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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근, 무게에 대한 다른 생각

고충환

이택근, 무게에 대한 다른 생각 


이택근은 근작에서 무게를 주제화한다. 근작이라고는 했지만, 어쩜 무게는 작가의 전작을 가로지르며 아우르는 사실상의 주제였고 전제였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사전에 찾아보면 무게란 물건의 무거운 정도를 말하고, 중력이 물체를 끌어당기는 힘의 크기를 말한다. 가벼운 물건이 있고 무거운 물건도 있는 것으로 보아 무게는 물건의 고유한 성질 혹은 본질로 볼 수가 있겠다. 그런데 여기에 중력을 통해서 보면 문제는 달라진다. 하나의 사물로 하여금 무겁게 혹은 가볍게 만드는 원인은 사물 자체의 성질이 아닌, 외부로부터 작용하는 힘과 같은 환경적 요인 혹은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무거운 물체는 빨리 떨어지고 가벼운 물체는 늦게 떨어지는 것으로 보아 무게란 사물 고유의 성질과 환경적 요인, 사물의 본질과 중력과의 관계 혹은 상호작용성의 결과물로 볼 수가 있겠다. 그 관계 혹은 상호작용의 정도를 수치로 환산한 값이 무게다. 
그렇담 무게를 주제화한 작가는 이를 통해 사물의 본질을 묻는 것인가, 아님 사물과 환경과의 관계를 묻는 것인가. 이도저도 아니라면 하나의 사물로 하여금 사물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본질인가 아님 관계인가를 따져 묻는 것인가. 본질과 관계는 다른 문제다. 다른 층위에 속한 문제다. 적어도 외적으로 볼 때 그렇다. 하지만 무게에 대한 정의에서 보듯 그건 서로 물려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무게에 대한 정의는 사물의 본질을 말하면서, 동시에 관계를 말한다. 그렇게 본질과 관계는 하나로 얽혀있다. 겉보기에 먼 것 같지만, 다르게 보면 얽혀있는 것이 보인다. 그렇게 상관없어 보이는 것들치고 사실은 얽혀있지 않은 것이 없다. 개념과 개념이, 의미와 의미가, 현상과 현상이, 세상과 세상이, 인연과 인연이 저 홀로 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단순해보이지만 단순해 보이는 것치고 사실은 복잡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의 사물로 하여금 사물답게 만들어주는 것에 대한 원인이며 해명을 하려들면 밑도 끝도 없다. 하물며 그냥 정의는 말할 것도 없다. 
그렇게 작가는 무게를 주제화하면서 사물의 본질 문제를 소환하고, 사물과 환경과의 관계 문제를 호출한다. 그리고 여기에 사물의 사물다움의 문제며 사물의 정의 문제까지 파생시킨다. 이 모두가 무게에 대한 정의가 파생시킨 것이다. 하나는 둘을 부르고, 둘은 넷을 불러들인다. 그렇게 하나를 건드리면 세상 전부를 건드리는 것이 된다. 작가는 다르게 생각하기라고 했는데, 혹 이런 문제의 폭을 의식(아니면 무의식)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르게 생각하기라고 했다. 무게가 작은 주제라면, 다르게 생각하기는 큰 주제에 해당한다. 작가는 다르게 생각하기라는 주제를 실천할 요량으로 이러저런 소주제들을 끌어들이고, 여기에 무게를 끌어들인다. 소주제가 매개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렇담 무게의 무엇을 어떻게 다르게 생각해보자고 제안하는가.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자는 것인가. 여기서 다르게 생각하기는 다르지 않게 생각하는 것과 비교되고, 다르지 않게 생각하는 것을 문제시한다. 다르지 않게 생각한다? 합리적인 생각, 상식적인 생각, 일반적인 생각, 보편타당한 생각, 그리고 여기에 이성적인 생각, 좀 그런 경우로는 선입견과 편견, 그리고 독사(doxa)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렇담 이런 생각들이 왜 문제시되는가. 이런 생각들은 자연적인 사실 같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학습의 산물이고 관습의 산물이기 쉽다. 여기에 이데올로기의 결과물이며 문화적 소산이기 쉽다. 
롤랑 바르트는 문화적 사실을 자연적 사실인 양 가장할 때 신화가 발생한다고 했다. 그리고 모든 사실은 문화적 수준으로 자리매김할 때쯤에는 이미 그 자체 자연적 사실로, 진리와 진실로, 진정한 현실로서 받아들여진다. 그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는 별종으로 취급받는다. 그리고 그 별종에 해당하는 것이 광인이고 예술가들이다(예술가는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표현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광인은 예술가의 인격 곧 속사람이다). 그들이 그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 생각이 자연적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가 생각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의 다르게 생각하기는 바로 그 신화를 문제시한다. 
그렇담 무게와 관련한 신화, 무게에 대한 상식적인 생각은 뭔가. 돌은 무겁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이 뭐가 어떻다는 건가. 그 사실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주지하다시피 작가는 특히 근작에서 돌을 재현한다. 돌을 재현한다? 돌을 그대로 갖다 놓은 것이 아닌가. 돌을 갖다 놓긴 했다. 그런데 그 돌들이 의심스럽다. 벽에 걸려있기도 하고, 공중에 매달려있기도 하고, 얇고 좁다란 나무판자에 걸려있기도 하다. 돌이되 돌답지가 않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를 통해 사물의 사물다움을 배반하는, 사물의 본성에 반하는 어떤 상황논리를 보여주고 싶은 것인가. 어느 정도는 그럴 것이다. 돌답지 않은 돌을 보여주고 싶고, 돌의 본성에 반하는 돌을 보여주는 것일 터이다. 돌의 본성에 반하는? 무거운 것이 돌의 본성임을 생각하면, 그건 말할 것도 없이 가벼운 돌이다. 공중부양 하는 돌이고, 그림처럼 벽에 걸린 돌이고, 가녀린 나무막대 끝에 매달린 돌이다. 앞서 작가는 돌을 재현한다고 했다. 사실을 알고 보면 스티로폼과 톱밥과 먹물 먹인 한지로 형태와 색감과 질감 그대로를 만든 돌이다. 그래서 무게에 대한 선입견을 재고할 수가 있었다. 
여기서 작가는 크게 두 가지 문제를 건드린다. 영락없는 돌과 가짜 돌이 그것이다. 먼저 영락없는 돌과 관련해서 보면, 사람들은 저마다의 상식이 흔들리고 깨지는 것을 경험한다. 혹 작가가 평소 어떤 작업을 하는지 아는 사람들이 보기에 모조가 보일지는 모르나, 작가에 대한 사전정보가 없는 관객들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리고 전시는 그런 관객을 전제한 것이다. 모든 전시가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 사람들은 바로 눈앞에서 공중부양 하는 돌을 보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상상력이 열어놓은 의외의 현실, 예기치 못한 현실, 하나의 가상현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작업은 꽁꽁 얼어붙은 상식을 깨는 도끼와 같은 것이어야 한다(카프카). 그리고 그렇게 파열된 상식의 틈새로 저마다의 자기가 스며들게 만들어야 한다. 
한편으로 작가의 작업은 보기에 따라서 공중부양 하는 돌을 그린 르네 마그리트 그림의 입체버전으로도 보인다. 그리고 3D(아니면 4D)로 구현된 SF버전을 예비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렇게 치자면 작가의 경우는 초현실주의와 SF 사이, 이미지와 가상현실 사이, 이미지와 일루전 사이, 차원과 차원 사이를 떠도는 아날로그버전처럼도 보인다.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에서와도 같은 공중부양 하는 돌들, 하늘에서 내려오는 돌들을 작가의 후속작업에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모두가 영락없는 돌을 전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게 관객들이 보기에 처음엔 영락없는 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가짜로 만든 돌임이 밝혀진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굳이, 지난한 수공을 마다하지 않으면서까지 공들여 가짜 돌을 만드는 것일까. 가짜를 통해 뭘 말하고 싶은 것인가. 아마도 가짜천국을 말하고 싶을 것이다. 가짜와 진짜의 경계와 차이가 지워지고 허물어지는,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하는 정체성 혼란과 가치관 상실의 시대정신을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 차이를 지우는 것은 대개는 의도적이고 전략적으로 수행되는데, 그 정점에 이미지정치학이 있다. 지금 사람들은 누구도 실재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현실이고 사실이고 진실이다. 이미지가 현실도 삼키고 사실도 삼키고 진실도 삼킨다. 이미지는 모든 것을 삼킨다. 실재에 대한 호기심도 없거니와, 혹 캔다 하더라도 기껏해야 황량한 모래바람이 부는 불모의 사막을 발견할 수 있을 따름이다(슬라보예 지첵). 그렇게 어쩜 우리 모두는 이미지를 지배하는 사람이 현실을 지배하고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에, 더욱이 기꺼이 지배당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이미지는 유혹이 그 본질이고 본성이다). 그리고 그렇게 실재를 잃은 상실의 시대를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가가 굳이 지난한 수공을 마다하지 않으면서까지 공들여 가짜를 만드는 이면에는 바로 이런 시대풍자가 그림자처럼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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