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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록/ 이중그림, 하나의 그림 속에 들어있는 다른 그림

고충환

이상록/ 이중그림, 하나의 그림 속에 들어있는 다른 그림 


유명한 작품들 중에는 현대인에 의해 소환되는 경우들이 많다. 주로 작가들이지만 더러 디자인이나 광고 등 명작의 소환은 특정분야를 가리지 않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원작에 대한 오마주의 표시일 수도 있고, 희화화와 풍자를 위한 경우도 적지 않다. 그렇게 유명세를 치르는 작품들 중에는 모나리자도 있다. 미술에 문외한인 사람도 모나리자는 안다. 모나리자가 전시된 미술관에는 언제랄 것도 없이 사람들이 겹겹이 진을 치고 있어서 정작 그림을 보기가 쉽지 않은, 그 자체가 또 다른 볼거리인 진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그렇다면 모나리자의 무엇이 사람들을 이토록 매료시키는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모나리자의 미소를 들 수가 있을 것이다. 어쩜 모나리자 자체보다 더 유명한 모나리자의 미소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스퓨마토 기법(안개기법)으로 그린,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아리송한 미소로 유명하다. 패러디의 경우로 치자면 모나리자에 콧수염을 그려 넣어 희화화한 마르셀 뒤샹과, 자신의 다른 그림들에서처럼 모나리자를 뚱녀로 변신시킨 보테로의 그림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상록 역시 근작에서 모나리자를 차용한다. 특별한 이유는 없는 것 같다. 그저 눈에 띠고 손이 갔을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대중적인 이미지에 대한 관심, 그리고 좀 더 진지하게는 이미지가 생산되고 유포되고 소비되는 메커니즘에 대한 관심, 동시대에 이미지가 재현되는 방식(이미지정치학?)에 대한 관심, 그러므로 어쩌면 굳이 모나리자가 아니어도 무방할 관심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쩜 마르셀 뒤샹의 도발에 자기도 동참하고 있다는(혹은 공감한다는) 동료의식이 작용했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작가는 근작에서 모나리자를 차용한다. 그런데 정작 그림 어디에도 모나리자는 없다. 사실은 있는데 잘 보이지가 않는다. 잘 안보이지만, 잘 보면 보인다. 숨은그림찾기라도 하는 것일까. 숨은그림찾기는 아니지만, 꼭 숨은그림찾기라도 하는 것 같다. 말하자면 작가는 모나리자를 숨기면서 드러내고 드러내면서 숨긴다. 사실은 작가가 그렇게 한다기보다는, 보는 사람의 시점(그리고 어쩜 입장) 여하에 따라서 모나리자는 드러나기도 하고 숨기도 한다. 작가는 말하자면 본다는 것의 문제, 시지각의 문제, 그리고 어쩜 시각과 욕망과의 관계문제를 건드린다. 당신은 지금 뭘 보고 있는가(시각현상), 혹은 사실은 당신은 지금 뭘 보고 싶은 것인가(시지각적 욕망), 하는 문제를 주제화한다. 보는 것은 그저 보는 것이 아니다. 이해와 판단이 보는 것과 동시에 이루어진다. 봄으로써 이해하고 보면서 판단한다. 본다는 것은 말하자면 지각과 동시에 의식에 등록이 되는, 그렇게 등록된 의식이 재차 지각에 투사되는, 그리고 그렇게 지각과 의식이 상호작용하는, 그런 총체적이고 인식론적인 행위이다. 그리고 보는 것은 욕망에 연동된다. 일반화하기는 그렇지만 대개 본다는 것은 사실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보고 싶은 대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쩜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그리고 객관적 사실마저도)은 사실은 요원한 일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모나리자를 매개로 그런 시각현상과 시지각적 욕망의 문제를 건드리고 주제화한 것이다. 
이런 주제의식을 이해하기 위해선, 작업의 제작과정을 대략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먼저 작가는 컴퓨터 프로세스를 통해 모나리자의 원작 이미지 중 특히 눈 부위를 집중 클로즈업한 부분 이미지를 원하는 이미지로 각색한다. 원하는 이미지라고해서 특별한 조작과정이 개입된다기보다는, 다만 원작이미지를 확대 복사한 이미지로 이해하면 되겠다. 주지하다시피 하나의 이미지는 최소단위원소로 환원된다. 인쇄매체의 경우 망점이, 디지털매체의 경우 픽셀이 모이고 흩어지는 여하에 따라서 하나의 형태가 구축되기도 해체되기도 한다. 그런 만큼 하나의 이미지를 확대 복사하면 형태는 사라지고 망점과 픽셀만이 오롯해진다. 하나의 이미지에 숨겨진, 하나의 이미지를 구축해준 최소단위원소가 그 실체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사실은 형태가 사라졌다기보다는 확대 복사되는 과정에서 가장자리가 확장되면서 한눈에 가늠할 수는 없는 형태로, 잠정적인 형태로 전이된 경우로 보는 것이 맞겠다. 그렇게 적어도 외적으로 보기에 망점과 픽셀이 오롯해지는 반면, 알만한 형태는 사라진다(사실은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작가는 그 망점이나 픽셀단위원소가 만들어준 패턴 그대로 MDF 합판으로 레이저커팅 한다. 
그리고 동대문 시장에서 구한 각종 반짝이 천(소위 조명빨을 잘 받는 천)을 바탕화면 삼아 그 위에다가 커팅 된 패턴을 중첩시켜 고정시킨다. 그리고 여기에 패턴의 표면과 측면을 색칠해 마감한다. 바탕화면을 칠하거나 그리는 대신 기성의 오브제를 이용하는 것인데, 일반적인 가정용 천이라기보다는 호프집이나 주점 같은 상업시설에서 볼 법한 벽지며 의상을 연상시킨다.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과 함께, 복고스타일에 대한 향수가 작용했을 수 있겠고, 모나리자에 걸 맞는 옷을 입힌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모나리자도 복고고, 반짝이 천도 복고다. 그리고 어쩜 뒤샹으로 대변되는 아방가르드도 작가와 함께 늙어가면서 복고가 되었다). 더러 화려하고 섬세한 꽃문양 패턴으로 장식된 하늘거리는 천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에로틱한 느낌을 준다. 때로 신문지를 콜라주하는 것으로 바탕화면을 대신하기도 하는데, 아마도 시사적인 관심을 반영한 것일 터이다. 그렇게 작가는 바탕화면을 변주하는 과정을 통해서 복고적인, 에로틱한, 그리고 시사적인 자신의 평소 감각이며 관심사를 투사하고 반영한다. 
그렇게 완성된 작품을 보면, 앞서 말했듯 모나리자는 보이지가 않고 다만 망점과 픽셀이 만든 추상적인 패턴만 보인다. 가까이서 볼 때가 그렇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보면 비로소 모나리자의 눈이 보이고 눈매가 보인다. 가까이서 볼 때 추상이 보이고, 멀리서 볼 때 형상이 보인다. 당신은 뭘 보고 있는가. 망점 혹은 픽셀인가 아님 모나리자의 눈인가. 당신은 뭘 보고 싶은가. 추상적 패턴인가 아님 알만한 형상인가. 미적거리 혹은 심적 거리라는 미학적 용어가 있다. 그림을 잘 감상할 수 있게 해주는 적절한 거리를 말한다. 단순히 그림감상에만 유용한 것이 아니라, 사태를 파악할 때도 적용 가능한 말이다. 고정된 시점을 전제한 것이지만, 작가는 그 고정된 시점을 깨트린다. 관객들로 하여금 고정된 시점에 서서 보는 대신 움직이면서 보게 만든다. 가까이에 다가가서 보게 만들고, 멀찌감치 떨어져서도 보게 만든다. 그렇게 하나의 그림 속에 들어있는 두 개의 다른 그림을 보게 만든다. 앞서 말했듯 작가가 그렇게 한다기보다는 관객이 그렇게 하도록 유도한다. 더욱이 그림은 앞뒤뿐만 아니라 좌우로도 움직이게 만든다. MDF합판은 일정한 두께를 가지고 있어서 좌우로 시점을 옮기는 여하에 따라서 화면이 미세하게 왜곡돼 보인다. 물론 정면에서 보면 진즉에 알고 있던 형태 그대로를 볼 수는 있다. 무슨 말인가. 본다는 것은 학습된 것이며 관습의 소산이라는 말이다. 본다는 것은 사실은 내가 진즉에 알고 있었던 선입견을 재확인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움직이게 만드는 작가의 그림은 바로 이처럼 관습화된 시지각의 실체를 새삼 깨닫게 만든다. 그리고 여기에 결정적인 사실로 치자면 추상과 구상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추상 속에 구상이 들어있고, 구상 속에 추상이 내재돼 있다. 망점과 픽셀의 최소단위원소(어쩜 미립자 아님 소우주) 속에 알만한 형태(감각적인 세계)가 잠재돼 있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작가가 굳이 모나리자 자체(그리고 전체)가 아닌 눈을 소재로 한 것에는 이런 의미가 있었다. 본다는 것은 곧 인식의 문제다. 지각이 곧 의식이다. 다시, 당신은 뭘 보는가. 사실은 뭘 보고 싶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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