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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동필/ 부조리한 존재, 현실과 이상의 갈림길에 서다

고충환

류동필/ 부조리한 존재, 현실과 이상의 갈림길에 서다 


내 작업의 화두는 현실과 이상이라는 두 가지 견해로 구성된다, 이 두 이야기가 균형 잡힌 내 가치의 상징, 이라고 작가는 작가노트에다 적어놓고 있다. 아마도 작가의 그림을 관통하는 주제일 것이다. 작가의 그림을 지지하는 인문학적 배경일 것이다.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그림을 넘어 삶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이기도 할 것이다. 
그림과 작가, 주제와 작가가 서로 무관한 경우가 없지 않지만(특히 추상미술에서 그렇다), 그러나 대개 그림은 평소 그림에 대한 그리고 삶에 대한 작가의 태도가 반영된 경우이기 쉽다.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 굳이 그림을 한 개인의 그리고 한 시대의 거울이라고 보는 반영이론이나, 그림은 나의 분신이라는 수사적 표현을 빌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작가의 경우에서처럼 한눈에도 이야기(서사)가 뚜렷한 편이고, 나아가 노트에조차 이야기를 언급할 정도라면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이처럼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 중 가장 강력한 경우로 치자면, 예술은 이야기의 기술일 수 있다. 저마다 지어낸 이야기로 상대방을 설득시키고 공감을 얻는 기술이다. 비록 지어낸 이야기지만 사실 그 이야기는 현실로부터 건너온 것이며 현실을 해석한 것이란 점에서 현실성을 얻는다. 비록 작가 개인의 이야기지만, 사는 꼴이며 생각하는 것이 어슷비슷하다는 점에서(칸트라면 아프리오리 곧 선험적으로 주어진 공통감각이라고 했을) 보편성을 얻는다. 어쩌면 예술은 이처럼 삶의 현장으로부터 보편성(다르게는 전형)의 잠재적 계기를 발견하고 캐내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주제만 놓고 본다면 작가 류동필의 주제의식은 전형적이다. 보편적이다. 그래서 쉽게 공감을 얻고 설득력을 얻는다. 현실과 이상(어긋나는 현실과 이상)이야말로 부조리한 존재의 전형적인 알레고리다. 존재는 이중적이다(그리고 다중적이다). 정작 현실을 살면서, 동시에 이상을 꿈꾼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만 그 경우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현실적인 삶은 지난하고 이상은 화려하다(흔히 이상을 날개에 비유하는 것이 그렇다). 일탈의 경향이 강하다는 점에서, 나아가 아예 일탈을 정향한다는 점에서 이상은 대놓고 비현실적이고 공공연하게 반현실적이다. 꿈이 그렇고 행복이 그렇고 유토피아가 다 그렇다. 특히 지상에는 없는 곳(장소)이란, 유토피아의 의미는 의미심장하다. 
그러므로 이상은 기본적으로 환상이며, 판타지를 창조하는 기술이다. 현실적인 삶이 지난하면 지난할수록, 그만큼 더 비현실적이고, 더 일탈적이고, 더 화려한 기술이다(이상은 현실에, 부정적인 현실에 비례한다). 그러므로 어쩌면 이상은 지난한 현실에 대한 일종의 보상심리로서 주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저마다 내면에서 불러낸 판타지를 매개로 지난한 현실을 지나가는 것이다. 그 판타지의 기술이 예술이다. 한편으로 현실에 대한 부정의식을 내포하면서, 그로부터 현실을 건너가는 힘을 얻는다. 모든 이상주의자는 현실에 대한 전복을 꿈꾸고 어느 정도 예술 역시 그렇다는 점에서, 모든 예술가는 동시에 잠재적인 이상주의자이기도 하다. 
그렇게 작가 류동필은 현실과 이상이 상충하는 이율배반을 그리고, 모순적인 현실을 그리고, 존재가 부조리한 이유를 그린다. 작가는 균형 잡힌 내 가치, 라고 했지만 쉽게 균형 잡힐 것 같지는 않다. 굳이 균형을 잡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존재의 기초가 이미 불균형(혹은 불안정성 혹은 불안 다르게는 역동적 현실)인 것이고, 그래서 예술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오히려 현실과 이상이 상충하고 어긋나는 이율배반적인 현실, 모순적인 현실, 부조리한 현실 자체를 강조하고 부각하는 것에 작가의 그림의 의미가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Story of Silence, 침묵의 이야기. 여기에 동물들이 있다. 물속을 유유자적 유영하는 물고기가 있고, 도약을 예비하는 혹은 날개를 펼쳐 허공을 가르는 독수리가 있고, 침을 흘리며 가쁘게 숨을 고르는 무소가 있고, 바람을 가르며 질주하는 말들이 있고, 집체만한 체중이 앞쪽으로 쏠린 특유의 자세를 보여주는 고릴라가 있다. 물고기가 예외적인 경우이지만, 대개는 동물왕국에서나 볼 법한 동물들의 역동적인 현실이며 현장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동물들의 역동적인 삶이 주제일까.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이며, 자연친화적인 삶을 주제화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역설적 표현이다. 역설적 표현? 현실에 대한 부정의식을 강조하는 화법이다. 가만히 보면 재현된 동물들의 생김새가 예사롭지가 않다. 한눈에도 알만한 영락없는 동물들이지만, 알만한 것은 다만 여기까지만 그렇다. 나머지는 다 낯설다. 바로 낯 설은 방법으로 알만한 동물들을 재현하는 것에 작가의 그림의 독창성이 있다. 이를테면 부분 부분이 기계관절로 연결된 세부며, 빛을 난반사하는 금속성의 표면이 차가운 느낌을 주고 무표정하고 중성적인 느낌을 준다. 세부들이 몸 바깥을 향해 날카롭게 뻗쳐있는 깃털이 공격적인 느낌을 주고 자기방어적인 느낌을 준다.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 그리고 낱낱의 새 깃털이 다 그렇다. 흡사 강철 몸으로 구조화된, 강철 갑옷을 입은, 몸 자체며 존재 자체가 무기인, 그런 기계 생명체를 보는 것 같다. 대개는 무채색 위주의 절제된 색채감정이 이런 차가운 금속성의 분위기를 강조하면서 생경한 느낌을 더한다. 
작가는 말하자면 동물 대신 기계동물을 그렸고, 유기체 대신 기계 유기체를 그렸다. 이 기계 생명체들은 다 뭔가. 작가는 왜 기계 생명체들을 그렸는가. 이 기계 생명체들이 현 시대의 알레고리로 읽힌다. 자연을 상실한 시대의 징후로 읽힌다. 이를테면 현대인은 온통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앓고 있다?). 상실은 현대인의 징후가 되었다. 지극한 상실감이야말로 그가 다름 아닌 현대인임을 증명해주는 증상이 되었다. 그렇게 현대인이 상실한 것들 가운데 자연이 있다. 번쩍번쩍하는 금속성 질감의 철갑옷을 입은 기계자연이 상실된 자연을 침묵으로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침묵의 이야기라는 주제는 그런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인터넷이 보급된 이후, 게임 애니메이션이 보편화된 이후 가상현실과 인공자연이 만나지는 접점에서 탄생한 신자연의 출현을 그려놓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자연 이후의 자연, 몰살된 자연 이후 보다 강력해진 신자연의 출현으로도 읽힌다(도래할 그리고 어쩌면 이미 도래했을 신인류의 출현에 부합하는). 그러나 그건 몰살된 자연을 전제로 한 것이란 점에서 묵시록적인 비전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능화 되고 도구화된 이성에 대한 알레고리로도 읽힌다. 이를테면 인간의 이성은 마침내 자연을 도구화하기에 이르렀고, 종래에는 인간 자신마저 기계로 만들어버리고 말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기계야말로 이성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기계동물을 소재로 한 이 일련의 그림들은 어쩌면 도구화된 자연, 기계적인 인간, 효율적인 사회, 기능적인 관계, 그리고 그 모두에 의해 지지되는 비인간화가 첨예화된 현실을 침묵으로서 증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비인간적인 현실을 알레고리로서 그려놓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Mr. Fun, 재밌는 남자. 그렇게 작가는 암울한 현실, 묵시록적인 현실, 비인간화한 현실을 그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현실을 그린다. 현실이라기보다는 이상을 그린다. 희망을 그리고, 꿈을 그리고, 행복을 그리고, 유토피아를 그린다. 이상을 현실에, 현실인식에 대비시킨 것이다. 비록 남자라고는 했지만, 기계동물과 마찬가지로 기계인간을 그려놓은 것이어서 사실은 사람 일반으로 보면 되겠다(여담이지만 기계는 성정체성 논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그런 만큼 로봇과 같은 기계인간을 제 3의 성 정체성으로 제안하기도 한다). 그는 비록 기계인간이지만 기계동물처럼 암울하지도 묵시록적이지도 비인간적이지도 않다. 명랑하다. 발랄하다. 행복하다. 우선 색깔부터가 화려하고 원색적이어서 발랄하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 
그런 우호적인 느낌과 더불어 각종 연주자들이 등장하는데, 기타를 치는 사람, 섹스폰을 부는 사람, 트럼펫을 부는 사람, 전자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람, 바이올린을 켜는 사람, 첼로를 켜는 사람, 그리고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사람들이다. 때론 독주로 더러는 합주로 음악을 연주하는 이 사람들은 아마도 행복을 노래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행복에 겨운 노래를 맞은 편 나뭇가지에 앉은 새가 경청하는데, 아마도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노래할 것이다. 강아지를 데리고 꽃구경 나온 사람도 있는데, 유유자적한 삶을 노래한 것일 터이다. 
그렇게 때론 낙엽 지는 나무 밑에 앉아 그리고 더러는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 사이사이로 격자무늬와 같은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패턴이 보이는데, 그 패턴이 배경화면의 색면과 어우러져서 리드미컬한 운율을 자아낸다(청각적 기호의 시각화?). 동물 모티브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복잡한, 화면을 온통 채우고 있는 모티브들의 조밀한 구성 역시 이런 공감각(청각기호와 시각기호가 서로 호환되는)을 자아낸다. 그저 행복한 이상을 그린 것이라기보다는, 사실은 행복을 음악에 빗댄 것인 만큼 그림의 구성이며 세부가 음악적 운율을 암시하는 데 바쳐진 것 같은 인상이다. 
그리고 라벨이나 광고 전단지와 같은 인쇄물이 오브제로서 부분 차용되는데, 아마도 대중문화의 영향을 반영할 것이다. 비록 이상을 그린 것이지만 그 자체 공허한 이상이 아닌 것임을 증언해주는, 말하자면 작가의 그림으로 하여금 현실성(그리고 일상성)을 담보하게 해주는 미학적 장치로서 도입된 것일 수 있겠다. 그렇게 작가는 마치 피스톤 같은 기계인간이며, 실린더 같이 생긴 원통형인간을 행복을 연주하는 연주자로서 제안해놓고 있는데, 보기에 따라선 페르낭 레제 이후 후기 입체파를 떠올리게도 한다. 그렇게 작가는 행복 전도사라는 캐릭터를, 행복한 이상에 걸 맞는 한 전형을 예시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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