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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욱/ 자연의 시그널, 중화와 소리

고충환

한명욱/ 자연의 시그널, 중화와 소리 


자연은 객관적 대상이 아니다. 자연에는 이미 주체가 포함돼 있어서 주와 객을 나눌 수가 없다(메를로퐁티). 그러므로 어쩜 자연은 없고 자연관이 있을 뿐이다. 자연관만큼이나 많은 그리고 다른 자연들이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눈이 다반사인 지역에 사는 사람의 설경과 생판 처음으로 눈을 보는 사람의 설경이 같을 수는 없다. 에스키모 원주민들은 문명인으론 상상할 수조차 없는 다양한 눈 색깔을 알고 있다고 한다. 그들 눈엔 그 미묘한 차이가, 심지어 감각을 넘어 심리적인 차이마저 다 보이는 모양이다. 보다 적극적으로 자연은 그저 주어진 그대로라기보다는 발견되고 확장된다. 지금도 화가들은 또 다른 하늘을 발견하고, 시인들은 어둠을 미처 알려지지 않은 깊이로까지 확장시킨다. 물론 이와는 사뭇 혹은 많이 다른 입장도 있다. 서양에서 자연은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대상이지만, 동양에서 자연은 한갓 물질과 감각의 층위를 넘어선다. 그렇다고 관념적 대상만도 아니다. 스스로 그런, 저절로 그런, 처음부터 그랬던, 인간의 개념 곧 자연관 바깥에 있는, 그러므로 인간의 개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다시 그러므로 인간의 개념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자연이다. 인간이 자연을 뭐라고 부르든 자연이 무슨 상관일까(그건 인간의 일이며 개념의 일일 뿐). 그럼에도 여하튼 이것도 자연관이다(개념의 바깥을 가정하는 것도 여하튼 개념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할 것이므로). 자연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연동된 문제의식의 소산이다. 

그렇게 자연은 이미 그 자체로 주관적이고 주관적 대상이다. 추상적 기호로서 주어진 조건에 대한 해석의 대상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자연이 보내는 시그널(추상적 기호)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한명욱은 그 시그널을 각각 중화와 소리라고 본다. 중화와 소리야말로 자연을 지지하는 두 축이라고 본다. 
중화가 뭔가. 상호간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 화합해 조화를 이룬다는 말이다. 자연이 꼭 그렇지가 않은가. 자연을 구성하는 요소 곧 자연소는 하나같이 다 다르다. 그렇게 다름과 차이가 어우러져 자연을 만든다. 음기와 양기가 화합해 존재를 생성 소멸시키고, 아폴론적 충동(질서의식)과 디오니소스적 충동(무분별한 생명력)이 어우러져 예술을 만든다(니체). 중화에도 적극적인 중화가 있고, 소극적인 중화가 있다. 형식논리로 치자면 바로크미술에서처럼 부조화를 통한 조화를 매개로 기왕의 조화의 의미를 확장시키는 경우가(그리고 김지하의 기우뚱한 균형도) 적극적인 중화에 해당한다. 이에 비해 소극적인 중화는 적어도 외관상 같은 성질을 가진 것들이 화합해 조화를 이루는 경우를 말한다. 
작가의 경우가 그렇다. 형식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에서 중화는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가. 밑칠이 드러나 보이도록 색채를 겹쳐서 칠한다거나, 비단에 그림을 그릴 때 앞뒷면 모두 채색해 색이 하나의 층위로 서로 스며들게 한다거나, 화면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바림한 색감과 화면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바림한 색감이 화면 가운데서 하나로 만나지게 한다거나 하는 것이 그렇다. 주지하다시피 서양화 재료는 불투명이고 한국화 재료는 투명이다. 불투명은 덮어서 가리지만, 투명은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색감을 다 받아들여 다만 깊어지거나 미묘해질 뿐이다. 이때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색감은 말하자면 상호간 이질적인 요소들로 볼 수가 있겠고, 그 이질적인 요소들을 자기 속에 불러들여 깊어지고 미묘해지는 것이고, 그렇게 중화가 실현되는 것이다. 
한편으로 여기서 적극적인 중화와 소극적인 중화는, 특히 형식논리로 본 중화는 가치론적 개념은 아니다. 상황논리에 연동된 개념이다. 그렇지만 가치론적 개념과 전혀 무관하지만도 않은데, 특히 형식논리로서보다는 혁명(상호간 이질적인 태도와 입장이 첨예하게 부닥치는)과 같은 사회학적 계기로서 적극적인 그리고 능동적인 중화개념이 작동할 때가 그렇다. 
그렇게 작가는 형식논리를 통해 본 소극적인 중화개념을 매개로 모든 색감을 자기 속에 다 받아들여 깊어지고 미묘해지는, 심지어 그로 인해 맑아지고 투명해지기 조차하는 경지를, 어느 정도는 한국화 특히 채색화의 고유성 내지 본성이 자기를 실현한 것 같은, 그런 회화적 차원을 열어놓는다. 덧칠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투명해지고 맑아진다는 것에 한국화의 아이러니가 있고, 특정성이 있다. 마치 덧칠을 통해 투명하고 맑은 지경을 찾아가는 과정 같다고나 할까. 그런가하면 작가는 자잘하고 섬세한 구김이 조성된 화면 위에 그림을 덧그리는데, 그렇게 조성된 화면효과 자체를 통해 중화가 실현되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고, 그러므로 중화는 작가의 회화의 바탕(본)이 되고 있다고도 할 수가 있겠다. 우연한, 사실은 우연을 가장한 비정형 균열들로 등가치를 이룬 평면은 말하자면 헤아릴 수도 없는 다름과 차이들로 구조화된 자연소에 해당하고, 그 다름과 차이를 포용하고 중화하는 자연(그리고 자연의 원리 혹은 운동성)에 해당한다. 중화하는 자연(그리고 자연원리)의 메타포로 볼 수가 있겠다. 

중화는 그렇다 치고, 그렇다면 소리는 어떤가. 중화가 자연의 원리 혹은 운동성이라고 한다면, 소리는 주체가 자연을 대하는 감각과 관련된다. 사람들은 대개 시각의 창을 통해 자연을 대하고, 어떤 사람들은 냄새로, 그리고 드물게는 맛으로 자연을 감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기에 작가는 소리를 통해 자연을 감각한다. 자연은 온갖 소리들로 가득하다. 살아있는 것들이 내는 소리다. 알만한 소리도 있고, 그렇지 않은 소리도 있다. 시적표현이지 싶지만, 어떤 예민한 사람은 봄에 단단한 흙을 비집고 새싹이 움트는 소리를 듣는다고도 한다. 어떤 시인은 바다 소리를 듣는 소라 고동에 대해서 얘기하기도 한다. 소라 고동을 귀에 대면 속이 빈 껍질을 통과하면서 공명되는 소리를 듣는 것이지만, 사실은 파도소리에 실려 온 전설과 기억을 듣는 것이란 점에서 시적 표현이긴 매 한가지다. 이처럼 소리는 생명력과 관련이 깊다. 소리는 말하자면 자연의 본질이고 존재의 본성이다. 그리고 시적암시와 관련이 깊다. 소리는 상상력을 자극해 지금여기에는 없는 무언가를 불러온다. 바로 이 지점에서 상징이 움튼다. 그리고 그렇게 예술은 상징이며, 암시의 기술이 된다. 그림의 경우로 치자면 청각기호(소리)와 시각기호(이미지)가 서로 호환되는 공감각의 기술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에서 소리는 어떻게 암시되고, 또한 공감각의 기술은 어떻게 실현되는가. 작가의 그림을 보면 나무덩굴과 나비 두세 마리가 어우러져 있다. 전통적인 장르로 치자면 초충도의 각색 내지는 재해석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인데, 그 꼴이 꼭 음표 같다. 나무덩굴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진 꼴이 무슨 악보에서의 오선을 변주한 것 같고, 그렇게 변주된 선을 따라 노랫가락이 흐르는 것도 같다. 소리가 공명을 불러일으키려면 공간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 부응이라도 하듯 적절한 여백이 이런 공명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떠맡는다. 심플하면서도 단아한 평면 위에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정치한 묘사로 재현된 모티브가 대비되면서 자연의 소리를 암시하고, 어쩜 내면의 소리를 듣는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예술은 암시의 기술인만큼이나 착각의 기술이기도 한 것이다. 
패턴과 동어반복 역시 소리를 암시하는데, 아마도 하나의 동기가 반복 재생산되면서 무한 변주되는 리듬과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작가의 또 다른 그림에서 보면 같은 형태 같은 크기의 관람 차가 같은 간격을 유지한 채 같은 높이로 허공에 매달려 돌아가는 놀이시설이 그렇다. 그런가하면 소리는 보다 직접적인 방식으로 예시되기도 한다. 아예 악기에 해당하는 색소폰을 소재로 그린 것이 그렇고, 나팔처럼 생긴 나팔꽃을 소재로 그린 그림이 그렇다. 그리고 여기에 꿈을 꾸듯 아롱거리는 점멸등과 함께 마치 오르골 같은 몽환적인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회전목마에 이르기까지. 
이 일련의 그림들을 작가는 자연의 소리라고 부른다. 자연의 소리는 말하자면 어떤 그림들의 제목이면서, 동시에 어느 정도는 작가의 그림을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한 것이다. 그건 자연의 소리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다만 자연에만 한정되지는 않는 소리다. 자연의 소리(자연을 소재로 그린 그림)이기도 하고, 내면의 소리(자화상)이기도 하고, 어쩜 작가가 유년으로부터 되불러온 기억의 소리(놀이시설을 소재로 그린 그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소리는 어쩌면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매개체일 수 있고(마치 프루스트효과에서와도 같은), 그렇게 소리를 그리면서 사실은 존재의, 자연의, 그리고 유년의 그리움을 그려놓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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