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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 세력도감, 식물에도 세력이 있다

고충환

김유정/ 세력도감, 식물에도 세력이 있다 


프로세코, 흰 살과 검은 화면. 원래 프레스코는 회칠된 벽 위에 그림을 그린다. 그런데 김유정의 프레스코는 좀 특별하다. 회칠한 벽면 전체를 검게 칠한 연후에, 니들처럼 날카로운 도구를 이용해 스크래치를 만들면서 그린다. 스크래치로 덧칠된 어둔 화면을 벗겨내 바탕화면의 회칠이 드러나게 한 것이다. 스크래치가 매개 역할을 하는 것인데, 여기서 스크래치는 상처를 상징한다. 그리고 검게 칠해진 어둔 화면은 무의식(그리고 심연)을 상징한다. 결국 스크래치를 매개로 한 작가의 그림 그리기는 무의식에 억압된 상처를 드러내고 상처와 대면하는 과정을 통해서 종래에는 상처를 치유한다는 상징적이고 주술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런 만큼 작가의 작업은 상처와, 그리고 상처의 치유와 관련이 깊다. 
그렇게 식물이, 특히 화분에 심겨진 식물이 소재로서 차용된다. 화분에 심겨진 식물은 자연 자체라기보다는 이식된 자연이며 인공적인 자연이다. 지속적인 관심과 보살핌이 필요한 것이 꼭 사람의 상처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식된 자연이며 인공적인 자연이 확대 적용된 것이 식물원이다. 특히 식물원은 기하학적인 구조와 유기적인 식물, 인공적인 구조물과 자연을 대비시켜 고도로 문명화된 사회 환경 속에서 자연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게 했다. 그리고 생태공원에 조성해 놓은 생존통로에 작가의 필이 꽂힌다. 섬세한 철망으로 만든, 다람쥐가 지나다니는 통로다. 다람쥐의 생존을 위해 조성해 놓은 것이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인공적으로 만든 통로가 있건 없건 다람쥐의 생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평소 숨어 있는 다람쥐가 잘 보이지가 않으니, 잘 보이라고 만든 것이다. 식물원이 식물이 아닌 사람을 위한 것이듯 관상용이다. 
그리고 이런 관상용 자연에 대한 관심이 제주도에 현무암으로 조성해 놓은 미로에 주목하게 했다. 흔히 서양에서 정원은 영국식 정원과 프랑스식 정원으로 구별되는데, 각각 자연 그대로의 정원과 인공적으로 조성된 정원에 해당한다. 그리고 미로정원은 인공정원의 전형에 속한다. 작가는 현무암으로 조성된 미로를 매개로 이처럼 인공정원을, 관상용 자연이며 관광 상품으로 개발된 자연을 예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미로는 원래 그 속에서 헤매라고 만들어놓은 길이다. 자연 자체와 상품으로서의 자연 사이에서 길을 잃은(그러므로 어쩜 자연의 진정한 의미를 상실한) 현대인의 알레고리를 보는 것 같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자연마저도 상품으로 만드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 자본주의의 준칙에 관한한 상품화의 기획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자연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사사로운 감정이나 기분마저도. 이를테면 이케아 매장에 인공적으로 조성해 놓은 복제된 방과 정원에서 작가는 그 극단적인 경우를 본다.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거실과 온실(혹은 온실처럼 꾸며놓은 개인카페) 그대로를 옮겨놓은 것 같지만, 그리고 그렇게 안락함과 안온한 기분마저 들게 만들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다 장삿속에 지나지 않는다. 세심하게 연출된 공간을 꾸미고 있는 소품들마다에는 어김없이 가격표가 붙어있어서 구매 욕구를 자극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자신이 중산층 계급에 속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확인하고 싶다면, 나아가 남들이 보기에 중산층 계급에 걸 맞는 생활수준을 과시하고 싶다면 주저하지 말고 이걸 사라는 식이다. 
그렇게 작가는 자연을 상품화하고 사사로운 심리마저 상품화하는, 상품이 아닌 사실은 환상을 파는 자본주의의 상품화 기획을 주제화한다. 그 매개역할을 스크래치가 한다. 겉보기에 멀쩡한 표면에 억압된 상처(이를테면 왜곡된 자연, 인공적인 자연과 같은)를 드러내고, 겉보기와는 다른 이면(이를테면 공공연한 장삿속 같은)을 폭로한 것이다. 

세력도원, 우호적인 침입자의 부드러운 복수. 그리고 작가는 자연의 복수에 대해 상상해본다. 만약 지구에 종말이 온다면, 그리고 마침내 인간이 사라진다면, 하고 상상해본다. 종말론적 상상력이다. 예술의 계기가 여럿 있지만, 그 중 특히 이처럼 가정법에 근거한 상상력은 가능한 다른 세상을 예시해준다는 점에서 예술을 위한 결정적인 계기일 수 있다(그 전형적인 경우가 유토피아를 상상하는 것이다). 자연이 그 상상력을 위한 매개역할을 하고 있는 경우란 점에서 생태학적 상상력이기도 하다. 
작가는 공간설치작업으로 상상력을 구현하는데, 침대, 소파, 탁자, 선반, 화분, 거울, 샹들리에, 그리고 옷걸이와 같은 자신이 실제로 사용하는 가구들을 가져와 자신의 일상 공간 그대로를 재현한다. 작가의 생활공간을 재현하는 것이며 이로써 사사로운 일상을 주제화한 것인가도 싶지만 그렇지는 않다. 이렇듯 가구들이 배치된 일상적인 공간을 식물이 온통 뒤덮으면서 공간은 졸지에 이상한 공간, 낯선 공간, 생경하고 이질적인 공간, 비현실적인 공간, 초현실적인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지구 종말의 날 인간이 사라지고 없는 공간을 식물이 온통 잠식하고 점유한 상황을 연출한 것이다. 적어도 사라진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벌어진 일 자체는 분명 암울한 상황이지만, 정작 연출된 상황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식물 특유의 유기적인 형태며 색감과 질감이 우호적인 느낌을 주고, 특히 침대를 뒤덮고 있는 식물은 마치 꿈꾸는 식물을 보는 것 같은 비현실적인 인상과 시상마저 자아낸다. 우호적인 침입자의 부드러운 복수를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렇게 인간세상을 접수한 식물들이 부드러운 카펫처럼 촉각적으로 다가온다. 암울한 상황과 우호적인 느낌이 충돌하는 이율배반적인 풍경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인간세상을 뒤덮은 식물풍경이 꼭 문명 이전의 원시로 되돌려진 느낌이다. 원시로 되돌려진 느낌? 지구에 살기 시작한 것으로 치자면 인간은 식물에 비교가 안 된다. 인간 이전에 원시식물이 있었다. 그리고 작가는 원시식물로서 틸란드시아 식물을 도입하는데, 아마도 원시식물이 지금도 여전히 실제로 존재한다면 꼭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싶다. 실제로는 뿌리가 있지만 적어도 겉보기에 뿌리와 몸통을 구분할 수 없다는 점이 그렇고(주지하다시피 생물기관은 미분화상태에서 점차 분화돼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기 중에 떠도는 최소한의 습기만으로도 생존할 수 있다는 점이 그렇다(모르긴 해도 원시지구환경은 지금보다 더 척박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이미 원시부터 이어져온 지극한 생명력으로 인간세계를 잠식한, 그리고 그렇게 원래 주인(식물)에게 되돌려진 세상풍경을 예시해준다. 

세력도감, 잉여에 잠재된 혁명. 여기에 일련의 사진들이 있다. 다 먹고 버린 잔가지가 총총한 포도나무가 군집을 이룬, 속을 파먹은 무화과 껍질이 군집을 이룬, 말라죽은 들풀들이 군집을 이룬 사진들이다. 먹을 만 한 건 다 빼먹고 버려진 것들의 집합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사진의 소재치고는 좀 그렇다. 평범하지는 않다. 성찬 이후의 허망함을 그린 바니타스(인생무상) 정물화의 또 다른 버전인가. 부분적으로는 그럴 것이다. 이러한 사실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이보다는 더 결정적인 의미가 있다. 버려진 것들, 기능을 상실한 것들, 그래서 무의미한 것들이 상실한 의미를 되찾아주는 것이다. 비록 무의미한 것들이지만, 무의미한 것들이 하나로 모이면 힘이 된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는 것이다. 
처음부터 무의미한 것은 없었다. 처음부터 아무 것도 아닌 사람도 없었다. 그랬던 것이 무의미해졌다고, 그랬던 사람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고 함부로 버려질 수는 없는 일이다. 나아가 누가 의미와 무의미함을 재단하는가. 누가 아무개와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을 판단하는가. 제도와 권력이 그렇게 한다. 자본주의의 경제제일주의 원칙과 효율성극대화의 법칙이 그렇게 한다. 그렇게 경제성이며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들이 단죄되고 금기시된다. 조르주 바타이유는 그렇게 자본주의에 의해 단죄되고 금기시된 것들을 잉여라고 부른다. 그것들은 자본주의에 의해 잉여로 지목된 탓에 태생적으로 반자본주의적이다. 운명적으로 혁명적이다. 버려진 것들, 기능을 상실한 것들, 그래서 무의미한 것들을 소재로 한 작가의 일련의 사진들은 이처럼 잉여들에 잠재된 반자본주의적이고 혁명적인 계기를 주지시킨다. 

우즈베키스탄으로부터, 변방세력. 수개월 전부터 작가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 체류해오고 있다. 파견근무로 현지에 체류하면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틈틈이 작업을 했다. 현지에서 작가에게 인상 깊었던 것은 나무 아래 부분에 흰색으로 회칠된 것이었다. 일 년에 세 차례 덧칠한다고 했다. 방충을 위한 것이라고도 했고, 가로등이 없는 캄캄한 밤에 길잡이(지표) 역할을 한다고도 했고, 미관을 위한 것이라고도 했다. 작가는 이 나무숲을 그렸다. 현지는 건조한 사막기후다. 그렇게 작가는 사막에 듬성듬성한 나무숲을 그렸다. 건조한 현지기후의 질감 그대로를 전달할 요량으로 올이 굵은 캔버스 뒷면에다가 일부러 물을 사용하지 않고 다만 물감으로만 그렸다. 그리고 화면 아래 부분을 그리지 않은 채로 남겨 사막을 연상케 했다. 그리고 여기에 현지에서 채록해온 새소리를 들려준다(회칠한 다락. 우즈벡어로 회칠한 나무란 뜻이다). 
그리고 여기에 현지 여자들은 결혼할 때면 전통 천으로 예복을 만들어 입는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한복과 같은 경우로 보면 되겠다. 작가는 그 전통 천 7필을 길게 늘어트려 설치했다. 그리고 <7의 기원>이라고 불렀다. 7이란 숫자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현지인들의 관습(기원)을 반영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7이란 숫자를 행운의 숫자라고 생각한다. 그 관습은 우리나라의 자생적인 것은 아니다. 현지에서의 관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마도 서양에서 유래한 것일 터이다. 그리고 작가는 현지에서 지도하는 학생들의 초상사진을 영상으로 담았다. <K의 꿈>이라는 제목처럼 한국행을 꿈꾸는 다민족 학생들이다. 다민족국가답게 온갖 유형의 얼굴들이 다 있는데, 그 다양한 얼굴들을 클로즈업해 재생시켰다. 다른 얼굴들이 하나의 프레임 속에 중첩되면서 차이(이질성)와 반복(유사성)이 교차되는 유형학적 사진을 예시해준다. 
작가는 근작의 주제를 <세력도감, 식물에도 세력이 있다>로 명명한다. 한마디로 정리를 하자면 식물세력이 될 것이다. 식물로 대변되는 미미한 것들에 잠재된 세력 가능성, 가능태로서의 세력 가능성에 주목한 것이란 점에 의미가 있다. 그리고 작가는 변방에서 잠재된 세력의 또 다른 한 가능성을 본다. 그런 점에서 식물세력은 어느 정도 변방세력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종에 대한 관심(식물세력)에서 시작해 자본주의 물신에 대한 관심(특히 이케아 매장을 소재로 한 작업)으로, 그리고 재차 지역의 문화관습에 대한 관심(변방세력)으로 주제의식을 확장 심화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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