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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승은/ 다육소녀, 순수와 상처, 그리고 위로의 알레고리

고충환

서승은/ 다육소녀, 순수와 상처, 그리고 위로의 알레고리 


다육식물을 보면, 꽃이 필 것 같지 않아 보여도 결국 꽃이 핀다(작가노트). 

작가 서승은은 직접 100여종의 다육식물을 키운다. 자연스레 다육식물은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주요 소재가 된다. 지척에서 다육식물의 생육과정을 지켜본 경험을 반영하고 있을 이 말에서 보듯 다육식물은 단순한 소재의 차원을 넘어 작가의 그림을 지지하는 주제가 된다. 이 말(그리고 주제)도 그렇지만 실제로도 식물원이나 화원이 아니라면, 평상시에 꽃이 핀 다육식물을 보기란 어렵다. 마치 소리 소문 없이 꽃이 지고, 부지불식간에 꽃이 피는 것 같다. 미처 인식할 새도 없이 꽃이 피고 지는 것 같다. 그래서 평상시에 보면, 다육식물은 꽃이 따로 없지 싶기도 하고, 작고 살이 오른 잎이 꽃이지 싶기도 하다. 그렇게 다육식물의 꽃을 보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삶도 어렵다. 그러나 결국 꽃은 핀다. 마찬가지로 어려운 삶을 보상받는 날은 오고야 만다. 여기에 조건이 있다. 꽃이 피는 극적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선 노심초사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보상받는 삶을 위해선 어려운 삶의 순간을 참고 견디는 과정이 전제되어져야 한다. 어려운 삶의 순간이 끝날 것 같지 않아 보여도 마침내 끝나는 날은 오는 법이다. 어두운 터널이 끝이 없어 보여도 마침내 그 끝은 있는 법이다. 다육식물을 소재로 한 작가의 그림은 바로 이처럼 평범한 주제며 메시지를 전달한다. 모든 지극한 진리는 알고 보면 가장 평범한 것들이다. 

그렇다면 어떤 연유로 다육식물이 작가의 소재며 주제가 되었을까. 다육식물은 작가의 그림에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다육식물은 선인장이다. 선인장은 사막과 같은 척박한 환경에서 자란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잎은 수분을 저장하기 위한 것이고, 뾰족한 가시는 최대한 표면적을 줄여 수분의 증발을 막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물론 호시탐탐 저장된 수분을 노리는 적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적의 조건을 스스로 체화한 것이다. 작가는 그 꼴이 꼭 적들의 사회에 둘러싸인 사람들의 삶을 닮았다고 생각했고, 자기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육식물소녀를 그리기 시작했고, 줄여서 다육소녀를 그리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는 작가 자신의 자화상이면서, 동시에 서로 상처를 입고 입히는 첨예화된 경쟁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초상이기도 한 것이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비록 작가 개인의 경험을 그린 것이지만, 다만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삶의 환경이란 것이 어슷비슷한 탓에 보편적인 경험으로 확대 재생산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었다. 개별성을 통해서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 것이었다(예술은 개별적인 경험을 보편화하는 것이다). 그렇게 다육소녀는 작가의 분신이 되었고, 아바타가 되었다. 그리고 현대인의 삶의 정체성을 대리하는 캐릭터가 되었다. 
 
특이한 것은 다육식물과 소녀의 이미지가 하나로 합체된 점이다. 여기서 다육식물은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하고, 소녀의 이미지는 순수를 상징하고, 순수했던 유년을 상징하고, 지금은 상실된 유년을 상징한다. 모든 유년은 순수하고, 어른이 된 이후 상실된 유년은 그리움의 대상으로 전이된다. 그러므로 상실된 유년을 그리워하는 것은 곧 상실된 순수를 그리워하는 것이 되고, 그리고 어쩌면 상실된 존재론적 원형을 그리워하는 것이 된다. 순수는 상처 받기 쉽다. 상처에 민감하다. 소녀가 순수를 상징하는 것은 바로 그런 연유이다. 그런 소녀를 다육식물이 지켜준다. 그러므로 다육식물은 순수를 지키고 보호하는 수호신이며, 소녀의 수호신이다. 그렇게 다육식물소녀 혹은 다육소녀는 이중적이다. 유약하면서 강인한, 부드러우면서 단호한, 그리고 어쩌면 내면적이면서 동시에 외향적인 야누스의 두 얼굴처럼, 이율배반적인 존재가 그런 것처럼 양면적이다. 작가는 다육소녀를 모티브로 하여 바로 그런 존재의 이중성이며 양면성을, 그리고 어쩌면 양가성(다육식물의 가시는 자기를 보호하면서, 동시에 세상으로부터 자기를 고립시킨다)을 그린다. 

소녀와 다육식물이 등장하는, 다육소녀가 등장하는 작가의 그림은 문학적이다. 서사적이다. 실제로 작가는 다육소녀를 소재로 한 그림 에세이집 출간을 앞두고 있기도 하다. 작가의 그림은 말하자면 다육소녀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그 이야기는 모든 이야기의 원형이랄 수 있는 성장서사의 전형적인 포맷을 따르고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옛날에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출생의 비밀을 모른다(다른 예시도 가능하지만, 대개는). 성장한 이후 그는 그 수수께끼(출생의 비밀)를 풀기 위해 길을 떠난다. 길에서 그는 조력자도 만나고 장애물도 만난다. 그리고 마침내 조력자의 도움으로 장애물을 극복한 그는 길 끝에서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다. 자신에게 주어진 수수께끼를 푼 것이다. 이 원형적 이야기는 뭘 말해주는가. 모든 사람에겐 평생 동안 풀어야 할 숙제(수수께끼)가 주어진다. 그리고 그 숙제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것(출생의 비밀을 푸는 것)이다. 삶 자체가, 삶 전체가 진정한 자기(불교식으론 진아)를 찾는 과정을 위해 바쳐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삶이란 진정한 자기를 찾는 과정이 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야기들은 바로 이런 원형적 이야기를 각색하고 변주한 것이다. 
작가가 자신의 그림을 통해서 전개하고 있는 이야기 역시 이런 원형적 이야기와 똑같을 수는 없지만, 이야기에 등장하는 캐릭터와 캐릭터가 맞닥트리는 사건 그리고 상황설정과 같은 세세한 부분에서 차이가 있을 뿐 크게는 그 기본 구조를 따르고 있다. 이를테면 다육소녀는 순수를 상징하고, 다육식물이 그 순수를 지켜준다. 그 자신 이미 순수를 상징하는 다육소녀는 또 다른 순수(어쩌면 순수 자체 혹은 순수의 원형, 그리고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진정한 자기, 그리고 그림에서는 황금알)를 찾아 길을 나선다. 아니면 호시탐탐 순수를 노리는 세상으로부터 순수를 지키기 위한 방책을 찾아 길을 나선다. 여기서 순수는 빛으로, 그리고 순수를 노리는 세상은 어둠으로 설정된다. 그리고 소녀가 손에 들고 있는 초롱이 어둠을 밝혀 길을 안내해준다. 여기에 초롱과 함께 앞서가는 파랑새 역시 길잡이가 되어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준다. 주지하다시피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지혜의 여신을 상징하며, 세상이 모두 잠든 밤에도 저 홀로 깨어있는 정신을, 이성을 상징한다. 
그렇게 다육소녀는 조력자의 도움으로 순수를 상징하는 황금알을 찾을 수 있었고, 세상으로부터 지켜낼 수가 있었다. 긴 여정 끝에 마침내 유토피아에 도달한 것이다(그림에 등장하는 말은 유토피아를 상징한다). 여기서 순수를 상징하는 황금알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들여 찾아내고 지켜내야 할 어떤 가치 같은 것이다. 그건 결국 뭘 의미하는가. 마침내 당도한 유토피아에서 그는 뭘 보는가. 바로 진정한 자기 곧 진아를 본다. 자신이 다름 아닌 순수였음을, 그렇게나 찾아 헤매던 순수였음을 깨닫는 것이며, 자신 속에 이미 있었던 순수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렇게 다육소녀를 내세워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호시탐탐 순수(진정한 자기)를 노리는 세상으로부터 순수를 지키려는 개인의 힘겨운 싸움(어쩜 존재론적 싸움)을 예시해준다. 그림이 화사하고 몽롱하고 부드러워서 간과하기 쉽지만(작가는 한지에 수채가 스며드는 기법으로 이런 분위기가 강한 그림을 그릴 수가 있었다), 사실은 그 이면에서 이처럼 치열한 싸움(세상과의 싸움, 그리고 더 많은 경우에서 자신과의 싸움)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동화는 그 속에 잔혹동화를 숨기고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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