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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국진/ 판화와 회화 사이, 경계, 형식실험의 장

고충환

강국진/ 판화와 회화 사이, 경계, 형식실험의 장 


60년대 우리 판화는 거의 원시적 상태였습니다. 현 시점에서 많이 향상되었고 조형방법에서도 진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판화의 묘미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고무적이나, 작품경향에 있어서는 획일화되어 있습니다. 곧 이것은 작가의 표현이 다양화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확대시키면 우리 작가들에게 선비정신이 고양된 탓인지 자기분야만 지나칠 정도로 고수합니다. 조형영역의 확대를 위해서는 각 분야에 대해 작가들의 시도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판화에 많은 애정이 있었으면 합니다. 특정인을 위한 작품보다는 대중이 함께 더불어 나눌 수 있는 판화의 대중화도 시급하다 하겠습니다(강국진, 조헌영과의 인터뷰. 1990.4). 

그때를 회고하는 작가의 고백에서 시작해보자. 이 고백은 판화와 관련해 그때와 지금을 비교해볼 수 있어서 흥미롭고 의미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그때란 사실상 작가가 판화를 처음 시작한 60년대(작가는 대학도 들어가기 전에 이미 알바로 실크스크린을 했고, 디자인 스튜디오 운영을 통해 사실상 판화를 시작했다)를, 그리고 지금이란 인터뷰가 1990년에 있었던 걸로 미루어 보아 대략 80년대 이후로 짐작할 수 있다. 그때 한국현대판화는 불모지였다. 아무 것도 없는 원시적 상태였다. 그런 원시적 상태에서 판화를 시작했다. 그때 판화를 시작하게 해준 것은 인쇄소였고 철공소였다. 다만 시간차가 있을 뿐, 판화 탄생 초기에 보면 서양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가 않은데, 인쇄소와 철공소가 없었다면 판화도 없었다(서양의 경우 금 세공사들이 사실상 최초의 판화가들이었다는 점이 좀 다르긴 하지만. 이를테면 알브레히드 뒤러). 판화전문잉크는 당연히 없었고, 프레스며 특히 동판을 위한 소도구들도 전무하던 시절이었다. 해서, 잉크는 인쇄잉크를 썼고, 철공소를 전전해 소도구며 심지어 프레스도 직접 제작해 썼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완성된 판화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그래서 그때에 비해보면 지금 판화는 많이 향상되었고 진전이 있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런 열악한 환경은 양면성이 있다. 한편으로 완성도가 떨어질 수는 있어도, 다르게는 왕성한 형식실험의 장이 되어준다는 점이다. 자기가 모르는 것은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고 시종 그 프로세스며 방법을 찾고 궁리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모르는 것이 자기화 되는 과정을 거친다. 그래서 그 결과가 정형화된 판화와는 사뭇 혹은 많이 다르다. 특히 진정성이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속에 다른 기법이며 방법으로 가지 칠 수 있는 다중복합적인 가능성이 보인다. 실제로 현재 회화로 일가를 이룬 많은 작가들이 초기에 판화에서 왕성한 형식실험에 대한 욕구를 찾았고, 또한 상당한 성과를 내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작가도 그랬다. 그때 판화는 아방가르드였다. 
이런 열악한 환경이 만들어준 당시 판화를 보면 특히 실크스크린과 석판화의 경우 인쇄잉크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실크스크린의 경우 판화전문잉크를 사용했더라면 색 층의 겹쳐진 레이어가 보일 것을 불투명한 막으로 덮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석판화의 경우 미세한 얼룩을 전혀 잡아내지 못한다. 동판화 중 메조틴트를 보면 로커로 일일이 메를 만들어주어야 하는데, 동판에 자를 대고 니들로 선을 긋는 것으로 대신해 최종 판화에서 그 선이 만든 격자구조가 여실한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장르에서도 보면 흔히 형식실험에 대한 욕구가 강한 작가들이 도구며 안료를 직접 만들고 개발해 쓴다. 예컨대 한국화에서 싸릿대로 붓을 대신한다거나 먹을 직접 만들어 쓰는 것이 그렇다.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을 변명할 생각은 없지만, 앞서 말했듯 정형화된 판화와는 다른 형식실험의 결과로 볼 수도 있다. 형식실험에 관한한 작가에게 판화는 회화보다도 오히려 더 전위적인 장르였고, 애초에 회화와 다르지 않은 장르였고, 때에 따라선 회화를 견인하는 장르였다. 이를테면

판화의 시도로서 <빛의 흐름>은 <가락> 구조의 해체로 가는 과정의 단면입니다. 따라서 현재 진행 중인 <역사의 빛>은 <빛의 흐름>이 보여주고 있는 <가락>의 구조를 해체하는 절차와, 이 절차에서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려는 형태로 바꾸어 놓으려는 노력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해체과정에서 얻어진 게 바로 <역사의 빛>입니다(강국진, 조헌영과의 인터뷰. 1990.4). 

작가의 그림은 알다시피 <가락> 시리즈에서 <역사의 빛> 시리즈로 넘어간다. 그리고 그 중간에 막간처럼 <빛의 흐름> 시리즈가 있다. <빛의 흐름> 시리즈가 <가락>과 <역사의 빛> 시리즈를 매개시키고 있음을 알 수가 있고, 그 역할을 판화가 선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마치 회화작가들이 드로잉을 회화로 옮기듯. 회화와의 상관성을 놓고 보면, 작가에게 판화는 일종의 드로잉이었고, 회화와의 상보적인 관계에 있었다). <가락> 시리즈는 선조의 운율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고, <역사의 빛> 시리즈는 서사적 구조를 도입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 
선조가 불러일으키는 운율에 관한한 판화는 회화와 사뭇 혹은 많이 다른데, 경우에 따라서 판화는 회화보다도 오히려 더 분방하고 유기적인 것이 확인된다. 작가의 다른 판화 시리즈 역시 그런데, 일반적인 상식을 넘어서는 일이다. 대개 회화는 직접적인 경우여서 분방한 표현에 유리한 반면, 판화는 특정 프로세스에 의존하는 간접적 매체여서 상대적으로 정형화된 경우로 흐르기 쉽다는 생각 말이다. 그렇게 보기에 따라서 작가의 판화는, 특히 석판화(가장 회화적인, 회화의 직접성에 근사한 판종)는 회화보다 더 분방하고 유연하다고까지 느낀다(예컨대 피에르 알레친스키와 샘 프랜시스의 판화와 회화에 유사한). 그렇게 작가에게 판화는 사실상 드로잉이었다. 간접적인, 그리고 기계적인 프로세스를 거쳐야 하는 것임을 생각하면 놀라운 부분이 없지 않다. 그렇게 작가에게 판화는 오히려 형식실험 면에서 회화보다 더 분방하고 자유롭다. 

다시, 처음의 작가의 고백으로 되돌아가보자. 작가는 지금 작가들의 작품경향이 획일화되어있다고 했다. 주지하다시피 여기서 지금이란 80년대를 말한다. 그리고 알다시피 80년대는 단색파 화가들이 주류로서의 자기정체성을 굳힌 시기이기도 하다. 물론 당시 다른 한 축으로서 민중미술이 있지만, 작가의 작업과의 상관성으로 치자면 작가가 의미하는 지금이란 아무래도 민중미술보다는 단색파 회화경향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선비정신 운운하는 것도 그렇다. 알다시피 수행과 무위는 선비정신의 덕목으로 알려져 있고, 동시에 단색파 회화경향의 정신세계를 지지하는 축이기도 하다. 자기컬러를 가져야 된다는 것, 자기만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강박으로 흐를 땐 문제가 있고, 더욱이 그것이 미술시장에서의 전략으로 작용할 때는 더 문제가 있다. 여하튼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단색파 이후 한 가지 형식에 주력하는 회화 경향은 보편적인 경우로서 자리를 잡았고, 작가는 바로 그 경우를 문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경우는 어떻게 다른가.      

그의 새로운 매체에 대한 또 다른 실험은...다양한 판화작업을 시도하였다는 것이며...그는 판화라는 주변부 영역의 중요성을 한국화단에 새롭게 인식시킴으로 우리 미술문화의 다채로움을 제공한 장본인이기도 하다(김찬동. 강국진, 한국현대미술의 잠재태-주변부의 영역을 확장시킨 경계인. 2006). 

김찬동은 작가의 특성을 경계인에서 찾는다. 주류와 비주류, 중심과 주변부를 매개시켜주는 역할에서 찾는다. 그 역할에서 판화 역시 간과할 수 없는데, 주변부 영역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시킨 것이다(유감스럽게도 아직도 판화를 마이너장르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작가에게 주류란 한 가지 형식에 주력하는 경우를, 그리고 주변부란 특정 형식에 구애 받지 않는 경우를 의미했다. 한편으론 회화와 판화를 구분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고, 다르게는 판화의 형식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이를테면 석판화 위에 덧그리기도 하고, 판화 위에 우표와 인쇄물 같은 평면 오브제를 덧붙이기도 하고, 종이 대신 돗자리와 은박지에 프린트하기도 한다. 드로잉과 판화와 오브제콜라주를 혼용하기도 하고, 자필서명과 낙관을 병행하기도 한다. 얼핏 무분별하거나 무모하게까지 보이는 이 경우들로 유추해 보건데 작가는 판화를 제작했다기보다는 판법을 이용해 그림을 그리거나 만들었다고 봐도 되겠다. 판화의 원칙을 고집하는 입장에서 볼 때는 문제가 있겠지만, 사실상 혼합매체가 일반화된 현대미술의 경향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현대미술을 선도한 면이 없지 않다. 특히 현대미술에서 회화란 단순한 그림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기와 만들기가 혼용되고, 사진과 같은 미디어가 그림을 대신하기도 한다. 국내에서 보자면 이미 80년대 민중미술에서 매체미술의 이름으로 널리 받아들여졌던 경향이고, 공교롭게도 작가 역시 그 세대에 속한다. 
그렇게 현재 600점 이상의 판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 가운데에는 연도미상의 추정작품도 상당수 있고, 대략 10% 정도의 에디션이 있을 뿐 거의 에디션이 없는 판화들이다. 이건 뭘 말해주는가. 작가가 처음부터 판화보다는 판법에 관심이 있었다는 말이다. 판법을 이용해 그림을 그리고 만드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는 말이다. 혹자는 에디션이 있는 판화, 최소한 에디션이 가능한 판화만을 판화로서 인정하지만, 점차 미술계(그리고 판화계)는 판법을 이용한 그림, 판법을 이용한 조형을 광범위하게 수용하고 있는 추세여서 작가의 자유분방한 형식실험이 역시 시대를 앞서간 것임을 알 수 있다. 여담이지만 A.P판만을 집중적으로 수집하는 컬렉터도 있다고 한다. 실험정신을 엿볼 수 있고, 무엇보다도 과정을 엿볼 수 있어서일 것이다. 에디션과는 달리 오리지널 곧 일품작품이라는 희소적인 가치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작가의 예술혼을 더 생생하게 접할 수 있어서이기도 할 것이다.  

무엇을 표현하느냐는 문제보다 어떻게 표현하느냐는 방법의 문제에 나는 일찍부터 더 많은 관심을 쏟아왔다. 그래서 60년대 후반에는 해프닝도 했고, 70년대에 들어서서는 오브제적인 것에도 관심을 쏟았었다. 그러나 선을 통한 작업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림을 그리겠다고 나섰던 동기와도 직접 연관 있는 욕구로서 외면할 수 없는 절실함이었다. 75년경부터 나는 여러 가지 기법의 판화를 시도했다. 목판, 실크스크린, 메조틴트, 그런 방법들을 썼다. 판화는 손으로만 되지 않는다. 손으로 시작하여 기계로 완성에 이르는 것이다. 이 2단계 작업은 나의 구상을 객관화 간접화 시키는 기회이기도 했다. 객관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요즘 판화에 무한한 매력을 느낀다(강국진. 1978. 주간경향). 

마지막으로 작가의 또 다른 진술을 보자.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객관화시킬 것인가, 라는 문제의식에 이 진술의 방점이 찍힌다. 판화를 비롯해 작가가 평생 천착했던 문제의식으로 봐도 되겠고, 작가의 작가적 아이덴티티를 특정 하는 계기로 봐도 되겠다. 먼저,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는 방법론은 작가가 평생 천착했던 형식실험을 의미하고, 또한 형식실험은 아방가르드를 지지하는 중추적 개념이다. 주지하다시피 모더니즘은 클레멘테 그린버그 류의 환원주의와 아방가르드의 형식실험(그 극단적인 예가 좀 그렇지만, 무슨 블랙홀과도 같이 모든 형식실험을 빨아들이는 피카소에서 확인해볼 수 있는. 참고로 피카소는 현대미술은 훔쳐오는 것이라고 했다)으로 구분된다. 형식주의와 형식실험으로 봐도 되겠고, 환원과 확산(이일)의 경우로 봐도 되겠다. 그렇게 작가는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았으면서도 간단없는 형식실험으로 자기를 확장시키는, 그리고 그 과정에서 회화보다는 판화를 통해서 자기를 확장시켜온 전위적 작가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객관화시킨다는 것, 특히 판화를 매개로 객관화시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주지하다시피 회화는 직접적인 매체고, 판화는 간접적인 매체다. 회화는 직접 표현이 가능한 만큼 자기가 구상한 그대로의 물화된 형식을 확인할 수가 있다. 그러나 판화는 판화가 최종적으로 찍혀져 나오기까지는 알 수가 없다. 미증유의 매체다. 회화가 자기를 오롯이 표현해준다면, 판화는 반쯤만 그렇게 한다. 나머지 절반은 기계적인 프로세스의 몫으로 남겨진다. 나의 구상이 어떻게 결과 될지 모른다. 바로 그 모름 때문에 예술이 있다. 작가의 평생 작업이 그렇지만, 특히 판화는 바로 이처럼 나의 구상을 객관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그 모름을 더듬어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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