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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찬, 비닐봉지괴물과 그로테스크리얼리즘

고충환

이병찬, 비닐봉지괴물과 그로테스크리얼리즘 


처음엔 그저 검은 비닐봉지들이 흩어져 있거나 쌓여있다고 생각했다. 더러 은박지와 알록달록한 반짝이 필름 그리고 투명 필름도 부분적으로 섞여 보였다. 이게 뭐지? 그리고 잠자듯 누워있던 비닐봉지들이 빵빵하게 부풀리면서 서서히 일어서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바람이 주입되고 있었다. 생명에 필수적인 공기? 호흡? 자양분? 그렇다면 살아있는 유사생명체? 그렇게 일어선 비닐봉지는 사람 키보다 웃자라고 웬만한 건물 높이를 훌쩍 넘어선다. 그렇게 내려다보이던 비닐봉지를 올려다보니 위압적으로 보였다. 생경하고 낯설고 이질적으로 보였다. 그로테스크하게 보였다. 다리에 빨판이 달린 문어처럼도 보였고, 알 수 없는 심해 생명체처럼도 보였고, 외계생명체처럼도 보였다. 다만 00처럼 보일 뿐 00라고 특정할 수는 없는 미지의 생명체처럼 보였다. 돌연변이? 변태? 변종? 타자? 그리고 괴물처럼 보였다. 알 수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위압적이라는 점에서. 
봉준호는 영화 <괴물>을 만들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유독성 화학물질을 먹고 자란 유전자 변형 괴물이 한강에 출몰해 사람들을 공격하는 영화다. 한강에 괴물이 있을 리가 없다. 그렇지만 미군부대는 있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미군부대를 비판한 영화다. 이처럼 이병찬의 작업 역시 괴물의 또 다른 버전을 만든 것일까? 현실비판을 위한 또 다른 계기를 제안한 것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작가는 이 작업을 <소비생태계>라고 부른다. 소비생태계? 처음엔 괴물과 소비생태계와의 관계가 선뜻 와 닿지가 않았다. 그러나 비닐봉지와 소비생태계와의 관계라고 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비닐봉지는 소비생태계의 최하층에 속한다. 이미지가 모든 것을 삼키는, 이미지가 실재를 대체하는 이미지정치학의 시대에 비닐봉지는 이미지랄 것도 없는(굳이 따지자면 최하층 부류를 이미지화한), 한번 쓰고 버려지는 일회용품의 운명을 타고났고 임시방편의 운명을 타고났다. 그런 비닐봉지로 작가는 괴물을 만들었다. 
그랬다. 알고 보니 작가는 자본주의를 괴물에 비유한 것이었고, 자본주의를 괴물로 형상화한 것이었고, 자본주의 괴물을 만든 것이었다. 알다시피 자본주의에서 괴물에 비유할 만한 경우로 치자면 물신이 있다. 신의 죽음이 공공연하게 선언된 이후 그 빈자리를 대신한 것이 자본주의고 물신이다. 물신(그리고 물신주의)은 페티시즘을 번역한 말이다. 페티시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사물대상을 주물로 보고 인격대상으로 탈바꿈시키는 태도를 말한다. 기왕에 사물대상의 존재방식을 가진 것들은 물론이거니와 사물대상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들, 이를테면 심리적이고 정신적이고 성적인 것들, 정치적이고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것들, 그리고 미학적인 것들을 사물화 하는 태도를 말한다. 그렇게 물신의 물화현상은 유형무형을 가리지 않는다. 전면적이고 무차별적이다. 
그런 물신 앞에 비닐봉지는, 비닐봉지 괴물은 괴물이 무색할 만큼 철저하게 무기력하다. 알다시피 비닐봉지는 외부로부터의 충격에 취약하고 약간의 스크래치에도 바람이 빠진 채 주저앉고 만다. 그러므로 겉보기에 위압적으로 보이고 살짝 귀엽게 보이기조차 하는, 바람이 빠진 채 볼품없이 주저앉은 비닐봉지 괴물은 한편으론 자본주의 물신을 유혹하는 오브제로(자본주의의 욕망을 물화된 형식으로) 전이시킨 것이고 다르게는 그 욕망의 허구성을 풍자한 것일 수 있다. 말하자면 질 들뢰즈의 00되기 혹은 00인 척하기를 예시한 것일 수 있다. 들뢰즈에게 00되기 혹은 00인 척하기는 제도와 권력을 모방하면서(사실은 모방하는 척하면서) 제도와 권력을 내파하는 전략이다. 그렇게 작가의 비닐봉지 괴물은 자본주의 물신이 주물숭배대상으로 현현한 것 같다. 위엄과 함께 범접할 수 없는 권위로 무장한, 무차별적인 폭력과 무관용적인 처벌로 사람들을 움찔하게 만드는, 때론 알 수 없는 대상으로 자기를 포장하고 신비화하는 물신이 현현한 것 같다. 그러나 겉보기에 그렇지 알고 보면 한갓 비닐봉지로 만든 허접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폭로된다. 심지어 바람이 빠진 채 누워있는 비닐봉지는 물신의 공공연한 죽음을 선언한 것처럼도 보인다. 그렇게 작가의 비닐봉지 괴물은 물신의 허구성과 죽음에 대한 알레고리처럼 읽힌다. 
겉보기에 그렇고, 여기에는 더 심각한 이면이 있다. 앞서 비닐봉지는 소비생태계의 최하층에 속하고 이미지정치학의 최 말단에 위치한다고 했다. 최하층? 최 말단? 누가 비닐봉지를 최하층으로, 그리고 최 말단으로 지목하는가. 자본주의는 경제제일주의 원칙과 효율성 극대화의 법칙으로 견인된다. 그 과정에서 경제성이 떨어지는 것들,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들이 변방으로 내몰리는데, 조르주 바타이유는 그렇게 자본주의의 가장자리로 추방된 것들을 금기(터부)라고 부르고 잉여라고 부른다. 자본주의에 의해 금지된 것들이고 자본주의가 낳은 잉여다. 잉여는 자본주의에 의해 금지된 탓에 태생적으로 반자본주의적이다. 억압된(거세된) 욕망을 내재화한 잉여는 호시탐탐 자본주의의 전복을 노리는,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위험천만한 존재다(자크 라캉이라면 호시탐탐 상징계의 전복을 노리는 실재계, 상징계의 틈새로 출몰하는 실재계라고 했을 것이다). 
자본주의는 그 잉여존재로서 특히 죽음을 지목하고 예술을 지목한다. 죽음은 경제성 제로인 상태고, 예술 역시 효율성이 떨어지기는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공교롭게도 작가의 비닐봉지 괴물은 죽음을 상기시키고, 예술을 도구화한 것이다). 그렇게 잉여로서의 예술이 자기를 실현하는 형식논리가 무정형이다. 알다시피 정형은 자본주의의 상품화 기획이 요구하는 미학적 조건을 충족시킨다. 무정형은 그렇지가 않다. 정해진 형식이 따로 없는 무정형은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다(질 들뢰즈라면 종잡을 수 없음을 전략으로 취한, 아예 종잡을 수 없음을 정체성으로 하는 정신분열증적 분석 혹은 리좀 혹은 모든 결정적인 지점을 가로지르는 탈주 혹은 탈영토화라고 했을 것이다). 괴물이 꼭 그렇다. 괴물엔 정해진 형식이 없다. 괴물 자체가 무정형이다. 
앞서 작가의 작업은 다만 00처럼 보일 뿐 00라고 특정할 수는 없는 미지의 생명체처럼 보인다고 했다. 괴물은 말하자면 미지의 존재, 임의적인 존재, 이행하는 존재, 비결정적이고 가변적인 존재다. 괴물은 말하자면 자본주의가 은폐하고 싶은, 자본주의의 말 못할 속사정을 내재화한, 자본주의에 의해 지목된, 때론 자본주의 자신도 모르는(자본주의의 사각지대? 내파? 자본주의의 중심?) 무정형의 잉여다. 위압적인 척하는, 때론 살짝 귀여운 척하는 작가의 비닐봉지 괴물은 바로 이런 자본주의 물신의 허구성과 죽음을 증언하고 폭로하는 무정형의 잉여다. 소비생태계의 최 말단으로 지목된 것들이 내재화한 반란이고 위반이다. 자본주의 생태계의 안정체제(다만 겉보기에 그렇게 보일 뿐인)를 위반하는 불안이고 불안정성이며 불확정성이고 불확실성이다. 자본주의 소비생태계를 현실로서 살아가는 현대인에 내재화된, 현대인이 앓는 징후고 증상이며 병리적 현상이다. 
울긋불긋하고 번쩍번쩍하는, 부풀어 오르면서 허물거리는, 살아있는 척하는, 움직이는 척하는 비닐봉지 괴물은 이처럼 불안하다(아니면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혹은 원초적인 생명력을 예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디오니소스적인 방종과 무분별한 욕망의 자기실현, 카니발(미하일 바흐친은 카니발을 합법적 위반을 계기로 민중의 건강한 생명력이 발현되는 장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주이상스(죽음과 결합한 에로스, 죽음처럼 달콤한 에로스)를 실현한 것일 수 있겠다. 그리고 주술적이다. 무속적이다. 작가의 비닐봉지 괴물은 보기에 따라서 당나무(신목)에 걸려있는, 바람에 치렁치렁한 조각 천을 연상시킨다. 다시, 미하일 바흐친을 인용하자면 작가의 비닐봉지 괴물은 어쩌면 인간 내면의 무의식을 형상화한, 불안과 불안정성과 불확실성과 불확정성의 알 수 없는 총체(사실은 생명력의 총체)를 형상화한 그로테스크리얼리즘의 발현이고 실천이며 표상형식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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