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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훈/ 밤의 사건 혹은 사연, 털과 살이 타는 밤

고충환

박훈/ 밤의 사건 혹은 사연, 털과 살이 타는 밤 


내 피부 위를 흐느끼는 가냘픈 대기여. 내 피부 아래로 소용돌이치는 검붉은 강물이여. 이 두 개의 완고한 층에 끼어 어느새 거친 수염이, 털이 자라고 있다...나는 탐욕과 관능과 비루하고 누추한 생의 치욕과 지독한 지속성을 털을 통해...더 밀어붙여 구체적이면서 다가갈수록 어쩐지 추상적인 살이라는 개념적 명사의 강인 듯 하찮고 연약한 존재의 숙명적인 어떤 부분을 그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작가의 말). 

작가는 털을 그리고 살을 그린다. 털과 살은 서로 기생한다. 그러므로 털과 살은 어쩜 한 몸이다. 그 몸 위로 가냘픈 대기가 흐느낀다. 작가가 감촉하는 대기는 그저 물리적 현상도 자연현상도 아니다. 작가가 감지하는 외계는 흐느껴 운다. 세계가 흐느껴 운다. 작가가 세계로부터 호흡하는 감정이고, 작가의 세계감정이다. 알고 보면 그 감정은 몸 아래 소용돌이치는 강물에서 발원한 것이다. 바로 피의 감정이고, 피의 뜻이고, 피의 의지가 외화된 것이고 자기실현을 얻은 것이다. 그렇게 다시, 몸과 세계는 서로 기생한다. 그러므로 몸과 세계는 어쩜 한 몸이다. 메를로퐁티는 주체와 세계 사이엔 우주적 살로 채워져 있어서 주와 객으로 나눌 수가 없다고 했다. 바로 살의 현상학이다. 여기서 헤겔의 정신의 현상학은 우주라는, 다소간 미심쩍은 관념적 개념으로나마 겨우 그 흔적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정신을 대체한, 그 자체가 이미 정신이기도 한 살 위로 털이 자란다. 그 털은 탐욕과 관능과 비루하고 누추한 생의 증거다. 치욕으로 지속된 삶의 증거다. 끝내고 싶지만 끝내지지가 않는(작가는 지독한 지속성이라고 했다), 미쳐버리고 싶지만 미쳐지지가 않는(이인성) 운명의 증거다. 
흔히 유별난 인간을 거울을 보는 동물, 머리를 빗는 동물, 그리고 털이 없는 동물이라고 한다. 각각 자기반성적인 경향성과 자의식으로 인간과 그저 동물을 구별한 것이다. 그 구별을 증거 하기 위해 털이 소환된다. 털은 인간에게 남겨진 동물의 흔적이다. 인간이 한때 동물이었음을 증언해주는 단서다. 바로 탐욕과 관능을 단죄하는, 몸 아래 아로새겨진 주홍글씨다. 처음엔 영혼이, 그리고 정신이, 그리고 재차 이성이 몸을 단죄했다. 작가는 그렇게 단죄된 몸을 소환하고 털을 호출한다. 바로 구체적이면서 추상적인(그래서 이율배반적인) 살을 증명하기 위해, 하찮고 연약한 존재의 숙명을 연민하기 위해, 인간이 여전히 동물이라는 사실을 증언하기 위해, 자기 내면에 잠자는 동물성을 일깨우기 위해 털을 소환한다. 어쩜 영혼이, 정신이, 그리고 이성이 단죄한 것들 그러므로 억압한 것들을 되불러오기 위해 털을 호출한다. 바로 선한 죄, 순수한 죄를 증명하기 위해, 죄를 재정의하기 위해 억압된 것들의 귀환(프로이트)을 감행한 것이다. 작가는 탐욕과 관능이라고 했다. 작가에게 탐욕과 관능은 이중적이다. 생이 치욕스런(죄스런) 이유이면서, 동시에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숙명이기도 하다. 
여기서 작가는 전통적인 형이상학과 이중적인 관계에 놓인다. 바로 선한 죄, 순수한 죄를 증명하기 위해 영혼과 정신과 이성으로 대변되는 거대담론을 끌어들인다. 혹은 형이상학을 단죄하면서 형이상학에 기댄다. 주지하다시피 선악의 문제는 형이상학의 핵심문제다. 그 수위를 조금 낮춰보면 존재론적인 층위에 속하는 문제 즉 운명과 숙명도, 그리고 실존적인 층위 곧 몸과 살의 층위에서의 욕망도, 탐욕과 관능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작가는 한갓 털을 그리면서 형이상학의 문제(정신의 현상학), 아니면 형이하학의 문제(몸과 살의 현상학)를 건드린다. 

다시, 작가는 털을 그리고 살을 그린다. 털은 크고 작은 가르마길을 만들면서 밑도 끝도 없이 번식한다(공교롭게도 가르마는 카르마 즉 업과 그 소릿말이 같고, 또한 가르마는 길을 닮았다. 문신처럼 몸에 아로새겨진 업의 길?). 그렇게 번식하면서 몸의 안과 밖을 잠식한다. 털의 번식력 앞에서 몸을 안과 밖으로 나누는 경계는 허물어지고 구분이 무색해진다. 그러므로 어쩜 털은 모든 경계와 구분을 넘나들고 지우고 재정의하게 만드는, 탈영토화하고 재영토화하는, 허물면서 세우는 리좀이며 욕망기계(질 들뢰즈)와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주지하다시피 작가는 털을 탐욕과 관능 그러므로 욕망의 표상이라고 본다). 털은 몸 위로도 내달리고, 검붉은 강물이 소용돌이치는 피부 아래쪽에도 흐른다. 그렇게 내달리고 흐르면서 몸 위에 풍경을 그리고, 살 속에 또 다른 전망을 열어 놓는다. 그렇게 털이 그린 풍경, 털이 열어놓은 전망은 헤아릴 수도 헤아릴 필요도 없다. 이를테면 머릿속인지, 겨드랑이 밑인지, 아니면 샅 언저린지. 작가는 그저 털이 기생하는 살을 그렸을 뿐이다(여하튼 존재가 기생하는 대지는 있어야 한다). 다만 털이 열어놓는 살의 풍경이며 전망을 그렸을 뿐이다. 
그 풍경이며 전망이 친근하고 낯설다. 알만한 털과 살을 그린 것이어서 친근하고, 그것들이 정박해있는 몸 위의 지표가 오리무중이어서 낯설다. 그 친근하고 낯선 풍경이 숲 같기도 하고, 웅덩이 같기도 하고, 계곡 같기도 하고, 분화구 같기도 한 전망을 열어놓는다. 신체자연이고 몸 자연이다. 여기에 그 전망은 탐욕과 관능의 풍경이기도 하다. 샅과 항문, 살을 파고드는 혀,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용돌이치며 흐르는 피 그러므로 어쩜 욕망의 풍경이기도 하다. 그 욕망이 몸 위로 꽃을 피운다. 너덜너덜해진 살점을, 의심스런 피멍을, 폭력과 린치의 흔적을, 자학의 증거를, 그리고 아마도 외상(트라우마)을 부수물로 거느린 불경한 꽃이고, 불온한 꽃이고, 불안한 꽃이다. 경계를 넘나드는 것으로 인해 운명적으로 불안하고 불안정한 욕망이 변태된 꽃이다. 이처럼 변태된 꽃으로 치자면 보들레르의 악의 꽃과 노발리스의 푸른 꽃이 알려져 있다. 여기가 아닌 어디라도, 로 나타난 도피와 파국을 위해 호출된 꽃이 악의 꽃이고(보들레르는 평생을 세상에 산책 나온 사람처럼 파리의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면서 살았다), 밤을 찬미하기 위해 소환된 꽃이 푸른 꽃이다(노발리스는 평생을 낭만주의를 수호하는 수도승처럼 살았다. 그리고 낭만주의는 죽음과 친하고, 죽음은 밤으로 표상된다). 여기서 의미심장한 것은 보들레르에게 악도, 노발리스에게 밤도 하나같이 정화를 매개한다는 사실이다. 
공교롭게도 작가의 꽃그림(살 그림? 털 그림?)을 뒷받침하고 있는 불온한 상상력이 이런 도피와 파국 그리고 밤의 찬미를 통한 정화의 표상이란 점에서 그 뜻이 하나로 통한다. 작가는 털을 그리면서, 살을 그리면서 이처럼 궁극에는 정화(그리고 특히 자기정화)를 찾고 있었다. 그가 사는 시간은 밤이었다. 낮마저도 밤이었다. 그리고 정화는 온전히 밤의 시간에 속한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는 털과 살이 타는 밤의 사건을 그렸다. 생을 치욕으로 보는 자의식(온전히 살아있는 삶의 또 다른 국면?) 자체가 이미 정화였고, 바로 그 정화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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