 상처를 만드는 말이다. 자신의 상처를 남들에게 열어서 보여주는 말이다. 작가는 친절하게도 아님 절실하게도 이 혼잣말들을 낱낱이 문자조형으로 옮겨놓았음에도 정작 그 말들은 남들에게 들리지도 않고 상처가 보이지도 않는다. 혼잣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귀를 기울이면 들리고 잘 보면 보인다. 비록 실패한 말이지만 원래 남들이 들으라고 한 말이기 때문이다. 말도 상처도 사실을 알고 보면 상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작가는 원래 상호적이어야 할 말이 일방적일 때 상처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런 만큼 처음 그대로의 상호적인 말의 상태를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생각은 반어적이다. 일방적인 말로 상처를 만드는 현실에 대한 인식이, 들리지 않는 말과 보이지 않는 상처에 대한 자조가, 어쩜 불통하는 현실에 대한 포기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읽을 수 없는 텍스트, 하지만 잘 보면 보이는 텍스트를 매개로 자기에게 그리고 남들에게 냉소와 자조와 포기를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혹 말의 한계를 전송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나는 진실만을 말한다거나 나는 가난하지 않다고 말한다(2006 인식의 깊이, 2008 인식함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들). 그러나 작정하고 했을 작가의 이 말은 사실은 진실에 대해선 아무도 모른다거나 나는 실제로는 가난한 데 가난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여기서 작가는 그렇담 누구 말이 맞는지 재보자고 제안한다. 바로 말이 함축한 진정성의 무게를 재보자고 제안한 것이다. 그리고 저울이 등장하는데, 그러나 정작 한글자모로 된 이 말들의 무게, 그 말들이 함축하고 있을 진정성의 중량을 재는 일은 뒤집혀진 저울 아래로 한글자모가 솟아져 내리면서 실패로 끝난다. 누가 말의 무게를 잴 수 있는가. 누가 말의 진정성의 중량을 측정할 수 있는가. 누구 말이 맞는지 재보자고 들이대는 것은 알고 보면 그 말의 진정성의 유무와 그 정도를 판단하는 일일 것인데, 누가 그 일을 할 수가 있는가. 
인식의 깊이를 재고 그 무게를 다는 일은 상대적인 일이다. 어떤 상황, 어떤 전제, 어떤 문맥, 어떤 맥락 하에서 그 말이 발설되어졌는지 여하에 따라서 인식의 깊이도 진정성의 무게도 달라진다. 그렇게 상황이 의미를 결정한다. 나아가 상황이 의미를 낳는다고까지 말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상황이 달라지면 의미 또한 달라진다. 화용론이다. 말의 의미는 실제로 그 말이 발설되어졌을 자리에 따라 결정되고 장소에 의해 정해진다. 언어는 허울뿐이고, 본질은 인식 혹은 감정의 질량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바로 의미가 결정되는 자리, 언어 뒤편의 장소를 말하는 것일 터이다. 그리고 작가는 막간처럼 인용부호를 인용하는데, 장소의 이쪽과 저쪽에다 마주보게 인용부호를 놓는다. 말이 머무는 장소며 의미가 거하는 집을 범주화한 것이다. 말의 의미가 실효성을 얻는 범위를 한정한 것이다. 이로써 부지불식간에 인용부호의 바깥, 말의 바깥을 같이 상정한 것이다. 이를테면 말해질 수 없는 말, 어떤 의미로 특정되지는 않는 말, 그러므로 어쩜 말로도 의미로도 환원되지 않는 감정의 질량의 실체를 인정한 것이다. 

이처럼 작가에게 말은 의미와 결부되고 인식과 연장된다. 그리고 욕망과 연동된다(2012 metamorphosis 변형, 변태). 말은 의미의 전달체로서 인식을 대리한다. 그리고 말에는 욕망이 실리는데, 말의 이면에 무의식적인 욕망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렇게 농담은 사실은 진언일 때가 많고, 실언은 알고 보면 무의식적인 욕망이 부지불식간에 자기를 표현하고 발설한 것이다. 그렇게 말의 의미는 겉 다르고 속 다르다. 겉으로 드러난 의미와 억압된 의미가 상호충돌하고 각축하는 치열한 장이 말이다. 
여기에 뿌리 뽑힌 나무가 있다. 인간의 무분별한 욕망으로 자연의 생명이 훼손된 현장을 웅변하고 있다. 인간의 개념으로 해석된 자연(능산적 자연)과 원초적 자연(소산적 자연)이 부닥치는 현장을 연출하고 있다. 여기서 작가의 입장은 말할 것도 없이 원초적 자연을 옹호하는 쪽이다. 인간의 언어로 개념화되기 이전의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원형적 자연을, 그러므로 어쩜 말의 바깥에 있는 감정의 질량을 변호하는 쪽이다. 그리고 뼈를 다 드러낸 기우뚱한 배가 있다. 미처 배라고 부르기조차 어려운, 관습(학습된 습관?)이 아니라면 알아보기조차 쉽지 않은 배의 형해가 인간의 욕망으로 자연의 생명을 훼손하는 것을 넘어 이미 균형감각을 상실한 자연, 불모의 자연을 침묵으로서 증언해주고 있다. 다시, 말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의미와 연결되고 인식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욕망으로 변태된다. 그리고 이로부터 의미 이전의 말, 인식의 그물에 포획되지 않는 말의 실체를 강조한 것처럼 욕망에 오염되지 않는 말, 미처 자연으로 개념화되기 이전의 자연, 원초적 자연, 자연의 원형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말을 매개로 말과 의미(진정성의 문제), 말과 인식(인식론의 문제), 말과 욕망(언어심리학의 문제)의 문제로 변주되고 확장된 작가의 주제의식은 다시금 정체성의 문제로까지 확대 재생산된다(2014 8hours). 주지하다시피 말은 정체성과 관련이 깊다. 말이 하는 호명, 말로 하는 명명과 관련이 깊다. 이를테면 루이 알튀세는 이념의 호명에 의해 개별주체와 집단의 정체성이 결정된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든다. 8시간이란 시간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도출된 것인가. 여기서 작가는 하루 24시간을 각 수면 8시간, 노동 8시간, 그리고 기타 일상사 8시간으로 나눈다. 그렇게 나눠놓고 보니 오롯이 자기에게 집중하는 시간, 자기에게 할애된 시간이 없다. 혹자는 일상사 8시간을 자기에게 집중할 수도 있겠지만, 예외적인 경우로 보아야 한다. 
이로써 작가는 어쩜 경제적 인간으로 재정의 되는 자본주의 시대에 정체성 상실과 혼란, 그리고 자기소외의 불가피성을 증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를테면 마르크스는 노동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정상인데(노동과 삶의 의미가 유기적인 관계에 놓이는 것이 예술이고, 미학적 인간을 실현한 것), 이와는 달리 노동과 삶의 의미가 분리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소외의 불가피한 현실을 역설한 바 있다. 이러한 사실을 증언이라도 하듯 작가는 머리에 원통을 뒤집어쓰고 있는 인간군상을 보여준다. 원통을 뒤집어쓰고 있어서 나도 너를 볼 수 없고 너도 나를 볼 수가 없다. 서로 단절된 고독한 군상을 보여주고, 상호 통하지 않는 불통의 관계를 예시해준다. 혹 단절된 적막감 속에서 자신에게 오롯이 눈뜨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말을 잃어버린 세대, 정체성을 상실한 현대인의 징후를 드러내 보여준다. 

그리고 작가는 근작에서 불통의 관계에 대한 회복을 시도한다(2018 Liaise 연결, 관계, 접속). 소통도 불통도 인간관계를 매개시켜주는 계기로서 파생된 것임을 인정한다면, 말을 매개로 한 작가의 작업은 결국 인간관계가 주제임을 알겠다. 나와 너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것이 주제다. 그리고 그 관계가 확장된 것이 사회고, 최근 남북문제가 바로 그 확장된 자장 속에 들어온다. 겉으로는 찌지고 볶고 하는 것 같지만, 그 와중에서도 그 이면에서는 상호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눈에 보이지 않는 연결, 관계, 접속을 꾀한다. 지하에 매설된 신경망처럼 연결된 배관용 파이프가, 압력을 조절하는 컨트롤 박스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편견 없이 악수하기 위한 장치가 눈에 보이지 않는 연결, 관계, 접속에 대한 메타포로서 제시된다. 
그렇게 말을 매개로 한 작가의 작업은 의미론적인 문제, 인식론의 문제, 소통과 불통의 문제를 넘어 종래에는 진정한 관계 회복의 문제로까지 확장되고 심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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