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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미, 얼룩과 흔적이 열어놓은 풍경

고충환

민주미, 얼룩과 흔적이 열어놓은 풍경


작가는 사라지는 것들, 순간적인 것들, 영속성이 없는 것들, 그래서 어쩌면 덧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 거시적인 것은 차치하고라도 미시적인 삶이 꼭 그렇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관계가 그렇고 감정이 그렇고 사는 것이 다 그렇다. 좋았던 일마저 희미한 기억으로나마 겨우 간직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기억마저 날아가 버리고나면 그 뿐. 작가는 그걸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심한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흔적이다. 모든 유형무형의 존재는 흔적을 남긴다. 그렇게 좋았던 기억의 흔적, 아픈 상처의 기억이 남긴 흔적, 그러므로 어쩌면 기억의 형해(화석화된 기억)를 조형한다. 
비눗방울불기를 통해서 기억의 흔적(아님 존재의 흔적)을 조형하는데, 호분을 탄 비눗방울을 화면에다 대고 부는 과정에서 축적된 흔적을 조성한다. 비눗방울만으론 흔적이 미미한 탓에 호분을 섞어 보다 뚜렷한 흔적을 얻기 위한 것이다. 화면에 닿은 비눗방울이 그대로 고착되기도 하고 더러는 터지기도 하면서 크고 작은 비정형의 얼룩 층을 만든다. 여기에 사인펜(수성 펜)을 이용해 비눗방울 형태를 그려 넣기도 하는데, 물이 닿으면서 자연스럽게 번지는 효과를 얻을 수가 있다. 그렇게 호분이 만든 흔적과 사인펜이 만든 흔적이 중첩된 유기적인 화면을 얻는다. 
그건 기본적으로 기억의 흔적이며 화석화된 기억을 조형한 것이지만, 보기에 따라서 이러저런 형태를 떠올리게 만든다. 화석 같은, 바위 표면에 말라붙은 돌이끼 같은, 말라버린 강바닥 같은, 부분적으로 박락되거나 색 바랜 회벽 같은, 어떤 알 수 없는 미지의 풍경 같은,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풍경 같은,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풍경 같은, 그리고 시간의 흔적 같은 잠재적인 풍경을 상상하게 만든다. 작가는 아마도 그 미지의 형태, 비결정의 형태, 비정형의 형태, 그리고 어쩌면 우연한 형태에 흥미를 느꼈을 것이다. 그 우연한 형태가 열어놓을 세상의 모든 풍경이 기대된다. 


안재은. 둥지, 불안정한 세상의 알레고리. 

작가는 전작에서 선인장을 그렸다. 뾰족한 가시가 두렵다고 느꼈다. 그래서 뼈를 드러낸 선인장을 그렸다. 선인장에 뼈가 있을 리 없지만, 여하튼. 뼈가 다 드러난 선인장이 어떻게 할까 싶었다. 그렇게 그려놓고 보니 겉보기와는 다르게 선인장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세상은 겉보기와는 다른 경우들이 많고, 그런 만큼 세상을 겉보기로만 판단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자기 나름으로 치유하고 극복하는 과정이며 방법으로 봐도 되겠다. 그렇게 작가는 마음속에 두려움을 간직하고 있고, 그 두려움은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런 만큼 작가의 그림은 이런 두려움, 어쩜 막연한 두려움을 마음속으로부터 불러내고 대면하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치유하고 화해하는, 그리고 종래에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과정과 관련이 깊다. 
그리고 작가는 근작에서 둥지를 그린다. 사람으로 치자면 집에 해당할 둥지를 통해 두려운 세상으로부터 보호받는 느낌을 받고 싶어서다. 그런데 정작 둥지는 불완전하다. 삐죽삐죽한 나뭇가지들을 얼기설기 엮어놓은 둥지가 도통 편안해 보이지가 않았고, 세상으로부터 자기를 온전히 보호해줄 것 같지도 않다. 여기에 자연의 서식지에서 밀려난 새들(원래 살던 곳에서 밀려난 원주민들)이 아파트 창틀과 베란다 사이의 좁은 틈에다 둥지를 짓는다. 심지어 공사장에서 물어온 못과 나무 부스러기로 둥지를 짓는 새들도 있다. 그렇게 새 둥지도 불안정하고 사람이 사는 집(그리고 세상)도 불안정하다. 여기서 작가는 기발한 상상을 한다.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현실이 가상이라고 생각하고, 세상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을 때 탈출하는 둥지(탈출하는 둥지?)를 상상한다. 속도 편하다 싶지만, 여하튼 그렇게 작가는 탈출하는 둥지를 그린다. 그렇게 작가에게 둥지는 여전히 불완전하고 불안정하고 불안하다. 
여기에 사뭇 혹은 많이 다른 둥지가 있다. 숲 언저리에 파란 타폴린 천막 천으로 뭔가를 싸놓은 것이다. 그 위에는 천막 천이 날아가지 않게 돌까지 얹어 놓았다. 공사장 현장에서 봤더라면 예사롭게 보아 넘길 일이지만, 숲처럼 외진 곳에서 마주하기엔 예사롭지 않은 풍경이다. 그 속엔 도대체 뭐가 들었을까. 뭐가 들어 있든 그 속에 있는 한 세상으로부터 안전하다고 느낄까. 그렇게 작가에게 타폴린 천막 천 둥지는 호기심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호기심과 두려움은 짝패다). 그렇게 작가는 양가적인 둥지(세상)를 그렸다.  
     

최규리, 현실과 이상 사이. 

나는 전기세 10000원도 안 나오는 원룸에 산다. 때로 내 젊음은 5030원조차 툴툴대며 내야하는 가벼운 내 주머니만큼이나 가볍고 산뜻하다(?). 5030원이라는 숫자의 금액이 어떻게 나왔는지 알 수는 없다.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궁색한 살림살이를 의미한다는 것쯤은 알겠다. 보편화하기는 그렇지만, 지금여기 이 시대를 살아가는 보통청년들의 현재를 대변해주는 증언으로 봐도 되겠다. 
여기서 작가는 이상향을 꿈꾸고 그린다. 달 토끼가 사는 세상에서 살고 싶고, 개 껌 하나면 족한 강아지와 더불어 살고 싶다(혹은 그 강아지처럼 살고 싶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처럼 동화가 살아있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나는 도구화된 이성이 지배하는 세상이 싫다). 때로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떠올려볼 때면(유년의 기억?) 빨려들듯 하지만 너무 먼 하늘을 느낀다. 그렇게 내가 느끼기에 현실과 이상 사이의 거리는 멀다. 여기서 작가는 전통적인 책거리 그림, 책가도 그림, 기명절지 그림을 차용한다. 알다시피 이 그림들은 사대부의 취미품목을 한자리에 전시하고 과시하기 위해 고안된 형식으로서, 칸이 질러진 선반이나 지금으로 치자면 책장의 구조를 하고 있다. 작가는 그 구조 속에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향의 품목들, 이를테면 달 토끼와 강아지, 그리고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들여다 놓았다. 이건 뭘 말해주는가. 작가가 이상향을 그리는 이유는 현실을 잊기 위해서고, 현실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고, 마음으로나마 위안을 받고 싶어서다(현실에 대한 보상심리?). 작가가 그린 이상향은 역설적인 표현으로 읽어야 한다.  
그렇게 작가는 지금까지 외면(사실은 현실성이 없는 이상향?)에만 집착했다고 느끼고, 내면을 잊고 살았다고 느낀다. 그래서 다시 현실로 돌아오기로 했다. 그렇게 마치 닭장 같은 우편함이 눈에 들어왔다(작가는 닭장 같은 우편함이라고 했다. 예전엔 전경버스를 닭장에다 비유하곤 했는데. 비유에도 다른 시대감정을 느낀다). 좁아터진 우편함 속에 마구 구겨 넣어진 우편물들이 꼭 자기를 닮았다고 느끼고 삶을 닮았다고 느낀다. 우편물에는 좋은 소식이 있고 나쁜 소식도 있다. 좋은 소식을 내 것으로 할 수도 있고 나쁜 소식을 내 것으로 할 수도 있다. 무슨 영화(이를테면 매트릭스)처럼 빨간 알약 파란 알약 운운할 일은 아니지만, 여하튼 작가가 어떤 소식을 자기 것으로 할 지 앞으로의 그림이 궁금해진다. 


허희영, 이름 모를 잡풀들. 

거리를 걷다보면 이름 모를 잡풀들이 피어있다. 작가는 그 잡풀들을 보면서 소소한 즐거움을 느낀다. 일상에 찌든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것들이다. 보이지도 않으니 마음이 동할 리가 없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다만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 일상에 찌든 사람들이다(혹 여기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그래서 잡풀을 보고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는 작가의 경험은 각별하고 살갑다. 보는 것도 여러 질인데, 여기서 보는 것은 그저 보는 것이 아니다. 이해타산 없이 보는 것이다. 사심 없이 보는 것이다. 칸트라면 무관심적인 보기 아니면 무목적적인 보기라고 했을 것이다. 보는 것은 인식론적 행위다. 보는 것이 인식에 선행하고, 인식이 보는 것에 영향을 미친다. 보는 것은 비록 시작에 불과하지만 사실은 전부일 수 있다. 그렇게 보는 것은 결정적이다. 
작가는 그 잡풀들을 그저 보기만 하는 것이 아깝다. 그래서 본 것들을 그림으로 옮겨 그리기 시작했다. 하늘거리는 민들레 홀씨들, 바람에 흩날리며 홀씨들이 그려내는 궤적들, 버들강아지와 들국화, 그 외 식물에 대한 일천한 지식으로 잘 알 수는 없는 들풀들, 그리고 여기에 들풀과 들풀 사이에 흐르는 바람과 공기의 질감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때론 미처 그려지지 않은 부분(이를테면 공간감과 내진감, 상호관계성과 시간성 같은)마저 암시와 느낌으로 되살려낸 그림이다. 사실적인 그림, 재현적인 그림, 묘사적인 그림에 대한 선입견을 재고하게 만드는 그림이다. 여성 고유의 섬세한 감각이 돋보이는 그림이다. 그림에 성별이 따로 없는 것이 맞지만, 그리고 섬세한 감각이 여성의 전유물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왠지 여성적인 감수성이 그려낸 그림 같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사대부들이 그린 화조도와도 신사임당이 그린 초충도와도 한 땀 한 땀 수놓아 만든 규방자수도와도 전혀 다른 분위기와 밀도감을 전해준다. 감수성과 감각과 감성이 서로 도와 완성도를 높이는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일상을 다시 보게 만들고, 일상 속에 이미 있었던 소소한 즐거움을 발견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삶을 의미 있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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