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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강, 기억의 연대기

고충환

이인강, 기억의 연대기 


사진의 본질은 죽음이다(롤랑 바르트). 여하한 경우에도 사진은 현실을 포착할 수가 없다. 현실은 사진에 포착되는 순간 과거 속으로 편입된다. 그렇게 모든 사진은 과거를 향한다. 현실을 흔적으로 만들고 현장을 추억(아니면 기억)으로 만들고 실제를 기호로 만든다. 흔적과 추억과 기호. 하나같이 과거를 증언하는 개념적 도구들이다. 과거를 재생시켜주고 과거를 현재 위로 호출하게해주는 역사적(그리고 어쩌면 정서적) 도구들이다. 이런 과거지향성으로 인해 사진은 그리움을 불러오고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부재하는 현실, 지리멸렬한 현실에 기념비성을 부여해 축성한다. 다시, 그렇게 모든 사진은 부재를 향한다. 한때 존재했었음을 증언해주는 증거로 남는다. 그 안에 기억이 똬리를 튼다. 그렇게 사진은 기억하기를 위한 둥지가 된다. 여기서 작가는 화학적 조작과정을 통해 멀쩡한 사진을 흐릿하게 만들고 희뿌옇게 만든다. 사진을 매개로 기억의 몸이며 시간의 질감을 만든다. 그렇게 흐릿한 기억이, 부재하는 시간이 현실로 재생된다. 작가가 기억을 재생하는 방법이다. 기억을 화석화하고 박제화하는, 그럼으로써 기억을 간직하는 방법이다. 작가는 그 방법을 기억코팅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작가는 신체부위를 석고로 떠내는데, 특히 얼굴을 집중적으로 떠낸다. 여기서 얼굴은 타자 혹은 익명적 주체를 기억하게 해주는 가장 강력한 표상이 된다. 그 설득력 있는 증거를 데스마스크에서 엿볼 수가 있는데, 데스마스크를 제작하는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사자를 기념하고 기억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얼굴은 개인의 인격이 상영되는 극장(인격의 전면? 인격의 파사드?)으로 볼 수 있겠고, 주체의 전형(사회학적인 혹은 이데올로기적인)과 원형(존재론적인 아니면 신화적인)이 등록되는 기호로 볼 수가 있겠다. 그 연장선에서 작가는 문신을 석고로 떠내기도 하고 사진으로 재현하거나 한다. 여기서 문신은 떠낸다고 떠내질 리가 없다. 문신을 떠낼 수는 없지만, 그 흔적을 떠낼 수는 있다. 그마저도 개념상으로만 떠내는 것이지만, 여하튼. 결국 작가가 떠내고 싶은 것(기억으로 간직하고 싶은 것)은 실재가 아닌 실재의 흔적인 것이며, 그 흔적이 기억을 닮았다. 그렇게 작가는 기억을 되불러오기 위해 얼굴을 호출하고 문신을 소환한다. 몸에, 신체에 아로새겨진 기억(몸기억? 몸 저편에서 오는 기억? 몸을 넘어서 오는 기억?)의 흔적을 더듬어 읽는 것이다. 그렇게 기억은 시각적임을 넘어 촉각적이다.  
그리고 기억은 사회학적 기억, 어쩌면 집단적 기억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1997년 IMF 당시 일간지 신문에 난 구직광고(쪽광고)를 재현한 것인데, 이자와 일수, 연체와 할부 그리고 부동산 광고 일색이다. 구직광고가 무색하게 정작 구직광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여기서 작가는 1997년과 2017년을 대비시킨다. 발터 벤야민은 미래를 예비하고 있는 과거를 오래된 미래라고 부른다. 작가는 혹 2017년에서 1997년과의 닮은꼴을 본 것인지도 모르고, 2017년을 예비하고 있었던 1997년을 발견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작가는 폐가에서 뜯어온 창틀에다가 문자 텍스트를 영상으로 투사한다. 엄마 보고 싶어요. 근데 다시 생각하면 난 차라리 고아였으면 좋을 것을...아마도 술집여자가 살던 집이었을 것이다. <일기창>이라는 제목으로 미루어 보건데 그 집에서 뜯어온 창이며 일기장이었을 것이다. 그는 지금 온데간데없다. 혹 죽었는지도 모른다. 다른 술집을 전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 밖으로 나올 일이 없는 누군가의 상처를 보고 듣는 것은 기묘한 경험이다. 독자를 의식하지 않고 쓴 텍스트는 없다고 했다. 심지어 일기장에서마저도. 그는 어떤 독자를 상상했을까.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독자였을까. 그렇게 때로 기억은 폭력적이다. 세상 밖으로 나올 일이 없는 누군가의 상처를 불러내서라기보다는 자신을 유일한 독자로 가정한 텍스트라는 점이 그렇다. 
그리고 <일기목>에서 작가는 폐목에 그날그날의 일기를 인두로 쓴다. 일기가 무색하게 일기는 날짜와 함께 최소한의 정보만 기록한 것이어서 그 의미를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작가는 알 것이다. 이런 암호 같은 일기가 술집여자가 쓴 일기와 비교된다. 접근불가능한 일기가 접근 가능한, 그럼에도 오히려 먼, 아득한, 손에 잡히지가 않는 일기와 비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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