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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덕식/ 청춘예찬, 우리도 그들처럼

고충환

원덕식/ 청춘예찬, 우리도 그들처럼 


작가는 시골에 산다. 옆으로 긴 단층짜리 폐교에 부부가 살면서 그림도 그린다. 운동장이 있지만 자연 차지가 돼 길가에선 잘 보이지도 않는다. 자연 속에 숨은 것도 같고 자연이 보호해주는 것도 같다. 
그렇게 은둔자를 위한 움집 같은 폐교에는 작업실과 함께 빈 교실 몇 개가 딸려 있는데, 이따금씩 그 빈 교실로 사람들이 드나든다. 두런두런 소리도 들린다. 할머니들이다. 동네 할머니들이 모여 뒤늦은 한글도 배우고 그림도 그린다. 작가는 말하자면 자기작업과 함께, 동네 할머니들의 취미생활 함양과 자기개발을 위한 커뮤니티아트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연령제한을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시골에는 할매 할배밖에 살지 않는다. 원래 성별구분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할배들은 이런 일을 어쭙잖아 한다. 소꿉놀이하는 것 같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수업은 할머니들 차지가 되었다. 대개는 평생을 흙과 더불어 살았고, 그 중에는 한 번도 하이힐을 신어 본 적이 없는 할머니도 있다. 여기서 하이힐은 욕망의 표상이다. 그러므로 하이힐을 신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은 거세된 욕망을 뜻한다. 
작가의 <내 나이가 어때서?> 시리즈 그림은 이런 환경에서 비롯된다. 할머니들이라고해서 꿈과 욕망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환경이 꿈과 욕망을 억압하고 감내하는 삶을 살도록 길들여진 삶을 살았을 것이다. 인간은 환경적 동물이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했다(시몬 드 보바르). 할배들이 소꿉놀이하는 것 같다고 어쭙잖아 하는 것도, 할매들이 욕망을 억압하고 감내하는 삶을 사는 것도 가부장적 환경에 연유한 것이다. 적어도 상식적으로 그렇게 주어진 환경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므로 그 환경을 거부하는 것은 도발이고 혁명이다. 그리고 작가는 혁명을 감행한다. 할머니들의 거세된 욕망을 되돌려주는 것이다. 뭘 잃어버렸는지, 뭘 잊고 살았는지 일깨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결국 여성 예술가로서의 자기를 일깨우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이처럼 무지를 일깨운다는 점에서 계몽주의, 주어진 환경을 문제시한다는 점에서 현실주의와 실천주의 미학이 인문학적 배경을 이룬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현실성을 획득하고 보편성을 얻는다. 

작가는 단색으로 칠한 플랫 한 평면 위에 클로즈업한 인물(대개는 얼굴)을 중첩시킨다. 여기서 플랫 한 평면도 강조화법이고, 클로즈업도 강조화법이다. 군더더기가 없는 평면은 주제를 더 잘 부각한다. 그런가하면 이미지정치학에서 줌인은 주제를, 그리고 줌아웃은 분위기(그리고 때로 관계)를 강조한다. 그렇게 강조에 강조가 더해진 작가의 그림은 분위기보다는 주제가 강한 편이다. 여기에 색채를 대비시켜 주제의식을 재차 강조하는데, 인물에 해당하는 부분을 흑백모노톤으로 처리해 마치 과거와 같은 느낌을 주고, 박제된 화석 같은 느낌을 주고, 일말의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그리고 여기에 이상과 욕망을 상징하는 부분을 컬러로 대비시켜 생동감을 주고, 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색채감정을 매개로 비현실적인 느낌과 현실적인 느낌이 대비되는데, 사실 그 관계는 역전된 것이다. 무채색으로 표현된 얼굴이 억압된 욕망과 거세된 현실에 해당한다면, 컬러로 표현된 부분은 욕망이 자기를 실현한 현실, 그러므로 실제로는 부재하는(그리고 어쩌면 불가능한) 현실 곧 비현실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어쩜 현실인식과 현실부정이 대비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역전된 현실표현 역시 현실에 대한 부정의식을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리고 그렇게 컬러로 표현된 그림 속 꿈과 이상이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그만큼 더 억압적 현실도 강조된다. 
주지하다시피 그림 속 인물들은 예외 없이 할머니들인데, 할머니들은 거의 예외 없이 라이방을 낀 채 한껏 멋을 내고 있는 것이 영락없는 폼생폼사 그대로다. 여기서 라이방은 잃어버린 청춘을 상징하는 만큼 그 표면에는 그렇게 잃어버린 청춘의 편린들이 반영된다. 그 자체 억압된 욕망의 기표들로 봐도 되겠다. 이를테면 만개한 꽃 영상이 꽃 시절을 그리워하고(나에게도 저런 꽃 시절이 있었지), 화려한 도시의 야경이 상실된 꿈을 곱씹게 만든다(그 이면에 서울에 사는 아들걱정이, 아니면 소외감이, 아니면 상대적 박탈감이 그림자처럼 어른거린다). 어떤 할머니는 꽤나 그럴 듯한 포스로 당구를 치는데, 반들거리는 당구공 표면에 외경이 반영되고, 할머니들의 망실된 꿈의 편린들이 반영된다. 마치 꿈처럼 아롱거리는 표면질감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가 하면, 어떤 당구공은 마치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기라도 하듯 가볍게 부유하는 비눗방울처럼도 보인다. 공 표면이 반영하는 영상 중에는 수조 속 상어도 보인다. 아마도 동네 사람 누구 할 것 없이 버스를 대절해 놀러 갔던, 그리고 그렇게 모처럼의 자유를 만끽했던 아쿠아리움의 추억을 그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할머니는 입술에 빨간 립스틱을 바르느라 여념이 없고(립스틱 짙게 바르고), 꽃 관을 쓴 또 다른 할머니의 백발 위로는 나비들이 나풀거린다. 아마도 상실된 청춘으로부터 되불러온 욕망의 화신들일 것이다. 그런가하면 라이방을 끼고 중절모를 멋들어지게 눌러쓴 할머니가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 춤이라도 출 기세다(우리도 그들처럼?). 화려한 꽃 그림으로 장식된 기타를 치는 할머니도 있고, 꽃다발을 내미는 할머니의 수줍은 손도 보인다. 아마도 호시절 연애감정을 되살리고 싶었을 것이다. 인상적인 것이 뒤늦게 한글을 배우는 할머니다. 시집에 인쇄된 한글을 더듬는데, 쭈글쭈글한 손가락이 봄을 가리키고 있다. 할머니의 손가락 끝이 향하고 있는 것은 그저 봄이란 활자만은 아닐 것이다. 봄으로 대변되는 호시절과 꽃 시절을 그리워하는 상실감이기도 할 것이다(상실된 것만이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그런가하면 연필을 꼭 쥔 손으로 꽃을 그리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도 보인다. 

이 일련의 그림들에서 대개는 주름진 신체와 꽃이 대비되는데, 현실과 이상이 상충하는, 현실인식과 현실부정이 겹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이중서사를 예시해준다. 문화사적으로 꽃의 상징성은 이중적인데, 청춘을 상징하고 죽음을 상징한다. 프로이트라면 삶의 충동(에로스)과 죽음충동(타나토스)이 한 몸을 이룬 자웅동체라고 했을 것이다. 아니면 야누스의 두 얼굴(삶의 양면성)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겉보기에 꽃은 화려하지만, 그 이면에는 이처럼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래서 꽃은 화려한 만큼이나 그로테스크하기도 하다. 바니타스(덧없는 삶)고, 화무십일홍(십일 내내 빨간 꽃은 없다)이다. 
할머니의 망실된 꿈을 주제화한 이 일련의 그림들은 내 나이가 어때서, 립스틱 짙게 바르고, 우리도 그들처럼, 잃어버린 30년, 청춘을 돌려다오, 와 같은, 얼핏 제목만 들어도 그 의미가 즉각적으로 와 닿는 대중가요를 상기시킨다. 그런 점에서 작가의 작업은 팝적이다. 주지하다시피 팝적이라는 말은 대중적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억압된 욕망과 이상, 결핍적인 현실과 이상을 대비시키고, 종래에는 삶과 죽음을 대비시키는 거대담론을 주제화한 것이란 점에서 존재론적이다. 이처럼 대중적이고 존재론적인 주제의식을 매개로 작가는 전통적인 가부장적 사회와 여성상을 코멘트하고, 영원한 청춘을 요구하는 자본주의의 욕망을 코멘트 한다. 자본주의는 인격을 사물화하고 상품화하는데, 청춘이 상품적 가치가 높은 데 반해, 죽음에서 상품적 가치는 제로가 된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죽음을 금기시한다고 조르주 바타이유는 진단한다. 바타이유는 예술 역시 상품적 가치가 없기는 매한가지여서, 자본주의에 의해 금기의 대상으로서 지목된다고 본다. 
그렇게 외관상 할머니들의 망실된 꿈을 되돌려주는 것처럼 보이는 작가의 기획은 사실은 어쩌면 자연스런 노화와 죽음과 친해지는 삶(작가가 말하는 느린 삶, 그리고 어쩌면 욕망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삶)의 자세를 권유하는, 그럼으로써 자본주의의 기획에 반하는 실천논리로 귀결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작에서 보자면 눈물이 그렁그렁한 노인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는(그가 본 것은 무엇일까?), 누운 자세로 신문이나 잡지 대신 무거운 돌을 책처럼 펼쳐 들고 있는(무거운 일요일), 허름한 아파트와 대비되는 청명한 하늘 위로 보따리와 가방들이 떠다니는(지상에 내려놓지 못한 시간들), 그리고 백발 할머니의 뒷모습을 보여주고 있는(세상이 아름다운 이유) 그림들에서와 같은, 레비나스의 타자들을 예시해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레비나스는 타자를 윤리적 연대를 호소해오는 얼굴들이라고 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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