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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현/ 연민과 서정, 삶을 기록하는 도구

고충환

정지현/ 연민과 서정, 삶을 기록하는 도구 


정지현은 처음에 브르콜리와 같은 식재료를 그리는 것으로부터 그림을 시작했다. 물론 전작이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주제의식이 엿보이는, 그리고 그 주제의식이 일정한 형식화에 성공한 경우로 치자면 사실상 이 시리즈 그림이 처음으로 보인다. 식재료를 확대해 그린 이 그림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의미를 예시해주고 있다. 보통 그림을 시작할 때 막연하기 마련이고, 이때 대개는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이라도 입은 듯 이 주제 저 주제를 찾아 기웃거리기 마련인데, 작가는 자기 주변으로부터 시작했다. 농사를 짓는 집안에서 성장한 탓에 친숙한 것도 있겠지만, 식재료는 무엇보다도 일상적인 소재다. 이런 일상적인 소재를 연필과 흑연, 목탄과 콩테와 같은 가장 기본적인 묘화재료로 마치 정밀묘사라도 하듯 정직하게(?) 그린다. 
한국화를 전공한 탓에 친숙한 재료들이기도 하지만(무엇보다도 수묵처럼 무채색 재료라는 점이 친숙했을 것이다), 이보다는 일상적인 소재를 기본적인(재료도 기본적이고 방법도 기본적인) 형식으로 그린다는 점이 예사롭지가 않다. 주변에서 시작하고 기본에서 시작하는 것은, 더욱이 그렇게 시작해 일정한 형식화에 성공하는 것은 사실을 알고 보면 쉬운 일도 흔한 일도 아니다. 향후 작업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예감케 한다. 그렇게 작가는 사물초상화로 부를 만한 형식의 한 가능성을 예시해주고 있다. 언제 어떻게 사물이 추상화되는지를 예시해주고 있다. 탈맥락과 재맥락이 알만한 사물대상을 추상화하고 선입견을 재정의하게 만든다. 사실적인 방법을 통해 낯설게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물이 전혀 다른 비전을 열어 보이는 것이다. 사물의 잠재적 가능성을 발굴하고 캐내는 경우로 봐도 되겠다. 
그리고 작가는 녹색의 이미지를 그린다. 녹색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림에 녹색은 없다. 처음부터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지만 작가는 다만 연필과 흑연, 목탄과 콩테를 재료로 사물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린다. 물론 원하는 분위기를 얻기 위해 그림을 뭉개기도 하고 그림 위에 흐릿하게 덧칠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런 사실적인 재료와 방법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작가는 녹색이 아닌, 녹색의 이미지, 녹색이라는 이미지를 그렸다. 이런 이미지를 형식실험하기에 색깔보다는 무채색이 효과적이다. 그건 숲의 이미지와 연관되고, 제주도의 한 시골에서 자란 작가의 유년시절의 기억(혹은 추억)과 연관된다. 어둑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두려움과 공포심을 자아내는, 캐니와 언캐니가 그 경계를 허무는, 존재의 비의를 간직하고 있는 유년의 숲의 이미지를 현재 위로 소환한 것이다. 혹, 녹조와 같은 사회비판의식을 그린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후 작가는 자연으로부터 삶의 현장으로 방향을 트는데, 그 매개역할을 하는 것이 초소 혹은 감시탑 시리즈다. 초소 혹은 감시탑은 대개 도시가 끝나는 변방이나 자연이 시작되는 접경지대에 위치해있기 마련이다. 자연에 이식된 듯, 초소 혹은 감시탑이 이질적으로 보인다. 그림에 사람은 보이지 않지만, 사람을 암시한다. 초소 혹은 감시탑이 감시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일 것이므로(군대? 감옥? 정신병원? 공교롭게도 하나같이 미셀 푸코가 판옵티콘과 헤테로토피아로 지목한 장소들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이후 삶의 현장 속으로 들어오고, 사회비판의식을 그리게 된다. 사실주의가 현실주의(현실에 대한 실천적 참여)로 승화되면서 구체성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일하는 사람들(노동자들)을 그리는데, 농사를 짓는 가정환경 탓에 시골사람들을 주로 그리고, 대개는 저 홀로 일을 하는 사람들을 그린다. 그렇게 저 홀로 일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이기도 하고, 존재의 알레고리처럼도 읽힌다(존재론적으로 모든 사람은 우주에 던져진 미아들이고, 고립된 섬들이다). 현재 농촌이 처해있는 현실비판을 넘어, 작가가 그림에 그려놓고 있는 서정적 분위기가 그렇게 읽혀지게 만든다. 작가의 감수성 아니면 능력으로 봐도 되겠다. 그렇게 일하는 사람들 중 특히 축제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흥미롭다. 새벽에 체육관 운동장에 동원된 사람들인데, 밤에 있을 축제를 위한 리허설이 한창이다. 리허설은 공개된 행사도 일상적인 모습도 아니다. 축제도 공연도 관객을 전제로 한 것인데, 이런 관객이 없는 예행연습이 마치 상대가 없는 혼잣말이나 헛몸짓을 보는 듯 낯설고 생경하다. 어쩜 삶은 봐주는 사람이 없는 혼잣말이나 헛몸짓을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공허한 존재가 오버랩 된 일상 속 장면을 보아내고 발견하는 것도 작가의 능력이다. 
작가는 시골사람들을 주로 그린다고 했다. 시골사람들의 존재감이 두드러져 보일 때(?)는 일할 때보다는 시위를 할 때이다. 전경과 대치하고 있는 모습이나, 도열한 전경의 방패 막 앞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모습, 손에 각목을 들고 있는 모습이나, 무장한 전경들 뒤편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의 모습은 보통의 시위현장과 다르지가 않다. 그러나 몸빼바지에 머리에 수건까지 동여맨 일상복 차림의 농부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것이나, 시위에 돼지를 동원한 것(구제역파동?), 밧줄로 소를 매단 것이나(젖소파동?), 심지어 자신의 목을 맨 것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연장으로 자신이 애써 생산한 걸 깨 부신다거나(농산물파동?), 차가 지나가지 못하게 막을 요량으로 바리케이드 대신 돌을 옮겨와 벽을 쌓는 것도(성주사드파동? 제주해군기지파동? 밀양송전탑파동?) 다른 모습이다. 그 다른 모습에서 작가는 농부들의 시위가 그들의 노동과 닮았고 일상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보도사진의 관습을 흉내 내 모자이크처리방식을 도입한다. 민감한 사안이 걸린 부분, 예민한 부분을 모자이크 처리해 덮어서 가리는 것인데, 언론의 관행과 보도사진의 관습을 비판한 것이다. 사실보도를 내세운 편집의 기술과 이미지정치학을 비판한 것이다. 이처럼 이제 더 이상 농촌이 농촌이 아니다. 농촌은 도시와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물린 삶의 터전이며, 생존을 위한 투쟁의 현장이다. 
작가는 그 투쟁의 현장을 씁쓸하게 바라보고, 기록한다. 슈터다. 사진 찍는 사람, 사진기자다. 작가 스스로 투쟁현장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것이지만, 외부인의 입장에서 시위현장을 기록하고 객관 보도하는 것의 한계와, 그리고 어쩌면 왜곡보도를 비판한 것이다. 슈터는 쏘는 사람이다. 그 속에 폭력이 들어있다. 이처럼 사진을 찍는다는 것(사진기를 들이댄다는 것), 기록한다는 것은 경우에 따라서 폭력적인 행위일 수 있다. 이런 슈터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 중 또 다른 흥미로운 경우가 생산자다. 생산자? 밭에는 화장실이 따로 없으므로 등을 보인 채 똥 누고 오줌 누는 사람을 보여준다. 어느 정도는 작가의 자화상일 것이다. 그리고 작가가 묻는다. 우리 모두는 뭘 생산하고 있는지. 이런 시의성 있는 작업, 때론 그 자체 시니컬한 존재론에 연동된 작업, 그래서 예사롭지가 않은 작업을 매개로 작가는 존재의 의미를 심화시킨다. 형식으로 치자면 때로 평면으로, 그리고 더러는 설치로 풀어내면서 공간 확장을 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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