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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강정대구현대미술제/ 예술의 섬, 강정을 가다

고충환

2018 강정대구현대미술제/ 예술의 섬, 강정을 가다 


강정대구현대미술제가 올해로 7회째를 맞고 있다. 지난 2012년부터 매년 개최해온 본 행사는 대구경북지역을 대표하는 미술축제로 자리를 잡았고, 이제 지역을 넘어 세계로의 도약을 예비하고 있다. 장소특정성으로 치자면 낙동강을 끼고 있는 점이 눈에 띤다. 문명의 젖줄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문명이 거의 예외 없이 강에서 발원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강이 풍요의 상징이라는 사실과도 무관하지가 않다. 강변에 살림을 꾸린 본 행사가 예술을 매개로 신문명을 연다는 조짐으로 봐도 되겠다. 인류는 그동안 종교적 인간, 이념적 인간, 정치적 인간, 그리고 경제적 인간을 경유해왔고, 이후 놀이와 문화 그리고 특히 예술을 매개로 종전과는 사뭇 다른 신인류의 출현을 예비하고 있는 경우로 봐도 되겠다. 예술이 삶 자체인, 예술이 삶의 질을 결정하는 차원 혹은 경지를 열어놓는 것으로 보면 되겠다. <예술의 섬, 강정>이란, 이번 행사를 위한 주제설정과도 무관하지가 않다. 
이처럼 본 행사와 관련해 강이 갖는 의미를 강조하는 것에는 보다 실질적인 이유도 있다. 타이틀에서도 알 수 있듯 강정대구현대미술제는 대구현대미술제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고, 당시 그 주요 배경이 지금의 장소(낙동강 강정보 디아크 광장 일원)였다는 사실이다. 대구현대미술제는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역보다도 가장 먼저 열렸고, 이후 각 지역별 현대미술제가 열리는 계기역할을 했다. 1974년부터 1979년까지 총 5회 차에 걸쳐 전시가 이루어졌고, 그 중 1977년부터 1979년까지 3년간은 현재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는 강정의 낙동강 변에서 전국적인 규모의 실험미술 이벤트가 열린 것이다. 대략 200명가량의 작가들이 전시에 참여한 것을 놓고 보면, 사실상 당시 국내의 전위 예술가들을 망라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대구현대미술 나아가 국내현대미술을 견인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도 볼 수가 있겠다. 본 행사는 바로 이처럼 뜨거웠던 역사적 현장에 둥지를 틀었다. 그런 만큼 당시의 불씨를 살려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며, 그때의 열기를 살려 지금 다시 신아방가르드의 전초기지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예술의 섬, 강정>이란 주제를 보면, 전시가 열리는 강정 현장을 예술의 섬으로 정의 강조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여기서 섬은 이중적이다. 한편으로 섬은 고립을 의미하면서, 다르게는 자생성과 고유성을 상징한다. 전시현장을 자생적인 예술, 고유한 예술이 움트는 현대미술의 산실로 보아달라는 주문을 담았다. 그런 만큼 섬은 지정학적 장소로서보다는 의미론적인 매개체에 가깝다. 보들레르는 평생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꿈꾸는 삶을 살았고, 그 꿈으로 인해 상징주의라는 이름을 얻었다. 여기가 현실이고, 꿈이 섬이다. 존재론적인 섬이라고 할까. 그렇게 사람들은 저마다 꿈꾸는 섬 하나 정도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 다른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섬은 유토피아가 될 것이고, 현실로부터의 일탈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섬은 비현실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일상으로부터의 휴식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섬은 기꺼이 쉼의 계기가 되어줄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저마다 꿈꾸기 위해 육지로부터 섬으로 건너간다. 그 섬에서 사람들은 현실과는 다른 세상을 겪게 될 것이다. 다른 세상 곧 유토피아를, 비현실을, 휴식을, 치유와 주술의 계기를 매개시켜주는 예술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정한 자기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마술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번 전시에는 17명의 조각 설치작가들이 참여를 하는데, 참여 작가 모두 이미 다양한 경로로 유사전시경력을 축적해온 터라 신뢰가 가는 편이다. 이번 전시에는 어떤 작품을 어떻게 선보일지 기대를 해도 좋다. 그 대략을 보면 공공미술 혹은 환경조형물을 통한 공공성의 실현, 더불어 사는(이를테면 인간과 자연) 생태환경에 대한 관심, 치유와 휴식의 계기로서의 예술, 시대의 아이콘 혹은 전형으로서의 캐릭터, 그리고 조각 고유의 물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크게는 자연환경에 대한 관심, 캐릭터를 매개로 한 시대환경 혹은 존재론적 조건에 대한 관심, 그리고 조각의 본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 주제의식이며 형식적인 특징들은 서로 구별되면서도 그 이면에서 하나로 통한다. 
먼저 자연을 보자.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대인은 자연을 상실했다. 다만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지극한 상실감이야말로 그가 다름 아닌 현대인임을 증명해주는 징후 혹은 증상이 되었다. 그렇게 현대인은 이러저런 상실감을 앓는다. 그리고 그렇게 현대인이 상실한 것 중에 자연이 있다. 여기서 자연은 그저 물리적 자연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자연의 성질, 이를테면 야성과 야생, 본능과 본성, 영감과 직관, 마술과 주술, 운명과 비극(밀란 쿤데라는 현대인이 비극적인 것은 그가 다름 아닌 비극을 상실한 것이라고 본다. 비극을 상실한 것이 비극이다?)과 같은 현대인이 문명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퇴화된 성질을 의미한다. 경제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자본주의에 의해 금기시된 것들, 비합리적이라는 이유로 도구화된 이성에 의해 미신으로 지목된 것들을 의미한다. 
그렇게 작가들은 금기와 미신을 조형 위로 불러내는데, 이를테면 마치 선사시대 동굴벽화에서 곧장 걸어 나온 것 같은 코뿔소를 재현했다(박찬용). 주지하다시피 선사시대 동굴벽화를 그린 사람들은 인류 최초의 예술가들이었다. 주술사들이었고 무당들이었다. 성과 속, 삶과 죽음, 인간과 자연을 매개하는 중재자들이었다.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들(경계인)이고, 문명이 그어놓은 금을 넘나드는 사람들(위반자)이었다. 때로 동물성과 식물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들이었다(안치홍). 그렇게 그는 죽은 나뭇가지에서 동물 형상을 보고, 경계를 넘어 무한순환하고 재생하는 자연의 생명력을 본다. 여기에 작가 김현준은 웅크리고 있는 사람 등에서 나무가 자라고 꽃이 피는 형상을 조형했는데, 인간과 자연과의 상생관계를 형상화한 것이면서, 자연이 자라도록 자기 몸을 자양분으로 내어주는 생명과 재생의 의미를 담았다. 그 자체 내면적이고 내향적인 존재론적 인간을 형상화한 것이면서, 최초의 예술가로서의 무당의 원형을 떠올리게 만든다. 
자연은 생명이다. 손몽주 작가는 나무를 둘러싼 움집 형태를 만들었는데, 고무호스에 물이 흐르게 해 생명의 공급과 순환하는 생명을 표현했다. 그리고 자연이 내재한 생명은 치유와 제의의 형태로 변주된다. 강효명 작가가 조형한 새장 속엔 새가 없다. 빈 새장이 자유가 자연의 다른 이름임을 암시한다. 새장 안에는 새 대신 등불이 있어서 밤에 불을 밝히는 초롱같다. 자연과 자유에 대한 논평과 함께, 치유와 제의를 수행하는 자연의 본성을 곱씹게 만든다. 그리고 자연은 무한하다(하늘이 저렇게 파란데, 라고 노래한 일본의 하이쿠는 무한한 자연과 유한한 삶을 대비시킨다). 서현규과 배문경 작가는 격자구조의 패널을 탑처럼 쌓아 만든 구조물을 매개로 무한한 자연으로부터 수신된 전파를 기다린다. 조형물 표면에 영상을 프로젝션 했는데, 아마도 무한한 자연, 우주, 외계로부터 수신된 전파일 것이다. 
한편으로 자연에는 감각적인 성질이 있고 비감각적인 성질이 있다. 가시적인 존재방식을 가진 것들이 있고 비가시적인 존재방식을 가진 것들이 있다. 여기에 비감각적인 자연의 성질을 그리고 비가시적인 자연의 존재방식을 조형하는 작가들이 있다. 바로 바람(최문수)인데, 알다시피 바람 스스로는 자신의 존재를 감각적이고 가시적인 표면 위로 밀어 올릴 수가 없다. 다른 사물대상에 의탁하는 형태와 경우로서만이 자신의 존재를 부각하는데, 자잘한 천 조각들이 모여 이룬 거대 형상의 조형물이 무속적인 깃발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소리(김성민)를 들 수가 있다. 파이프를 밴딩해 조립하고 결합하는 방식으로 거대한 피아노 형상을 만들었는데, 아마도 자연의 소리를 형상화한 것일 터이다. 그리고 비감각적이고 비가시적인 자연의 성질 혹은 존재방식으로 치자면 빛(이성옥)을 간과할 수 없다. 빛 역시 바람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물형상에 의탁해서만이 자신의 존재를 부각할 수가 있다. 일종의 모빌 형상을 매개로 바람에 움직이는 곤충들이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은 상황을 연출했다. 스테인리스스틸 소재의 조형에 빛이 부닥치면서 산란하고, 이로부터 비물질적이고 비가시적인 빛의 성질을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층위로 끌어올리려는 형상화의 의지가 읽힌다. 이외에도 작가들은 각각 사슴과 같은 우제류(김우진), 하늘거리는 꽃잎(유미연), 그리고 선인장(이태호)을 매개로 저마다 자연과의 교감을 표현한다. 
그리고 캐릭터가 있다. 자연이 존재론적 대상이라면(어쩌면 인간보다 큰, 그리고 인간을 초월한), 캐릭터는 지극히 인간적인 대상이고 문명사적 대상이다. 흔히 문학과 연극 그리고 영화에서 작품을 창작할 때 캐릭터 중심인지 아니면 플롯 중심인지에 따라서 작품의 성격이 결정된다. 여기서 캐릭터 중심은 작가주의 성향이 강한 작품으로 나타나고, 플롯 중심은 작품 전체를 이끌어가는 구조와 스토리텔링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캐릭터가 중심인 작품에서는 상상력에 바탕을 둔 서사가, 그리고 플롯이 중심인 작품에서는 현실에 바탕을 둔 서사가 주요 동력이 된다. 따라서 캐릭터는 플롯에 비해 상대적으로 상징적이고 암시적인 성향이 강하다. 말하자면, 캐릭터는 동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을 반영하고 재현하고 대변한다. 당대의 문제의식과 시대정신을 압축하고 있는 것인 만큼 이를 통해 감각적 현실이 간과하고 있는 행간 읽기를, 억압적인 현실이 은폐하고 있는 이면 읽기를 요구한다. 하나의 캐릭터에는 당대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이고 사회학적인 여러 이질적인 맥락들이 교차한다. 그렇게 캐릭터는 당대적인 물화된 인격체(물신)를 독해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김경민은 샐러리맨과 워킹우먼을 조형했다. 이 시대의 표준적인 남자와 여자들이다. 보통사람들이고 선남선녀들이다. 그리고 김원근은 상남자를 조형했다. 여자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꽃을 내민 손이 수줍은 거친 남자를 통해 동시대 남자들의 겉과 속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리고 성동훈은 돈키호테를 제시한다.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돈키호테는 비이성과 비합리를 상징한다. 이성이 도구화되고 합리가 명분으로 전락한 시대를 돌파하는 미치광이 혹은 미친 척하는 영웅(아니면 반영웅?)을 표상한다. 그리고 오동훈의 버블맨은 현대인의 이중적이고 양면적인 초상이다. 유년시절 비눗방울 놀이처럼 꿈꾸는 인간을 상징하고, 한갓 거품처럼 허망한 것을 좇는 덧없는 인간을 표상한다. 
이 모든 조형을 조각이 지지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특히 조각의 본성이 강조되는데, 대개는 설치미술과 오브제미술 그리고 개념미술 위주의 지금까지의 경향성과는 구별되는 모양새다. 이참에 조각적인 조형물이라는 기본에 충실하려는 예술 감독(방준호)의 의지가 반영되었을 것이다. 조각의 본질은 뭔가. 양감과 질감과 물성이다.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물질 덩어리, 터실터실하고 부드럽고 날카로운 질감(아니면 촉감?)에 의해 구별되는 질료, 그리고 시멘트와 대리석, 철과 스테인리스스틸로 변별되는 물성, 카빙(깎아내기)과 몰딩(떠내기)으로 나타난 방법론이 조각을 만든다.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조각이다. 이처럼 조각의 물성을 강조한 것은 노동력의 산물인 정통적인 조각을 제작하는 작가 층이 점차 엷어지는 현실에서(개인적으론 그래서 오히려 더 희소가치가 크다고 생각하지만) 조각 고유의 미덕을 되묻는 것이어서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혹 이번 전시가 대중성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최초 대구현대미술제의 정신이 변질된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섣부른 예단은 금물이다. 숨고르기에 들어간 것으로 보아야 하고, 그 자체 자기정체성을 찾아가는 꼭 필요한 한 과정으로서 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조각적인 조각, 조각다운 조각의 원형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를 통해 대중에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가는 예술의 공공성을 실천하고 있다는 점에서 때론 난해한 현대미술과 저들만의 리그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동양 최대의 수문에 해당하는 강정보와, 세계적인 건축가 하니 라시드가 설계한 디아크와 같은 인프라, 그리고 여기에 대구현대미술제의 아방가르드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역사적 현장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마음속에 품은 꿈이 예술로 승화되는 섬을 만날 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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