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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좌/ 떠도는 기표들, 유령 같은 기호들

고충환

김선좌/ 떠도는 기표들, 유령 같은 기호들 


의미가 부여된 것들, 의미를 알 수 없는 것들, 잊힌 것들, 의미가 제거된 것들, 그 기표들은 마치 길을 잃은 듯 부유하는 유령들 같다(작가의 말). 작가는 떠도는 기표들, 유령 같은 기호들에 관심이 많다. 기표와 기의 사이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 기표는 투명하거나 불투명한 추상이 되었고, 기의는 뜬구름처럼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진즉에 릴케는 이런 사실을 예견했었다. 말과 말 사이의 연결이 없어지게 될 것이고, 말 한마디 한마디의 의미는 구름처럼 걷잡을 수 없는 덧없는 것이 될 것이고, 마치 흐르는 물처럼 될 것이라고 했다(말테의 수기). 
의미는 상황과 전제와 문맥과 맥락을 따라 옮겨 다닌다. 그때마다 매번 다른 의미를 의미한다. 세계와 개념 사이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개념은 다만 인간의 일일 뿐, 세계는 인간이 저를 뭐라고 부르든 그저 흐르는 강처럼 무심할 따름이다. 그렇게 세계와 개념, 실재와 의미 사이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 그 강 사이를 추상적인 기표들이 유령처럼 떠돈다. 나는 내가 하는 말 속에 들어 있지 않고, 내가 하는 말과 나는 동일하지 않다는 자크 라캉의 말은 우스갯소리로 유체이탈화법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이보다는 이런 말과 의미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강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가 있겠다. 
여기에 나무가 심겨진 고무 용기(화분)가 있다. 용기가 깨져 금이 가 있고, 철선을 엮어 금이 더 이상 터지는 걸 방지하고 있다. 아마도 주인의 살가운 손길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여기서 철선을 엮어 만든 매듭에 작가의 시선이 머문다. 보기에 따라서 그 매듭은 한글자모 같기도 하고, DNA 염색체 같기도 하고, 그 사이의 무엇 같기도 하다. 그리고 재개발현장의 허름한 담벼락에는 붉은 색 스프레이로 뜻 모를 한글과 숫자가 쓰여 있다. 그 속의 잡석이 노출돼 보이는 틈에도 동그라미 표식이 있다. 그리고 방향표시도. 
재개발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경이지만, 여기서 작가는 한글과 숫자와 표시가 눈에 들어온다. 재개발 현장이라는 문맥 속에서만 소통되는 기호들이고 언어들이다. 재개발현장의 사정을 알길 없는 작가에게 그 기호며 언어가 오리무중의 추상으로 다가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기호와 언어의 의미는 문맥에 갇혀있고(닫혀있고), 문맥 바깥에서는 추상이 된다. 작가는 그렇게 문맥 바깥을 떠도는 추상을 재구성해 또 다른 의미며 자신만의 상형문자를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다. 원래 벽에 부착했었을 무언가를 떼어낸 흔적과 자국에, 원래 뭔가가 쓰였을 내용(상호 아니면 경고문?)을 페인트칠로 덮어서 가린 팻말에 난 녹슨 못 자국에, 아마도 간판을 떼어내고 남은 지금은 더 이상 불이 들어오지 않는 네온에, 지워진 점집 간판에, 십자가에 관심이 쏠린다. 
다시, 작가는 의미가 부여된 것들, 의미를 알 수 없는 것들, 잊힌 것들, 의미가 제거된 것들, 그 기표들은 마치 길을 잃은 듯 부유하는 유령들 같다고 했다. 작가가 군산을 알 리가 없고, 재개발현장의 그간의 사정을 알 턱이 없다. 물론 정황적으로 알 수야 있겠지만. 그렇게 작가에게 군산은, 그리고 재개발현장은 추상적인 기호로 다가왔고, 알 수 없는 상형문자로 다가왔다. 존재와 부재 사이, 친근함과 낯섦 사이, 현실과 추상 사이를 무슨 골목길인양 떠돌며 자신만의 상형문자를 줍는 작가는 어쩌면 사실은 그때 그곳에 살았었을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줍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 흔적을 복원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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