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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현/ 옷, 애틋한, 설레는, 그리운 페티시

고충환

이지현/ 옷, 애틋한, 설레는, 그리운 페티시 


옷은 인간적이다. 동물은 옷을 입지 않는다. 인간만이 옷을 입는다. 인간에게는 몸을 보호해줄 털도, 화려한 깃털도, 비상할 수 있는 날개도 없다. 인간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를 꾸미기 위해(상대를 유혹하기 위해?), 그리고 날아오르기 위해(이상을 펼치기 위해?) 옷을 입는다. 자신이 결여하고 있는 것을 옷이 보충해준다. 뒤집어 말하면 인간의 존재론적 결핍을 옷이 증명해준다. 
그렇게 인간은 옷을 입음으로써 비로소 인간적이게 된다. 옷을 매개로 문명적 인간으로 태어나고, 제도적 인간(특히 유니폼의 경우)으로 거듭난다. 다시, 그렇게 옷이 날개라는 말이 벌거벗은 인간과 대비된다. 원래 호모 사케르(벌거벗은 인간)라는 말은 희생양을 의미한다. 벌거벗은 인간, 더욱이 벌거벗겨진 인간, 더 이상 숨을 데가 없는 인간, 적나라한 인간이 희생양이다(이는 결코 수사적 표현이 아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그렇게 옷은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으로서의 결여와 결핍, 수치심과 부끄러움, 상처와 트라우마, 때론 치부를 덮어서 가려주는, 그러므로 어쩜 희생양의 원초적 상태로부터 존재를 구제해주는 문명의 발명품이며 제도적인 장치일 수 있다. 
이지현은 옷을 소재로 작업한다. 그런데 그가 옷을 다루는 방식이 예사롭지가 않다. 멀쩡한 옷을 망치고 해체한다. 대리석 판에 옷을 펼쳐놓고 망치로 두들겨 패 그 조직을 해체하고 너덜너덜하게 만든다. 얼마나 격렬한지 그렇게 너덜너덜해진 옷 조직에는 때로 대리석 판에서 떨어져 나온 미세한 조각이 묻어날 정도다. 그리고 그렇게 해체된 천 조각을 다시 한 땀 한 땀 바느질해 원형 그대로 복원한다. 복원이라고는 했지만, 그렇게 복원된 옷이 처음의 옷과 같을 수는 없다. 전체적인 형태는 여전할지 모르나 이미 조직이 변질되고 의미가 달라진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그런 헛짓을 하는가. 그 헛짓에는 무슨 의미심장한 의미라도 있는가(헛짓은 예술의 특수성과 관련이 깊다). 바로 너덜너덜해진 옷이며 조직이 변질된 옷에 방점이 찍히고, 그 의미가 달라진 옷이 주제다. 옷은 옷 이전에 천이다. 물성이다. 전작에서의 책 작업이 책 이전에 종이의 물성을 드러냈듯이 옷 이전에 천의 물성을 강조한다. 책이라는 기호를 해체해 종이라는 물성을 드러내고, 옷이라는 기호(사회적 기호 그리고 문화사적 기호 그리고 어쩌면 계급적인 기호)를 해체해 천이라는 물성을 강조한다. 그렇게 어쩜 기호화된 사물대상, 기호에 가려진 사물대상의 본성(그리고 본질)을 복원하는 과정이며 행위일 수 있겠다. 
그리고 옷은 인격의 일부이며 감정의 한 부분일 수 있다. 바로 너덜너덜해진 옷이 상처를 암시하고 삶을 상기시키는 것이 그렇다. 어떤 서정적인 느낌(이를테면 분노와 증오 그리고 그리움과 같은)을 환기시키는 것이 그렇다. 너덜너덜해진 옷은 말하자면 존재론적 상처의 표상이며 물화된 형식일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이 작가의 옷 작업이 갖는 매력인데,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 좀 더 깊이 파고들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설치작업에서 장소 특정적 작업이 있듯이 작가의 옷 작업 역시 매번 작업실이나 전시장소가 달라지는 것에 맞춰 그 의미 또한 달라진다. 지역적 특수성을 반영하는 것인데, 이를테면 영천작업에선 영천지역주민들에게서 수거한 옷을 소재로 작업한다. 그 과정에서 한 주민은 이혼한 사위의 옷을 가져다주면서 옷을 갈기갈기 찢어달라고 주문한다. 개인적인 분노를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옷은 개인적이지만 정작 작가의 옷 작업은 익명적이다. 바로 이처럼 익명적임으로 해서 보편적인 공감을 얻는다. 그럼에도 여하튼 당사자(개인)는 옷들 중에서 바로 그 옷을 알아볼 것이고, 분노의 적절한 표현(표출?)으로 읽을 것이다(분노가 해소되고 치유될 것이다). 
그리고 제주작업에선 해녀들이 물질할 때 입는 옷을 소재로 작업한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물질이란 어쩜 매순간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매번 절체절명의 그 순간과 더불어서 살고 늙어간다. 너덜너덜해진 옷들은 바로 그런 해녀들의 말 못할 속사정을, 죽음과 재생의 경계를 넘나드는 삶의 방식(어쩜 태도)을 침묵으로서 증언한다. 공교롭게도 물 자체가 죽음과 동시에 재생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양가적인데, 바로 그런 물(그리고 어쩜 삶)의 양가성을, 그 신화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증언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대구작업에선 의상 디자이너의 컬렉션 드레스를 협찬 받아 작업한다. 그리고 동상이몽이라고 부른다. 하나의 사물대상 혹은 현상과 두 개의 다른 꿈이다. 한 사람은 옷을 만들고, 다른 한 사람은 옷을 해체한다. 한 사람은 옷의 전형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다른 한 사람은 혹 옷이 내재하고 있을 지도 모를 상처를 부각한다. 한 사람에게 옷은 우아하기 때문에 아름답고, 다른 한 사람에게 옷은 상처 때문에 아름답다. 얼핏 아름답고 우아한 드레스가 상처와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아름다움은 상처와 관련이 깊다. 서양으로 치자면 바니타스 전언이 그렇고, 동양의 경우에는 화무십일홍의 전언이 여기에 해당한다. 하나같이 덧없는 아름다움을 겨냥하고 있고, 아름다움은 어김없이 상처를 내재화한다. 하나의 꽃이 아름다운 것은 속절없이 지는 것 때문이고, 하나의 옷이 아름답다면 그건 옷에 내재화된 상처 때문이다. 내면적인 아름다움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렇게 작가는 옷을 해체시키는 과정을 통해 내면을 외화 하는, 내면에 형상을 찾아주는 고유의 방법론을 발명했다. 
그렇게 작가에게 옷은 애틋하고, 옷을 해체시키고 복원하는 과정은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옷을 매개로 익명적인 누군가와 맞닥트리는 경험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대구작업에 해당할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그 애틋하고 설레는 마음을 또 다른 형태와 경우로서 풀어낸다. 직접 여자 옷을 사러 다니고, 그렇게 사 모은 옷들을 일일이 해체하고 복원한다. 그리고 그 일련의 과정이며 작업을 J에게, 라고 부른다. 작가에게 J는 그리운 장소와 대상을 의미한다. 대구에 대한 연고와 그리움의 대상을 의미한다. 작가의 사적인 속사정과 허구적인 서사를 반영한 것이지만(혹 대구시절 작가에게 애틋하고 설레는 감정을 불러 일으켰던 여자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상 J는 익명적인 누군가에 해당하고, 그런 만큼 작가의 작업을 대하는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나름으로 감정이입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열려있다. 인격을 대신하는 사물대상(오브제)을 페티시라고 한다. 작가가 보기에 옷은 상처를 내재화한 인격이다. 애틋한 것도 상처고, 설레는 것도 상처고, 그리운 것도 상처다. 그렇게 작가는 하나의 옷에 내재화된 애틋한, 설레는, 그리운 상처를 불러냈다. 그리고 그렇게 페티시를 사용하는 다른 방법을 예시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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