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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융희/ 혹 세상은 다만 상으로만 존재하는 허상, 환영일지도 모른다

고충환

조융희/ 혹 세상은 다만 상으로만 존재하는 허상, 환영일지도 모른다 


모든 작업은 시각과 인식이라는 정보 전달체계의 과정 속에서 생기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시각과 인식의 관계문제야말로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주제며 전제가 된다. 작가의 작업은 이 주제를 탐색하고 변주해온, 심화하고 확장시켜온 지난한 형식실험의 과정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여기에 이 주제는 조형 일반의 주요 문제의식이기도 하고, 더욱이 시각정보가 넘쳐나는 시대환경에도 부합하는 주제일 수 있다. 이로써 작가의 주제의식은, 그리고 이를 조형으로 옮긴 작가의 모든 작업은 조형예술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면서, 동시에 현대성도 담보하는, 더욱이 그 과정에서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는, 그래서 신뢰가 가는 보기 드문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보는 것은 그저 보는 것이 아니다. 그저 보기만 하는 텅 빈 행위가 아니다. 보는 것이 곧 인식이다. 시각이 곧 인식이다. 보는 것은 그 속에 피사체 혹은 사물대상을 분석하고 판단하고 해석하는, 그리고 여기에 미처 당도하지도 않은 일을 앞당겨 예기하기조차 하는 총체적 인식행위를 포함한다. 이 모든 일들이 보는 행위와 동시에 일어난다. 시각이 인식을 결정하고 인식이 시각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시각과 인식은 상호작용한다. 그러므로 그가 뭘 어떻게 보는가가 그의 인격(내용)을 결정하고 그의 스타일(형식)을 결정한다. 더욱이 지금처럼 이미지가 봇물을 이루고 있는 시대에 그가 보는 시각정보는 그의 인식에 결정적일 수밖에 없다. 리얼과 하이포리얼, 시뮬라시옹과 시뮬라크라, 유사와 상사, 그리고 이미지정치학과 같은 현대담론의 많은 부분들이 바로 이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여기서 작가는 의심한다. 과연 보는 것이 진실인지, 진실은 보이는 것 그대로인지, 혹 보이는 것과 진실은 서로 다른 별개의 층위에 속한 것은 아닌지 회의한다. 이런 작가의 의심과 회의는 보는 것에 의해 결정화된 사람들의 인식, 선입견과 편견 그리고 상식을 문제시하고 재고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이를 위해 작가는 먼저 일종의 시점조각으로 부를 만한 형식실험을 예시해준다. 보통 시점이라고 하면 회화의 전통적인 문제의식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작가는 이를 조각에 전용한 것이다. 어떤 시점에서 보는가에 따라서 사물대상의 형태가 결정된다. 그러므로 시점이 달라지면 사물대상의 형태도 달라진다. 그렇게 작가는 납작한 가스통과 우유 곽을 만들었다. 정면에서 보면 마치 그림처럼 납작하지만, 시점을 이동하다보면 불현듯 형태가 입체로 보인다. 결국 평면과 입체를 결정하는 것은 사물대상 자체의 성질(형태)이 아니라 시점이다. 형태는 그대로인데 시점에 따라서 형태는 평면으로도 그리고 입체로도 보인다. 여기서 한 발짝만 더 나가면, 세상은 그대로인데 관점에 따라서 세상은 이렇게도 그리고 저렇게도 보인다. 색즉시공공즉시색이다.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다. 세상이 이렇다 혹은 저렇다 하는 것은 세상이 그래서가 아니라, 다만 마음(그러므로 어쩜 욕망)이 불러일으킨 착각(유혹)에 지나지 않는다. 욕망은 유혹이 그 본질이다. 그렇게 시각은 욕망에 연동되고, 인식론은 심리학에 연장된다. 
그렇게 작가의 조각은 시점조각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시점조각은 이후 작가의 작업이 이러저런 다른 형태로 변주될 때 여전히 그 밑바닥에 흐르는 핵심개념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자동차가 소재로서 도입된다. 이번에는 자동차를 납작하게 만드는 대신 부분 부분으로 해체해 공중에다가 매달았다. 그래서 처음엔 그게 뭔지 알아낼 재간이 없다. 그러다가 마찬가지로 시점을 이동시키다 보면 어느 시점에선가 부분 부분이 하나로 짜 맞춰지면서 하나의 온전한 자동차 형태가 보인다. 물론 해체돼 있던 것들이 움직이면서 실제로 짜 맞춰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로만 그렇게 보인다는 말이다. 하나의 대상을 알만한 형태로 인식하는 것은 대상이 아닌 시점에 의해서이다. 여기서 더 나가면 원래 세상은 우연하고 무분별한 파편들의 집합으로서 주어지는데, 이걸 인식이 하나의 유기적인 총체로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기서 세상에 대한 인식이 진실에 부합하는지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최소한 세상 자체와 세상에 대한 인식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차이)이 있고, 그런 만큼 모든 인식은 임의적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작가는 3D 프린터가 일반화되기도 전에 3D 프린터를 직접 제작해 그 비주얼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리고 작가는 작업에 거울(곡면거울)을 도입한다. 여전히 시점문제가 전제되고 있지만, 외적으로 보아 시점에서 반영으로 문제의 축이 옮겨간 느낌이다. 옮겨갔다기보다는 시점문제가 반영문제로 심화되고 변주되고 확장되는 경우로 보면 되겠다. 소재로서 자동차와 같은 오브제, 반가사유상과 같은 아이콘, 밀로의 비너스와 같은 미술사 속 패러디가 호출된다. 전작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알만한 형태를 알아보기 위해 시점을 이동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다. 왜곡된 형태는 여전하지만, 마주보고 있는 거울 속에서 형태는 올바르게 보인다. 올바르게 보인다? 거울 속에 보이는 것은 실재가 아닌 반영이다. 이미지다. 일루전이다. 미혹이다. 유혹이다. 플라톤 식으로 말하자면 실재의 희미한 그림자, 실재의 먼 그림자, 그러므로 허상(실재를 결여한, 다만 상으로만 존재하는 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쩌면 우리가 실재로 믿어 의심치 않는 감각세계란 사실은 거울이 보여주는 반영상처럼 한갓 허구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정작 우리가 속해져 있는 현실세계는 왜곡상처럼 왜곡돼 있는지도 모른다. 왜곡상은 올바른 상을 전제로 한다(논리적 오류가 아니라면, 올바른 상이 왜곡상을 전제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 전제가 현실이 아닌, 거울 속에 있다. 반영상 그러므로 어쩌면 허상이 전제가 되고 현실이 된다. 전제 자체가 이미 허상이고 허구다. 앞서 작가는 우연하고 무분별한 파편들의 집합으로 흩어진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여기에 왜상으로 나타난 왜곡된 세계를 보여준다. 알고 보면 바로 그런 세계, 미처 세계라고 부르기조차 어려운 세계를 인식이 세계라고, 정상이라고, 상식이라고, 진실이라고, 현실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작가는 조작하는 인식(우연하고 무분별한 파편들을 유기적인 총체로 조작하는), 착각하는 인식(허상을 실재라고 착각하는)을 주지시킨다. 인식론적 오류라기보다는 인식의 한계를 주지시킨다. 
그리고 작가는 거울을 움직이게 만든다. 키네틱미러다. 처음엔 곡면거울을 고정된 위치에서 보여주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움직이게 만들다가, 이후 거울 자체가 움직이게 해 시지각적 왜곡현상을 확장하고 심화시킨 것이다. 그렇게 거울도 움직이고 나도 움직인다. 알만한 형상, 저마다 알고 있는 그대로의 형상을 알아보기 위해, 거울이 알고 있는 올바른 상과 내가 알고 있는 올바른 상을 하나로 맞추기 위해 나는 연신 움직이고 있는 거울과 함께 같이 움직여야 한다. 그렇게 세상(나)도 움직이고, 세상을 비추는 상도 움직인다. 여기에 실재(내 인식이 알고 있는 올바른 상)는 어디에 있는가. 여기서 실재는 순간적으로만 주어진다. 그렇게 찰나적으로 지나치는 실재에 대해 이번에는 인식도 어쩔 재간이 없다. 나아가 여기에 실재라고 부를 만한 실체가 있기나 한 것인가. 움직이는 반영상을 통해 찰나적으로만 주어지는 실재는 실재인가, 아니면 여전히 실재의 희미한 그림자, 먼 그림자, 오히려 더 아득해진 그림자인가. 여기서 작가는 인식의 한계를 넘어, 인식을 놀이의 차원으로 승화(?)시킨 인식론적 놀이를 제안한다. 진지한, 그리고 흥미진진한. 그런데, 도대체 실재란 뭔가. 
거울은 자기반성적인 도구다. 나르시스가 물거울에 비친 타자(사실은 자기, 엄밀하게는 자기의 상, 그러므로 어쩌면 자기라는 실재의 희미하고 먼 그림자)를 사랑한 나머지 물속에 빠져 죽은 것처럼 모든 자기반성적인 행위는 자기와의, 타자(자기 내면의 타자)와의, 실재와의, 상 곧 그림자와의 죽음을 담보로 한 치열한 사투를 동반한다. 그것도 기꺼이 자발적으로 그렇게 하는(나르시스는 사랑 때문에 죽었다). 작가가 작업에 거울을 끌어들인 것은 시각과 인식의 관계문제를 묻기 위한 것이지만, 거울을 끌어들임으로써 이미 어쩔 수 없이 자기반성적인 도구도 같이 끌어들인 셈이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거울을 매개로 한 작가의 작업은 자기라는 실재, 자기에 대한 인식이 전개되는 자기반성적인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그리고 여기에 최근에는 인공지능(사람을 알아보는, 같은 사람임을 인지하는)을 속이는 프로젝트를 통해 인공지능에 의탁해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를 돌파하려는 기획의 무모함을 주제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각과 인식의 관계문제에 천착한 작가의 주제의식을 또 다른 형태와 경우로서 확장 심화시키고 있다. 작가의 작업이 또 한 차례 다른 영역과 범주로 확장된 것인 만큼 아직은 그 추이를 더 지켜볼 일이다. 분명한 건 예술은 실패에 더 민감하다는 사실이고, 작가의 작업도 그렇다. 작가의 작업은 개념을 수공으로 옮기는 탄탄한 기술력이 미덕인데, 다름 아닌 실패를 증언하기 위해 이 미덕을 도구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그리고 작가의 작업의 진정한 미덕은 바로 그 역설에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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