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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담벼락, 눈(雪) 살갗에 그리다 _현대인의 징후 혹은 증상에 대하여

고충환

땅 담벼락, 눈(雪) 살갗에 그리다
_현대인의 징후 혹은 증상에 대하여 


현대인의 징후 혹은 증상이 여럿 있지만 그 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단연 스트레스를 들 수가 있다. 고대인이라고 해서 스트레스가 없지는 않겠지만, 아무래도 스트레스는 문명화에 비례하는 것 같다. 사회가 고도로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스트레스 수치도 덩달아 높아진다. 문명화된다는 것은 제도화된다는 것이고, 알게 모르게 틀 화된 삶의 방식을 강요받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프로이트가 보기에 스트레스는 생명보존현상의 자연스런 발현이다.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생명이 스스로를 보호해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자연스런 현상이라는 말이다. 스트레스에는 정신적 외상이 있고, 생리적 외상이 있다. 특히 생리적 외상은 달라진 외부환경에 몸이 직접 반응하는 것으로서, 최근 수 년 내에 문제시된 미세먼지가 그 적절한 예가 되어준다. 최근에 마스크는 일상이 다반사가 되었고, 이러다가 방독면을 쓰고 다닐 날도 멀지 않지 싶다. 그렇게 현대인은 뻑뻑하고 답답하고 숨이 막힐 것 같은 일상을 산다. 생리적으로도 그렇고 정신적으로도 그렇다. 미세먼지로 뿌연 하늘을 보고 있으면 마치 정신적 외상이 물화된 형식을 얻어 가시화된 것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노상희(미세먼지)와 복기형(먼지채집)이 이런 미세먼지를 주제화한다. 탈장르 현상이 가속된 이후 하나의 뚜렷한 트렌드로 자리 잡은 학제간연구방식에 의해 자기표현의 영역을 심화시키고 있는 경우로 보인다. 예술과 기상학, 예술과 의학, 예술과 생물학, 예술과 공학이 경계 너머로 상호 합치되는 것이며, 과학을 매개로 예술이 자기서사의 범주를 확장시키는 식의 이른바 유사과학이 예시되고 있는 경우로 보인다. 
한편으로 현대인의 징후 혹은 증상으로 자기정체성 문제를 들 수가 있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라고 절규한 리어왕 이후 정체성 혼란 혹은 상실은 다만 그 경우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현대인이면 누구나 앓는 질병이 되었다. 하나의 목소리가 포함하고 있는 이질적인 목소리의 공존을 인정한 미하일 바흐친의 다성성 개념 역시 이런 분열적인 정체성(페르소나와 아이덴티티), 다중적인 정체성 문제를 뒷받침하고 있다. 윤지선이 이런 정신적 외상을 주제화한다. 대개는 자기 얼굴이지 싶은 초상사진 위에 재봉질 해 누더기(?)를 만든다. 멀쩡한 사진을 박음질해 누더기를 만드는 과정은 자기를 부정하는 과정처럼 보이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자기를 찾는 과정처럼 보인다. 사진의 취약점으로 물성의 결여를 들 수가 있을 것인데, 과도한 물성의 부여로 인해 사진의 물성을 재고하게 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또 다른 현대인의 징후 내지 증상으로 표면에 대한 관심을 들 수가 있다. 현대인의 관심은 표면적이고 표피적이고 피상적이다. 현대인의 삶의 방식은 너무 바빠서(?) 본질적인 것에, 궁극적인 것에, 핵심적인 것에 관심을 둘 새가 없다. 세상의 축도인 인터넷이 일반화된 이후, 이미지의 정치학(이미지가 곧 현실이고 진실이다)이 보편화된 이후에 이런 표면에 대한 관심은 더 가속화되고 있다. 그 미학적 대체물이 파사드다. 원래 건물정면양식을 뜻하는 파사드는 이후 건물의 구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전적으로 외관을 장식할 목적으로 건물에 덧댄 구조물을 의미하게 되었다. 집을 소재로 한 이갑재의 작업이 이런 파사드를 주제화한다. 그가 조형한 집은 하나같이 평면으로 된 정면을 보여준다. 종이에 평면 투각한, 유독 창문을 강조한 가변 설치형식의 작업이 아르브뤼(원생미술 혹은 가난한 미술)와 함께 가벼움의 미학을 떠올리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현대인의 징후 혹은 증상으로 상실감을 들 수가 있다. 현대인은 신을 상실했고 자연을 상실했다. 유년을 상실했고 자기를 상실했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대인은 온통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고 상실감을 앓고 있다. 지극한 상실감, 거의 자의식이 된 상실감이야말로 그가 다름 아닌 현대인임을 증명해주는 징후 혹은 증상이 되었다. 그렇게 상실된 것들이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이성희의 사진이 그렇다. 도시변방 풍경 위로 점경으로 보이는 사람들, 무표정한 사물풍경, 유년의 기억을 더듬어 되찾은 수풀만 무성한 학교 운동장과 공터가 아득하고 쓸쓸하다. 향수를 자아내고 위로를 준다. 기억을 더듬는 행위는 상실된 것들을 소환하고 재확인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그 과정이 고유의 정서를 환기시키는데, 알고 보면 예술의 많은 부분이 그 정서에 빚지고 있다. 
대전지역에 연고를 둔 5명의 작가를 초대한 이번 전시는 외부전문기획자를 초빙해 전시를 의뢰한 경우에 해당한다. 인력풀을 활용해 지역기반을 공고히 하는 한편, 미술관의 외연을 확장하는 바람직한 경우라고 생각한다. 이미 미술관은 기지화 거점화되어져 가고 있고, 향후 미술관은 그렇게 변화된 환경에 부응해야 한다. 그 방책은 결국 사람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이번 전시에 초대된 작가들의 면면에서 우리가 막연하게 현대성이라고 부르는 것의 실체를 재확인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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