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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진, 삶은 어쩜 우연과 필연의 망을 짜는 일인지도 모른다

고충환

김희진, 삶은 어쩜 우연과 필연의 망을 짜는 일인지도 모른다 


김희진은 근작에서 날실과 씨실을 직조한 직물을 짠다. 사실은 직물구조 그대로를 그린다. 날실과 씨실을 직조한 직물구조야말로 말하자면 작가의 근작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특징일 수 있다. 여기서 직물구조는 사실은 그 위에 그림을 덧그린 캔버스 천 자체의 구조이기도 하다. 이로써 직물구조 위에 또 다른 직물구조를 덧그린 것일 수 있고, 그려진 직물구조를 통해 캔버스 천 자체의 직물구조를 재현한 것일 수 있다. 말하자면 재현을 통해 캔버스 천 자체의 구조를 드러내고 강조한 것일 수 있다. 캔버스 천 자체의 구조를 드러내고 강조한다? 이건 무슨 의미인가. 

주지하다시피 모더니즘 패러다임은 크게 형식주의와 구조주의로 구별된다. 점 선 면 색채 양감 질감과 같은 형식요소들이 회화를 지지하고 있고, 이미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회화라고 보는 것이 형식주의다. 그리고 구조주의는 회화를 지지하는 조건을 캔버스 천과 캔버스 틀과 같은 구조(그리고 여기에 평면이라는 조건)에서 찾는다. 캔버스 천과 캔버스 틀과 같은 오브제가 회화의 필요충분조건이라고 본 것이다. 지지체와 지지대, 쉬포르 쉬르파스가 그렇다. 형식주의든 구조주의든 회화의 의미기능을 감각적 사물대상의 재현에서 찾기보다는 회화가 성립가능해지는 최소한의 근거가 뭔지, 회화가 뭔지 물었다는 점에서(회화로 회화를 물었다는 점에서) 자기 반성적이고 메타 회화적이다. 
그림으로 캔버스 천의 직물구조를 드러내고 강조하는 작가의 그림은 이처럼 모더니즘 패러다임에, 특히 구조주의적 회화 관념에 맞닿아 있다. 은연 중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작가적 아이덴티티를 반영하고 있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여기에 작가는 그림을 그린다기보다는 그림이 그려지게 하는데, 말하자면 그림이 그려지는 조건을 매개하고 간섭하는데, 이 역시 다분히 모더니즘적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그림을 그린다기보다는 그림이 그려지게 한다? 다시, 무슨 말인가. 작가는 스포이트를 이용해 캔버스 표면 위로 물감을 흘리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린다. 스포이트로 물감을 흘리는 것은 작가의 몫이지만, 그 물감이 흘러내려 맺히는 비정형의 얼룩이며 자국을 만드는 것은 그림의 일이다. 작가의 일은 필연이지만, 그림의 일은 우연이다. 지난한 형식실험과 오랜 숙련을 통해 감을 잡을 수는 있지만, 엄밀하게는 작가의 통제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게 작가는 그림을 매개로 날실과 씨실로 직조된 캔버스 천 자체의 직물구조를 짜고, 그리고 여기에 다시 우연과 필연의 직물구조를 짠다. 회화가 가능해지는 조건으로서의 형식과 구조에 천착한 모더니즘을 계승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서사를 끌어들여 모더니즘을 넘어선다(모더니즘은 형식적 구조적이고 탈재현 탈서사적이다). 
우연과 필연은 알다시피 서사, 특히 거대서사(혹은 거대담론)의 전형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이를테면 인생이란, 삶이란 우연과 필연의 망을 짜는 일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우연이다. 그럼에도 여하튼 왔고 가고 있다는(살아진다는) 자명한 사실을 실존적 자의식으로 안다. 필연이다. 그렇게 작가는 우연과 필연의 망을 짠다. 여기에 작가는 그 망을 회화로 그리기도 하고 판화로 찍기도 한다. 판화로 찍은 망과 그림으로 그린 망을 하나로 중첩시킨다. 판화는 결정된 그림 그대로를 찍어낸다는 점에서 필연적이고, 그림은 판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연에 가깝다. 그렇게 작가는 회화와 판화를 중첩시켜 우연과 필연의 망을 변주하고, 그 의미를 확대 재생산한다. 

작가는 망을 짠다고 했다. 그 망은 우연과 필연으로 직조된 망이며, 삶의 망이며, 관계의 망이기도 하다. 망을 짜기 위해선 날실과 씨실이 있어야 하고, 삶의 망을 짜기 위해선 우연과 필연이 있어야 한다. 관계의 망을 짜기 위해선 이것과 저것이 있어야 하고, 나와 네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이와 틈이 전제되어져야 한다. 작가는 회화와 판화를 중첩시키고, 그리고 여기에 곧잘 오브제(예컨대 녹슨 못이나 구부러진 알루미늄 판 같은)와 문자스티커를 도입해 조형을 확장한다. 그 문자 중에 특히 CONNECTION과 GAP(그리고 여기에 ROTA)이란 영문자가 유독 눈에 띤다. 각각 관계와 접속, 사이와 틈이란 말이다. 아마도 망의 의미를, 망을 짜는 이유를 개념적으로 대리보충하고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그 망은 인연의 망이기도 하다. 망은 말하자면 불교에서의 연기설을 표상하는 것일 수 있다. 연기설 자체는 인과와 업보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그 자체가 인연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게 인연치고 그저 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연처럼 온 것 같지만, 알고 보면 필연이라는 큰 틀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예정설? 운명론?). 그리고 불교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서로가 서로를 밑도 끝도 없이 무한 반영하는 그물 인드라망을 표상하는 것일 수 있다. 그렇게 나는 너를 반영하고 너는 나를 반영한다. 주체는 타자를 욕망하고(혹은 나를 향한 타자의 욕망에 스스로를 맞추는 삶을 살고), 타자는 주체를 정립한다(세운다). 
그렇게 작가는 나와 네가 만나지는 인연의 망을 짜고, 서로가 서로를 무한 반영하는 관계의 망을 짠다. 그 망에는 접점이 있다. 작가가 만난 사람들, 인연들, 관계들, 사건들, 사연들이 정박하는 지점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작가는 망을 빌려, 망의 접점을 빌려, 그러므로 그림을 빌려 사실은 자신의 사사로운 서사며 개인서사를 재구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저마다 자신의 서사로서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그런 보편적인 서사를 그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영문자 중 ROTA가 있다. 작가가 근작에서 망을 짜면서(살면서 혹은 그림을 그리면서) 만나진 인연이고 계기로 볼 수 있겠고, 그러므로 어쩜 근작을 지지하는 소주제로 보면 되겠다. 관광지로도 유명한 사이판에서 경비행기로 30분가량 가면 있는, 봉우리에 분지를 품고 있는 산(웨딩케이크 산)을 중심으로 한 작은 섬이다. 작가는 그 섬에 일정기간 체류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그 그림을 망 위에다 올려놓았다. 창문에 빽빽하게 붙어있는 도마뱀이며, 화려한 원색이 인상적인 앵무새, 건물과 묘하게 어울리는 빛바랜 분홍색, 밤하늘을 떠도는 유성이며 별무리, 작가의 그림에서처럼 망으로 직조된 테이블보, 섬과 산, 원형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는 원시림과 바다를 그렸다. 
근작도 그렇지만 작가의 평소 그림은 구상적이기보다는 추상적이다. 그런 만큼 이 모두를 감각적 대상을 재현하는 것으로서보다는 추상적으로 그렸다(물론 도마뱀과 같은 일부 예외가 없지 않지만, 대개는). 그래서 얼핏 그 실재를 알아보기는 어렵다. 어렵지만 잘 보면 보인다. 그렇다면 추상으로 어떻게 감각적 실재를 그리고 알만한 대상을 그리는가. 색이며 터치, 드로잉과 분위기로 그렸다. 알만한 사물대상을 내면으로 불러들여(내재화해) 색과 터치, 드로잉과 분위기 속에 녹여냈다. 한마디로 표현을 그리고 표현적으로 그렸다(작가의 그림은 표현이 강하다). 구상을 재현적이라고 한다면, 추상은 표현적일 수 있다(물론 기하추상처럼 비 혹은 탈표현적인 추상이 일부 없지 않지만, 대개는). 
작가의 경우에 색과 터치, 드로잉과 분위기 중 특히 색채가 결정적이다. 원형 그대로의 자연일수록 색깔이 뚜렷한 편이고, 그 인상을 작가는 색채감정으로 녹여냈다. 색채의 마술사 마티스는 회화에서 결정적인 것은 색채이며, 여기서 색채는 표현에 다름 아니라고 했다. 색채가 곧 표현이다. 표현은 그 말속에 내부로부터 외부로 향하는 운동성을 포함한다. 알만한 사물대상을 내재화한 연후에 재차 외부로 표출한 것이 말하자면 표현이고 색채다. 작가는 그렇게 표현과 색채를 도구로 원형 그대로의 자연을 그리고, 자연에 대한 인상을 그렸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은 어쩜 문명 이전의 자연의 생명력이며 원형에 대한 그리움(원형적 그리움)을, 미지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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