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이선구/ 정체성을 표상하는, 주체와 타자를 매개하는 집

고충환

이선구/ 정체성을 표상하는, 주체와 타자를 매개하는 집 


real-car. real-building. 진짜 차? 진짜 집? 그럼 가짜 차도 있고 가짜 집도 있단 말인가. 작가가 작업을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은 가짜와 진짜에 대한 이야기인 것인가. 이보다는 진정 차라고 부를 수 있는 실재, 진정 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실재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고 반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차가 뭔지, 집이 어떠한지 눈 감고도 안다. 안 봐도 비디오인 것. 그래서 반문이다. 눈 감고도 아는 건 실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상식이고 통념이다. 독사고 클리세다. 그렇담 진정 차의 실재는 뭔가. 무브먼트다. 동력장치다. 그렇게 순수 동력장치로 환원된 차가 굼벵이 같고 낙엽 같고 실 뭉치(실제로는 철사뭉치) 같다. 동력장치가 무색할 정도로 움직임이 없는 것들이지만,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비로소 움직이는 동력장치의 원형들이다. 정작 실제로 움직이는 동력장치는 아니란 점에서, 다만 동력장치를 암시한다는 점에서 알레고리다. 굼벵이 같은, 낙엽 같은, 실 뭉치 같은 차. 
그렇담 이로써 차의 실재에 대한 답은 분명해졌는가. 동력장치로 충분한가. 여기에 작가는 또 다른 답을 제안한다. 차의 실재는 겉이 아닌 속에 있다. 그래서 차 속을 떠낸다. 차 속을 떠내서 보여준다. 영국의 조각가 레이첼 화이트리드가 건물 내부 공간 그대로를 떠내기도 했지만, 이때의 공간 덩어리는 실제로는 없는 공간이며 물성을 결여한 공간이란 점에서 유령공간으로도 부른다. 작가는 바로 이런 부재하는 공간, 유령공간을 보여준다. 화이트리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적어도 외관상 보기에 속이 꽉 찬 덩어리가 아닌, 속을 떠낸 거푸집(아님 역 거푸집) 조각을 이어 붙여 만든 패치조각을 보여주고 미니어처조각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트럭 내부를 떠낸 것인데, 유년시절 트럭 뒷자리에서 본 공간기억을 소환한 것이고, 아버지에 얽힌 추억을 호출한 것이다(아마도 트럭 뒷자리에서 보면 아버지의 뒷모습도 같이 보였을 것이다). 
이처럼 작가가 보기에 차의 실재는 바람에 움직이는 동력장치며, 모형조각처럼 쪼그라든 아버지와 유년의 추억을 상기시키는 정서적 환기의 총체, 말하자면 차의 서사며 차의 사연이다. 여기서 다시, 차의 실재는 겉이 아닌 속에 있다고 했다. 여기서 작가는 겉보기와는 다른 이면읽기를 제안하고, 사물대상(그러므로 텍스트)의 행간읽기를 제시한다. 그러면 비로소 사물대상의 실재가 보인다. 

겉과 속은 공간개념이다. 집을 소재로 한 작업에서 공간개념은 좀 더 뚜렷한 실체를 얻는다. 흔히 집은 정체성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 정체성은 각각 겉과 속으로 나타난 양가적인 그리고 심리적인 공간개념에 결부된다. 주체 곧 집에 속한 사람에게 집은 친근하지만, 타자 곧 집 밖에서 집을 보는 사람에게 집은 낯설다. 타자에게 집은 호기심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욕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여기서 작가는 타자의 관점에서 집을 조형한다(어쩜 우리 모두는 때로 주체이기도 하지만, 대개는 타자로서 존재한다). 각각 시멘트로 구조화된, 그리고 목재를 소재로 정교하게 만든 집을 보여준다. 작가는 집을 만들 때부터 일부러 공을 들여 속을 만들었지만(스케치를 보면 그 속이 나름 제대로 갖춰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정작 관객이 그 속을 볼 수는 없다. 구조물의 표면에 딸린 작은 창을 통해서 집 속을 엿볼 수 있을 뿐, 대부분의 비가시적인 공간을 선입견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이때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이 빛이다. 창을 통해 비치는 빛이 공간을 재구성하는 데 조력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엿볼 수는 있지만 실재를 알 수는 없는, 바로 주체에 대한 타자의 한계며, 주체와 타자 사이에 그어진 경계다. 그래서 한계공간이다. 집이란 주체와 타자 사이에 그어진 금이다. 작가는 주체와 타자 간 관계에 대한 관심이 작업의 계기라고 했다. 그 관계가 집으로 표상된 것이다. 주체와 타자는 서로 소원한 관계지만, 그 소원한 관계를 회복시켜주는 것이 문(레비나스는 타자를 문을 열어 자기 집에 초대하는 것, 주체가 자기 안에 맞아들이는 손님이라고 했다)이고 창문(창문은 주체와 타자를 매개시켜준다)이며 빛(타자에 대해 열려 있는 주체의 빛이고 주체가 발하는 빛이다. 빛은 말하자면 타자를 맞아들이는 주체의 제스처다)이다. 그래서 통로다. 작가에게 집은 말하자면 주체와 타자를 매개시켜주는 계기로서의 통로인 것.  
바로 이런 매개역할에 착안해 작가는 아예 각종 크고 작은 창문들로만 이루어진 집을 보여주기도 한다. 창문이 매개역할을 하는 것인데, 아예 창문으로만 이루어진 집에서 매개역할은 전면화하거나 무효화된다. 안과 밖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맞아들이기와 엿보기의 차이가 지워진다. 그리고 작가는 임의로 접고 펴고 할 수 있는 일종의 자바라 구조의 집을 제안하기도 한다. 자바라 구조의 집 모형을 케이스에 담아 옮겨 다닐 수 있는 일종의 휴대용 집을 제안한 것이다. 자바라 구조의 집 모형을 접으면 평면이 되고, 안 구조와 바깥 구조가 일체화되는데, 역시 안과 밖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주체와 타자 간 경계가 지워지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이처럼 작가에게 집은 정체성을 상징하고, 주체와 타자간 관계를 표상한다. 그리고 그 궁극은 주체와 타자의 경계를 허무는 것, 안과 밖의 차이를 지우는 것을 향한다. 

이런 안과 밖의 차이가 가장 적극적으로 지워지는 것이 바로 망구조의 집이다. 망구조의 집에서 작가의 집짓기는 전기를 맞는다. 바로 조각설치작업에서 공간설치작업으로 확장되는 것이며, 조형이 공간과 그 운명을 같이 하는 장소특정성 작업으로 전이되는 것이다. 제법 계단과 벽체 그리고 통로와 같은 구조물을 갖춘 망구조의 집은 모기장처럼 가변적이고 임의적이고 유기적이다(모기장은 이미 작은 집이다). 그 집은 망구조로 뚫려 있어서 안과 밖의 경계가 의미가 없다. 타자는 이제 주체의 집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접힌 부분(더욱이 움직이면서 접히고 비정형으로 접히는)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여하튼 이로써 안과 밖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주체와 타자간 차이가 지워지는 것은 분명할 것이다. 
작가는 이 망구조의 집을 <무너지는 평온>이란 주제로 부른다. 평온이란 눈 감고도 아는 것, 안 봐도 비디오인 것, 바로 상식과 통념이고 독사와 클리세다. 상식을 지속하려는 항상성이다. 그 상식이 무너지고 항상성이 내려앉는 것이다. 믿어 의심치 않던 정체성의 안정체제가 허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무너진다고 했다. 무너지는 것은 암울하다. 작가가 집짓기를 통해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물고 주체와 타자 간 차이를 지우는 일에 매진해왔고, 마침내 망구조의 집에서 적어도 외관상 보기에 그 일을 실현한 것 같은데 왜 암울한가. 
그럼에도 여전히 주체는 집 안에 있고, 타자는 집 밖에 있다. 주체는 집에 속해있고, 타자는 그 집에 속해있지 않다. 집이 의미를 갖는 것, 집이 주체로 하여금 정체성을 담보하게 해주는 것은 언제나 집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무슨 말인가. 집 안에 속해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여기서 집은 유형무형의 커뮤니티(인간관계망)를 표상한다. 평온은 그 커뮤니티에 속해져 있는 사람에게나 가능한 현실이다. 여전히 커뮤니티 바깥에서 커뮤니티를 엿보는 타자에게 평온은 없다. 다만 평온을 깨는 도발이 있을 뿐이다. 이중적이다. 커뮤니티를 욕망하면서 동시에 도발을 꾀하는.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