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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ion, 뭘 어떻게 볼 것인가

고충환

Vision, 뭘 어떻게 볼 것인가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비평) 


보는 것은 그저 보는 것이 아니다. 의미론적으로 텅 빈 공허한 행위가 아니다. 보면서 동시에 분석하고 판단하고 심지어 미처 당도하지도 않은 일을 예기하기조차 한다. 이 모든 일들이 본다는 하나의 행위 속에 담긴다. 그러므로 본다는 것은 총체적 인식행위이다. 보는 것은 곧 인식이다. 그가 뭘 어떻게 보느냐는 것이 곧 그의 인식을 결정한다. 그의 세계관, 자연관, 우주관, 그러므로 어쩜 그의 삶을 결정한다. 뭘 보는가가 내용을 결정하고, 어떻게 보는가가 형식을 결정한다. 더욱이 조형예술은 시각언어를 다루는 기술이다. 그러므로 보는 문제 곧 시점과 관점은 조형예술에서 결정적이다. 그가 뭘 보느냐(혹은 엄밀하게는 보아내느냐)에 따라서 세계가 확장되고 존재가 심화된다. 그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현실이 정의되고 재정의 된다. 그렇게 다(多)현실, 복수현실이 재현의 이름으로 제안되고 수행된다. 
여기에 9명의 작가들(김기수, 김상열, 김철환, 류현욱, 윤동희, 이태희, 정지현, 추종완, 허양구)이 있다. 당대 작가들은 뭘 어떻게 보는지, 어떤 세계관이며 자연관, 우주관이며 삶의 관점을 실천하고 있는지, 어떤 부류의 현실인식을 제안하고 있는지를 살필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쩜 동시대미술의 압축된 한 장을 이해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김기수. 여기에 두 개의 달이 있다. 하나는 흰 천에 싸인 달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를 반영하는 달이다. 흰 천에 싸인 달은 아마도 은근한 달빛을 흰 천과 동일시한 것일 것이다. 그리고 달과 관련한 서사를 무슨 이야기보따리마냥 싸안고 있는 것일 터이다. 그리고 달은 외계를 반영하고 내면을 반영하고 현실을 반영한다. 달은 가장 오래된 거울이다. 신화학에서 달은 여성(그리고 여성성)을 상징하고 자연을 상징하고 존재의 본성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달을 그리는 화가는 그의 실제 성별과 무관하게 어느 정도 여성(혹은 여성성)이며, 존재의 잃어버린 원형을 찾아 길을 떠나는 순례자들이다. 

김상열. 여기에 식물들의 정원이 있다. 식물들에 대한 지식이 일천해 잘 알 수도 없지만,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작가가 그린 식물들을 알아볼 재간이 없기는 매한가지다. 무슨 연기나 안개에 감싸인 양 희뿌연 막 뒤편으로 식물들이 겨우 드러나 보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이 그림을 왜 비밀정원이라고 부르는지 그 이유를 알겠다. 자연은 비밀을 간직하기 마련이고, 또한 그 비밀은 존중되어져야 한다. 자연이 인간의 개념으로 낱낱이 재단되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재단되는 것도 아니다. 작가는 어쩜 이 그림이 소통과도 관련이 있다고 했다. 식물을 감싸고 있는 막처럼 어느 정도의 비밀, 어느 정도의 신비, 어느 정도의 알 수 없음에 대한 존중이 진정한 소통의 매개역할을 한다는 의미로 읽고 싶다. 

김철환. 작가는 몸이 생산한 부수물에 관심이 많다. 머리카락 뭉치, 손톱, 발톱, 각질과 같은. 진즉에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이런 몸의 부수물들을 애브젝트라고 명명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로부터 애브젝션아트 곧 저급한 비물질미술이라고 의미부여하기도 했다. 그건 말할 것도 없이 정신이 아닌 몸에서 자기정체성을 찾는 최근의 경향과 관련이 깊다. 여기에 말라붙은 비누거품과 한 덩어리를 이룬 머리카락뭉치가 있다. 샤워하고 남은 찌꺼기다. 작가는 그 찌꺼기를 무슨 신주단지나 되는 양 모셔놓았다. 박물관 전시실에서처럼 찌꺼기를 보관한 유리관을 바로크 풍의 좌대 위에 진열해 놓은 것. 이로써 작가는 몸을 기념하고, 사사로운 개인을 기념한다. 그리고 작품을 돋보이게 만드는 미학적 장치며 제도적 관습을 풍자한다. 

류현욱. 작가는 바다를 그렸다. 표면에 잔물결이 일렁거리는, 그리고 그 이면에 알 수 없는 어떤 형상이 어른거리는. 죽은 누이를 화장해 재를 뿌린 바다고, 그 바다가 바라보이는 숲이 반영된 바다다. 숲과 함께 주검(그리고 죽음)이 반영되고 그리움이 반영되고 내면이 반영되고 존재의 비의가 반영된 바다다. 그러니 바다가, 바다그림이 평범하지가 않다. 나아가 아예 그가 그리는 혹은 보는 회화 자체가 평범할 수가 없다. 앞으로 바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현재 작가는 회화를 애도행위며 제식행위라고 본다. 사실 여기에 회화의 이유를 대고 있는 현대미술이 없지 않다. 이 이유며 주제의식을 어떻게 풀어내고 심화시킬지 향후 작가의 행보를 지켜볼 일이다. 

윤동희. 문명사회며 도시의 최소단위원소 혹은 입자는 뭘까. 콘크리트구조물이다. 시멘트벽이다. 시멘트가루다. 그 시멘트가루가 호흡을 통해 인간의 입속으로 들어가고 뇌에 안착된다. 그렇게 뇌에 기생하고 최적화된 시멘트 가루의 자기번식욕구로 인해 도시가 만들어졌다는 가상의 이야기를 작가의 작업은 테마로 하고 있다. 가상의 이야기답게 터무니없고(시멘트는 살아있는 세포와는 다르다), 가상이지만 꽤나 그럴 듯한 이야기다(도시는 실제로 시멘트로 만들어졌다). 터무니없음과 그럴듯함 사이, 있을 법하지 않은 사실과 현실인식 사이, 상상력과 현실 사이를 매개시켜주는 서사가 있다. 바로 사회학적 상상력(아니면 생물학적 상상력?)이다. 그렇게 작가는 상상력을 매개로 자신의 조형작업이 사회에, 현실에, 사회적 현실에 접맥되고 파생될 수 있는 가능성의 지점을 찾아낸다. 

이태희. 여기에 시소가 있다. 양쪽 끝에는 반가사유상과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각각 동양과 서양의 정신세계를 상징하는 아이콘(전형)들이다. 시소로 보아 누가 잘 하는지 보자는 경쟁이라도 하는 것일까. 실제로 작가는 이 작업을 마음게임이라고 부른다. 마음게임? 사유도 마음이고 생각도 마음이다. 다 같은 마음이지만 사유가 깨달음과 관련이 깊다면, 생각은 다분히 즉물적이고 실증주의적이다. 그리고 여기에 소크라테스가 합류한다. 즉, 나는 내가 누군지 모른다는 것을 안다(시소에 적힌 문구). 여기서 다시, 사유도 생각도 그리고 무지마저도 다 마음이다. 마음이 불러일으키는 현혹(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음 곧 자아의 소멸이 곧 진정한 나(진아)를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마음이 없는 나? 아마도 마음에 휘둘리지 않는 차원이며 경지를 의미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불교의 존재론(아님 탈존재론?)을 해법으로서 제안한다. 그런데 무슨 해법인가. 아님 해답? 균형? 어쩜 작가는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예술은 질문의 기술이기도 하다. 

정지현. 한 사람이 숲속에서 길을 잃었다. 작가는 유년시절 숲속에서 길을 잃은 경험과 그때 느낀 공포를 떠올리면서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앞으로 시리즈 그림으로 확장 심화시킬 것이라고도 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원래 친근한 것이 불현듯 낯설게 느껴질 때 두려움이 생긴다고 했다. 같은 숲이지만 낮에 본 숲이 다르고 밤에 본 숲이 다르다. 굳이 밤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길을 잃은 숲은 낮이라 해도 밤이나 다름없다. 모든 길을 잃은 숲은 밤이다. 여기서 작가는 혹 삶이란 것이 흡사 숲속에서 길을 잃는 것이며, 숲속에 갇힌 삶을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한다. 숲속에서 길을 잃는 것을 삶에 대한, 존재에 대한 유비적 표현으로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숲은 공포를 불러일으키면서, 동시에 정화의 대상(아니면 원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혹 공포는 정화로 가는 길목이며 관문일 수 있다. 숲에서 길을 잃은 작가가 이로 인해 공포를 느낄지 아니면 정화에 이를지 그 과정을 지켜볼 일이다. 

추종완. 진실만으로는 살 수가 없다. 어쩜 진화란 진실의 역사이기보다는 진실을 가리고 은폐하는 자기기만의 역사인지도 모른다.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이고 서로 속이는 삶의 방식이야말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그리고 슬픈 삶의 현실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기만의 탈을 만들고 쓰고 쌓는다. 그렇게 쌓다보면 불현듯 내가 탈인지 탈이 난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원래 진실을 추구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기만을 좇았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 작가가 앓는 이 앓음은 어쩜 우리 모두의 앓음일 수 있다. 다시, 그렇게 나는 내가 만들고 쓰고 쌓아온 탈과 씨름을 한다. 그 덕지덕지한 기만의 껍질을 벗고 아마도 진실했을 처음의 나를 찾고 싶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사회적 주체(혹은 제도적 주체)와 그 주체가 억압한 또 다른 주체 사이에서 번민하는 자기분열과 고뇌를 그리고, 현대인의 징후며 증상을 주제화한다. 

허양구. 작가가 처음으로 노랑머리 소녀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 꽤 오래전 일로 기억된다. 그때만 해도 노랑머리 소녀를 찾아보기가 어려웠는데, 지금은 다반사가 되었다. 어떤 면에선 선구적인 면이 없지 않았다고, 혹은 시대를 선취하는 부분이 없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염색한 머리와 모자, 귀걸이와 네일 페인팅(요새는 붙이는 손톱도 출시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일회용 문신과 같은 이러저런 소품들로 자기를 꾸미는 것은 스타일의 문제며 차별화의 전략, 그리고 서브컬처의 일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주제화한 현대인의 초상은 알고 보면 이런 스타일이며 차별화의 전략을 주제화한 것이란 점에서 사회학적인 의미를 얻는다. 한 시대를, 한 시대의 서브컬처를 대변하는 신인류의 초상이라는 문화사적인 의미를 획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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