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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휘의 작업/ 탈재현과 탈형식, 회화를 확장시키는 도구들

고충환

김진휘의 작업/ 탈재현과 탈형식, 회화를 확장시키는 도구들 


땡땡이와 같은, 삼각형과 같은, 격자와 같은 기하학적인 패턴과 색채구성을 연상시키는 기하학적 형태들, 그리고 여기에 비정형의 얼룩들, 무분별한 자국들, 마치 중력의 관성을 증명이라도 하듯 화면 위로 마구 흘러내리다 맺힌 물감자국들이 하나의 층위로 어우러진 화면이 어떤 사물대상의 재현적인(감각적인) 형태를 떠올리기보다는 오롯이 화면 자체에 주목하게 만들고, 화면 자체에서 일어난 일에 주목하게 만든다. 재현적인 형태 대신 화면 자체에서 일어난 일에 주목하게 만든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재현 이후의 회화, 발생으로서의 회화, 사건으로서의 회화에 대해서 말한다. 매번 사건이고 매순간이 발생인 회화, 기왕의 의미로 환원되는 대신 새로운 의미를 생성시키는 회화에 대해서 말한다. 
김진휘의 그림이 그렇고 회화적 태도가 그렇다.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은 어떤 사건을 발생시키는가. 그의 그림은 어떤 회화적 서사를 담보하는가. 대략 서너 가지 정도의 의미 있는 회화적 서사를 담지하고 있는 것 같다. 먼저 작가의 그림에서도 두드러져 보이는 것이지만 비 혹은 탈재현적인 회화로 치자면 모더니즘패러다임을 들 수 있다. 회화는 무엇인가를 재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자체 순수한 형태며 구조며 구성이며 색채와 같은, 형식으로 총칭되는 것이다. 형식주의다. 이런 형식주의로부터 추상이 유래한다. 바로 모더니즘 패러다임으로부터 추상회화의 패러다임이 연유한 것이다. 
그리고 작가의 그림에서는 상반된 감각과 이미지들의 대비(작가의 말)가 두드러져 보인다. 기하학적 패턴과 비정형의 얼룩들이다. 그 중 기하학적 패턴에 대해서는 아마도 의식이 그린 것일 터이고, 이에 반해 비정형의 얼룩에 대해서는 자동기술법(초현실주의)이며 무의식이 그린 것일 터이다. 각각 기하학적 패턴과 비정형의 얼룩이, 그리고 의식과 무의식이 하나의 화면 속에서 상호부침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건 말하자면 회화를 그릴 때 작동하는 계기며 원동력이며 힘이랄 수 있다. 그리고 힘은 충동이다. 니체는 예술의 원동력과 관련해 아폴론적 충동과 디오니소스적 충동에 대해서 말한다. 여기서 아폴론적 충동은 질서를 추구하는 의식이며, 화면 내부에 그리고 자기 내면에 일종의 유사질서를 세우려는 충동을 말한다. 그리고 디오니소스적 충동은 알 수 없는 힘이며 역동적인 힘과 같은 생명력(프로이트의 리비도와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무분별한 분출과 자기실현으로 귀결된다. 거칠게는 혼돈과 질서, 구축과 해체, 회화적 관성과 회화적 관성의 부정으로 이해해도 되겠다. 
작가는 자신의 그림 그리기를 회화적 관습에 대한 질문이라고 했는데, 회화적 관성을 타개해나가는 과정이며, 이로써 또 다른 미지의 미답의 회화적 관성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보면 되겠다. 그리고 알다시피 미술사는 다름 아닌 바로 그 과정으로 점철된다. 그 과정 중 작가의 그림과 연관해 주목되는 지점이 바로크다. 주지하다시피 바로크는 부조화를 통한 조화를 매개로 회화의 확장 가능성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조화를 통한 조화를 추구한 르네상스의 회화적 태도와 비교되는 것으로서, 회화를 회화적 관습을 질문하는 것에, 회화적 관성을 문제시하는 것에, 우연성과 가능성의 지점 위에 재설정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렇게 바로크는 회화의 확장 가능성을 열었다. 여기서 부조화와 불안정성이야말로 바로크 회화의 원동력이랄 수 있고, 이로써 그림은 자기 안정적이고 자기 완결적이라기보다는 극적이고 드라마틱하다. 현실 그대로를 옮겨놓은 듯 생생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확장적이다. 그림이 툭 잘려나간 듯 임의적이다. 그게 현실과 연장된 느낌을 주고, 마치 내가 바로 그림 속 현장에 동참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비록 작가가 꾀하는 회화의 확장 가능성은 회화적 평면을 공간설치로 확장하는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이처럼 회화 속에서 회화의 확장 가능성을 실험한 바로크의 회화적 성과가 작동하고 있었다고도 볼 수가 있겠다. 
그렇게 작가는 회화적 평면을 공간설치로까지 확장시킨다. 확장은 우선 회화적 평면을 디스플레이하는 과정이며 방법에서 눈에 띠는데, 하나의 그림을 디스플레이하기 위해 무슨 입간판처럼 생긴 지지대를 사용해 그림을 전시한 것이다. 그리고 그 지지대가 있는 그림들이 두세 개 병렬되면서 하나의 큰 그림으로 재구성된다. 그 자체 자족적인 낱낱의 그림들이 개별성을 담보하면서, 동시에 부분과 전체가 유기적으로 예속되는, 그런 상호연속적인 그림을 만든다. 보기에 따라서 그 꼴이 꼭 전통적인 병풍 그림의 전형적인 포맷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부분과 전체와의 상황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회화적 평면과 그림이 놓일 벽면이나 공간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회화적 코드를 어떻게 지정할 것인지 여하에 따라서 매번 그림도 달라지고 그 의미 또한 달라지는, 그런 가변적인 설치방법을 따르고 있다. 
그렇게 회화를 위한 지지대를 보강하고 그 자체를 디스플레이하는 형식에서 나아가 본격적인 공간 확장을 꾀하는데, 처음엔 회화적 평면이 실제 공간 속으로 침투 확장되는 형식을 취한다. 실제 공간과 회화적 평면이 그 경계를 허물면서 상호 침투되는 식의 벽화 형식을 떠올려볼 수 있겠고, 회화적 평면이 공간과 그 운명을 같이 한다는 점에서 보면 장소특정적인 작업의 전형을 예시해주는 것으로도 볼 수가 있겠다. 그리고 이후 점차 회화적 평면이 해체되고, 그렇게 해체된 회화적 편린들(점 선 면 색채 그리고 각종 기하학적 형태와 같은 회화의 형식요소들이 그 자체 자족적인 존재성을 갖는 일종의 가공된 오브제처럼 제안되는, 그리고 더러는 다만 그 표면에 덧칠한 기성 오브제로 대체된)이 공간에 본격적으로 침투되면서 공간 환경을 눈에 띠게 바꿔놓는 형식으로 발전한다. 더 이상 회화적 평면에도 현실공간에도 속하지 않는 제3의 가능 공간(회화공간? 조형공간?)을 제안하는 식으로 진화한 것이다. 
어쩌면 회화적 매질을 도구로 공간에 침투시키고 매개시키는, 그리고 그렇게 공간 환경을 바꿔놓는 형식실험을 꾀하고 있다고도 볼 수가 있겠다. 공간 환경에 대한 형식실험? 건축이다. 건축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공간 환경에 대한 형식실험일 수 있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건축에 연동된다. 비록 회화적 평면에서 시작한 것이지만, 설치로의 확장을 꾀하는 과정에서 불현듯 건축에 도달한 것이다. 사실 작가의 그림은 진즉에 회화적 평면에서 구조적인 측면이 없지 않았고, 그 구조를 매개로 건축과의 공감각을 이미 상당정도 내재하고 있었다고도 볼 수가 있겠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회화적 평면에서 설치로, 공간으로, 그리고 종래에는 건축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비록 회화적 평면 바깥쪽으로 확장이 꾀해지고 있지만, 추후 회화적 평면 안쪽으로도 회화를 확장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처음에 회화적 평면을 확장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탈재현의 논리로부터 얻었다면, 이번에는 탈형식의 논리로부터 그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놓을 수가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기하학적 형태와 비정형의 형태를 대비시키는 식의 전형적인 회화적 문법을 타개하는 것과 같은. 회화적 평면과 실제 공간 환경과의 상호침투며 허물어진 경계가 회화적 평면 속에서 오롯이 그 실현을 얻는 것과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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