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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완호/ 물신도시, 재화도시

고충환

서완호/ 물신도시, 재화도시 


Empty. 텅 빈. 아무 것도 없는. 공허한. <텅 빈> 연작에서 작가는 처음엔 인물을 그리고 나중엔 얼굴을 그린다. 그 실체가 손에 집힐 듯 극사실로 그린다. 인물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개는 검은 비닐봉지를 머리에 쓰고 있거나, 이따금씩 무슨 투구나 되는 양 철물을 쓰고 있다. 여기서 머리에 비닐봉지를 쓰고 있는 인물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으로 인해 정체성 상실과 정체성 혼란을 상징할 것이다. 그리고 철물을 쓰고 있는 경우는 세상에 대한 방어기제를 표상할 것이다. 일상을 가장한 정경이 연극무대 같고, 그 속에서 배우들이 일상을 연기하고 극적 상황을 연기하는 상황극 같다. 연극이란 시대정신을 연기하는 무대란 점에서, 여기에 현대인의 전형적인 징후며 증상일 수 있는 정체성 상실과 정체성 혼란이 연기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작업은 리얼리티를 얻는다. 
그리고 작가는 얼굴을 그린다. 그 얼굴들이 가면 같다. 매스가 없고 뒤가 없다. 제목마냥 텅 빈 얼굴들이다. 정체성은 페르소나와 아이덴티티로 분열된다. 사회적 주체며 제도적 주체가 페르소나라고 한다면, 가면(알다시피 페르소나는 가면이란 말이다) 뒤에 숨은 또 다른 주체가 아이덴티티다. 그렇게 나는 이중분열 되고 다중분열 된다. 그렇게 다시, 이중분열과 다중분열은 현대인의 또 다른 징후며 증상이 되었다. 작가는 바로 그 가면주체를 그리고 페르소나를 그린다. 그러므로 그 얼굴이 텅 빈 것처럼 보이고 가면처럼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보통 가면은 최소한의 형식으로 양식화되고 도식화되기 마련인데, 그래서 가치중립적이고 중성적이기 마련인데, 작가가 그린 가면은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어서 내면이 읽힌다. 우울한? 내성적인? 불안한? 불안정한? 그렇게 내면적인 가면, 가면을 배반하는 가면, 가면을 거부하는 가면, 가면 같지 않은 가면, 그러므로 이율배반적인 가면이 그로테스크리얼리즘을 떠올리게 만든다. 

Hidden Place. 숨겨진 장소. 은폐된 장소. 그리고 아마도 잊힌 장소. 그리고 작가는 인물에서 일상으로, 얼굴에서 정경으로 소재를 갈아탄다. 소재를 갈아탄다기보다는 인물이 살던 배경으로 그 시선이며 시점이 확장되고 연장된 경우로, 그러므로 어쩌면 주제의식이 심화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정경은 대개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도심보다는 구도심, 도시외곽, 도시의 변두리, 그리고 재개발현장과 같은, 어쩌면 도시 속에 소외된 도시를 그린다. 도시 속에 소외된 도시? 도시가 도시를 소외시킨다? 도시는 생물과 같아서 그 기능과 효율을 다하고 나면 다른 도시에 밀려난다. 세포가 죽으면 새살이 돋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그렇게 구도심은 신도시로 대체된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 주지하다시피 자본주의는 경제제일주의 원칙과 효율성 극대화의 법칙으로 견인된다. 따라서 경제성이 떨어지고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들은 도시 변방으로 밀려나고 가장자리로 추방되고 종래에는 사람들의 기억에서마저 희미해지고 지워진다. 그 과정에서 도시가 도시를 소외시키는데, 그렇게 구도심, 도시외곽, 도시의 변두리, 그리고 재개발현장과 같은 도시 속의 섬들이 생겨난다. 그것(곳)들은 어쩜 미셀 푸코의 제 3의 지대, 탈장소, 없는 장소, 부재하는 장소, 헤테로토피아, 그리고 어쩌면 작가의 제목에서처럼 은폐된 장소며 잊힌 장소에 해당한다. 자본주의의 무분별한 욕망에 의해 변방으로 추방되고 억압된 것(곳)인 만큼 공공연하게 반자본주의를 내재화한 그것(곳)은 그러므로 자본주의를 전복할 수 있는 혁명의 계기도 함께 내재화한다. 자본주의의 그림자, 자본주의의 말 못할 속사정, 아니면 아예 공공연한 물신의 부조리를 증거하고 폭로하는 잠재적인 계기(기폭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담 작가는 이러한 사실인식을 어떻게 표현하고 재현하는가. 작가는 흥미롭게도 유년시절의 경험, 어쩌면 우리 모두의 경험일 수 있는 경험에서 그 단서를 얻는다. 유년시절에 비디오는 꿈과 환상여행을 실현시켜주는 도구였다. 그렇게 꿈과 환상에 빠져 있는데, 불현듯 엄마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면 보던 화면 그대로 정지화면으로 전환하는데, 이때 화면에 가로 줄이 생기고 부분적으로 화면이 깨져 보인다. 여기서 엄마가 부르는 소리는 현실인식을 의미하고, 그 소리에 의해 나는 비로소 꿈과 환상에서 깨어난다. 그러므로 깨진 화면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의미하고, 주체로 하여금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는 현실이 부르는 소리를 뜻한다. 
이런 내막을 알고 보면 얼핏 생경해보이던 작가의 그림이 비로소 이해가 된다. 즉 작가의 그림은 친근하고 낯설다. 한눈에도 알만한 도시의 정경을 그린 것이어서 친근하고, 그럼에도 왠지 낯설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 멀쩡하게 잘 그려놓은 그림 위를 가로지르는 띠 같은 게 보인다. 초점이 흐린 사진 같기도 하고, 애써 그린 그림을 서너 번의 큰 붓질로 지운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화면을 가로지르는 띠로 인해 장소가 속한 시간의 차이를 표현한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담 작가의 그림은 같은 장소에 다른 시간이 중첩된 정경을 그린 것일까. 작가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도 보인다. 하나의 도시가 시간에 침식돼가는 과정을 보는 것도 같고, 그렇게 하나의 도시가 한갓 흔적으로 화해가는 과정을 보는 것도 같고, 그 흔적이 머금고 있는 정서적 환기를 표현한 것처럼도 보인다. 다시, 작가는 이런 시간의 차이며 작용을 처음부터 영 의식하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여하튼 작가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변두리 자체가 이미 흔적을 머금고 있고, 시간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정서적 환기가 그렇고, 사실 이를 통해 정작 작가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따로 있다. 우리 모두가 사는 집이며 꿈꾸는 도시는 알고 보면 부동산들이고 재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더불어 사는 생활공동체란 사실은 한갓 이상에 지나지 않고 요원한 일이라는 사실이다. 유년의 추억이며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마을공동체 또한 개발논리에 떠밀려 마치 빛바랜 사진처럼 희미해지다가 끝내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사실이다. 생활공동체며 마을공동체, 집과 도시는 선남선녀들의 삶의 터전이면서, 이와 동시에 그 자체가 재화적인 가치에 의해 그 의미비중이 저울질되는 하나의 상품이고 물신이라는 사실이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물신도시에서 살고 있다. 집도 상품이고 사회도 상품이고 도시도 상품인 사회, 추억도 물신이고, 이상도 물신이고, 심지어 개인이 꾸는 꿈마저도 물신화된, 그런 도시를 살고 있다는 냉혹한 현실을 작가의 그림은 주지시킨다. 
여기서 작가가 근작에 붙인 주제 혹은 제목으로 되돌아가보자. 작가는 근작을 <Hidden Place>라고 부른다. 숨겨진 장소, 은폐된 장소, 그리고 아마도 잊힌 장소를 뜻한다. 그 뜻이 의미하는 바가 분명해지지가 않는가. 그저 평범해 보이는 작가의 도시 그림은 사실은 물신도시며 재화도시(그리고 부동산도시)를 그린 것이다. 그저 평범해 보이는 정경이 도시의 얼굴이라면, 그 얼굴은 사실은 그 이면에 이처럼 그 자체가 재화라는 사실을 숨겨놓고 있다. 꿈꾸는 도시가 도시의 표면이라면, 물신도시가 그 이면이다. 꿈이 표면이고 현실이 이면이다. 결국 꿈꾸는 도시는 냉혹한 현실을 더 잘 숨기기 위한 장치이며 유혹하기 위한 장치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작가의 그림은 주지시킨다. 마치 어린 시절 비디오를 보다가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정지화면으로 전환하면 화면이 깨지듯이 작가의 그림도 깨져 보인다. 엄마가 부르는 소리가 곧 현실이 부르는 소리였던 것처럼 깨져 보이는 그림이 불현듯 현실을 인식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에서 깨져 보이는 화면은 꿈과 현실, 이상과 현실의 불일치, 부조화, 불협화, 차이를 표상한다. 작가는 바로 그 차이를 그렸다. 
그리고 작가는 근작에서 이런 차이, 곧 꿈과 현실의 차이,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강조하고 변주하는 의미 있는 형식실험을 예시해준다. 우선 도시 그림에서 화면이 깨져 보이게 만든 띠가 사라졌다. 사라진 건 띠만이 아니다. 세부가 지워지면서 상대적으로 그 구조가 강조돼 보이는, 무슨 정면성의 법칙을 적용해 그리기라도 한 듯 정면이 강조돼 보이는, 보기에 따라선 무감하고 무심해 보이는 건물들을 그렸다. 그리고 나아가 무슨 청사진이나 설계도마냥 아예 최소한의 골조만을 그려 삭막해 보이기조차하는, 그런 무미건조한 건물들을 그렸다. 전작과의 차이로 치자면, 전작에서 현실과 대비되던 꿈과 이상과 같은 정서적 환기를 걷어냈다. 아마도 근작이 무미건조해 보이는 이유와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이로써 작가는 아마도 꿈과 이상의 이면에 가려져 있던 도시의 실체며 도시의 민낯(물신이라는, 재화라는 현실)을 직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도시외곽 대신 변두리 숲을 그리는데, 각각 인물(Empty 연작)에서 도시(Hidden Place 연작)로, 그리고 재차 숲 혹은 풍경으로의 소재전환으로 보기에는 이른 것 같다. 아직은 그 추이며 경과를 더 지켜볼 일이다. 여하한 경우에도 숲 자체, 풍경 자체, 자연 자체가 목적인 경우로 흐르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작가의 주제의식으로 유추해볼 때 어떤 식으로든 삶에 대한 유비적 표현으로서의 숲이며 풍경이 되지 않을까 예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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